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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좋아한 사내

[강종성의 이야기보따리(1)]

[그린경제=강종성 이야기꾼] 나는 어려서 과히 똘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잠이 많아, 저녁만 먹으면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져 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다만 한 가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여 얘기판 만 벌어지면 밤을 홀딱 밝히어도 졸릴 줄을 몰랐다.

그래 하도 얘기를 즐기니까, 우리 어머니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는데, 어찌나 얘기를 즐기는지, 누가 옛날얘기만 하면 들어앉아서 극성맞게 베끼는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해서 베끼면, 안방 뒷문 밖에다 뒤웅박을 달아두고 차곡차곡 모으는 것인데, 그렇게 모은 것이 세 뒤웅박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자라서 이제는 장가를 들게 되었다. 산 넘고 산 넘어 마을의 이쁜 색시에게 혼인을 정해 놓고 날짜까지 받아 그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들일이 바빠 아버지 어머니도 들판에 나가시고, 신랑은 글방에 가고, 하인들도 모두 논밭에 나가 집안엔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 집 머슴하나가 연장을 가지러 집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안은 대낮이건만 밤중같이 고요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들린다. (이상도 하다. 번연히 아무도 없을 텐데….)

머슴은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뒷곁으로 돌아갔다. 그랬더니 그 얘기소리는 뒤웅박 속에서 나는 것이 아닌가?

『얘, 도깨비얘기야! 호랑이얘기야!』

『왜 그러니 여우얘기야!』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좀 상의할 일이 있으니, 모두들 들어』

『그래 무슨 얘기냐?』

『이집 아들이 장가 간다매?』

『누가?』

『누군 누구야? 우릴 이렇게 잡아 가둬 놓고 있는 그 녀석 말이지. 우린 얘기니까 세상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거 아니냐? 그런데 이 놈이 이렇게 몇해 씩 잡아다 가둬 놓으니 배길 수가 있어야지?』

『그래 그래 참 갑갑해 죽겠어!』

『그래서 요놈을 혼내 주자는 거야』

『아주 그 까짓 거 죽여 버리지 뭐』

『그래 그래 호랑이얘기 말이 맞다』

『그래? 그럼 그놈을 이번에 아주 죽여 버린다』

『그래 그래』

『요 녀석이 장가가는 게 이 산 넘어 마을이란 말야. 그래 그 첫째고개에서 우리가 맑은 샘물이 되어 있을 거 같으면, 이 어린 신랑이라 더위에 목이 말라 할 꺼 아니냐? 그래 그 물을 한 모금 마시면 죽게 하자는 말이야』

『그것 참 좋은 꾀다』

『그렇지만 그 물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하지?』

『그 땐 말이야, 다음고개에서 길 옆에 아주 예쁘고 탐스러운 딸기가 돼 가지고 있을라치면, 신랑이 먹고 싶어할 것이거든, 그래 그걸 따 먹으면 죽게하잔 말야』

『그것 참 좋은 꾀다』

『그렇지만 그 딸기를 안 먹으면 어떻게 하지?』

『그러거들랑 마지막으로는 무지한 방법을 쓰자』

『무슨 방법인데?』

『색시집에 가면 사모관대하고 초례를 치를 거 아냐? 그 때 색시 절 받고 신랑이 절할 차례에, 커다란 송곳이 돼 가지고 복국에 매달려 있다가 별안간 떨어지면서 신랑 잔등을 꿰뚫어 버리자 그 말이야』

『그것 참 됐다. 그러면 그놈이 장비면 살아?』

『쉬잇! 그럼 누가 들을라. 우리 상의는 이만침 해 두자』

그러더니 조용해 진다. 머슴은 곰곰이 생각하였다.

(이거 큰일 났구나!)

얼마 안 있어 혼인 날이 닥쳐왔다. 잔치를 차리느라고 야단들이다. 앞뒤에 많은 사람을 늘어 세우고 신랑 행차는 집을 나섰다. 머슴은 자청하여 신랑의 마부가 되었다. 그리곤 말고삐를 왼손에 잔뜩 감아쥐고, 물푸레나무 채찍을 들었다.

첫째 고개에 당도하였다. 신랑이 목이 말라 죽겠다고 한다. 그리곤 저기 저런 맑은 샘이 있으니, 물 한 모금만 먹여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마부는 들은 척도 안하고 채찍으로 말 궁둥이를 갈겼다. 말은 어흥흥 소리를 치며 내달리고, 신랑은 떨어질까 보아 말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샘물 곁을 멀리 지나 첫째 고비는 무사히 넘겼다.

다음 딸기 차례도 이렇게 하여 탈 없이 넘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는 신랑은 머슴을 욕하고 주먹으로 때렸다.

그래도 머슴은 탓하지 않고 지성으로 시중을 들었다.

이제 옷을 갈아입고 초례에 들어갈 차례다. 마부가 신랑 절 시키는 법이 아니라고 아무리 일러도 막무가내다. 나중엔 사뭇 지랄을 친다. 그래 후행 샌님도 할 수 없이 그놈 말을 들어 주었다.

머슴은 붉은 갓을 쓰고 남색 철릭을 입고 신랑의 팔을 껴들었다. 봇수를 맞추어 팔밀이의 인도를 받아 세 번 읍하고 안마당엘 들어섰다. 기러기를 놓고 네 번 절하고, 이번엔 초례 절 차례다.

색시가 날아가는 듯이 절 했다.

이제 신랑이 절할 차례다.

『이이그머니나!』

소리가 마당에서도 나고 마루에서도 났다.

머슴 녀석이 잔뜩 껴들고 섰다가 신랑을 마당 복판으로 내동댕이친 것이다.

마루바닥에는 한 자가 넘는 송곳이 내려와 「퍽」하고 꽂혔다.

초례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설레지 들 마시오』머슴은 자신있게 외쳤다.

『이제 어려운 고비는 끝났으니, 지체말고 자리를 바꾸어 예를 끝냅시다』

혼인절차를 무사히 마치고온 신랑집에서는 머슴을 불러 무수히 치하하고 무엇이고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마 고까지 하였다.

머슴은 상도 아무 것도 싫다고 굳이 사양하면서, 자기가 들은 대로와 한 대로를 설파하였다.

『그놈의 뒤웅감의 종이를 불살라 버려라』

주인영감은 소리쳤다.

『천만의 말씀! 큰일 나시려고. 가뜩이나 세상을 못 돌아다녀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불살라 버리면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압니까?』

『!?』

『차라리 그것을 판에 박아서 세상에 펴느니만 못할 겁니다』

이리하여 얘기는 책으로 세상에 돌아다니게 되었고, 이것이 소설책의 시작이라는 거다.

나도 최근 한 이십년간 어디서고 진기한 얘기,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얘기를 돌이켜 생각해내고 들으면 열심히 적었다.

그러노라니 친구들의 조롱도 많이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어 모은 것이 꽤나 된다. 지금쯤은 이 놈들이 갑갑증이 나서 나에게 보복할 것을 상의할지도 모른다. 많이들 웃고 많이들 읽고, 구수텁텁한 우리나라 선인들의 멋과 웃음을 되씹어 보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마 얘기들의 영들도 좋아 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