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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어른

[강종성의 이야기보따리 2]

[그린경제=노정용 기자]  어떤 시골에서의 일이다. 삼대가 한집안에 사는데, 자작도 좀 있고 남의 논도 좀 부치고 지내건만 언제나 살림이 옹색하여 어른들 이마에 내천()자가 가실 날이 없다. 노상 찡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어느 날 밤 역시 살림 어려운 걱정들을 하고 있으려니까, 열 살 남짓한 손자 놈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우리 집엔 어른이 없어서 이 모양이여! 
듣다 못해 아비가 나무란다. 

이놈아! 할아버지가 계신데 그따위 소리를 해?
할아버진 어른자격 없어!
임마, 아비가 있는데 그러냐?   

이번엔 할아버지가 탓한다. 

아버지도 어른 자격 없어유
그럼 누가 어른 자격이 있니?
나나 할만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못할 거예요
그럼 네가 어른노릇 하렴
, 그렇게 밥알을 물고 새 새끼 부르듯 해서 어른 노릇이 되나요? 제대로 시켜야지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시키는 거냐?
도대체 어른이라는 것은 말발이 서야 하는 건데, 온 집안의 식구며 동네가 다 그렇게 알아야 할 거니까, 사당고유(가정이나 나라에서 큰일이 생겼을 때 사당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것)를 하고 제대로 절차를 밟으세유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책력을 펴고 길일을 가리어 사당을 열고 고유를 한다. 
모년 모월 아무삭 모일 간지 효현손.모관 아무개는 삼가 사대영전에 하나이다...... 

요컨대, 가도를 바로잡지 못하여 이 형편으로 지내 조상 제사마저 궐()할 지경이라 이제 별도 손자 아무개로 어른을 대행시키게 하였사오니, 조상 영혼들께서는 굽어 살피사 음으로나마 많이 도와주십사 운운이라 재배하고 물러나니, 손자가 새 옷을 갈아입고 나와 분향하고  

어린 제가, 집안어른으로서의 중책을 맡았아옴은, 이 몸의 무능함을 돌보지 않고 오직 이 집안을 중흥시켜보려는, 한갖 단성(丹誠)에서 나온 것이오니, 조상영령은 가운의 장래를 생각하여 많은 도움을 베풀어 주십사 

고유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온 가족 수십 명을 서열에 따라 늘어서게 하고, 가훈(家訓)을 선언하니 왈가위지(曰可謂之) 혁명공약이요, 약법삼장 이다. 

첫째, 조석은 때에 먹는다. 만약 그 자리에 없으면 그 사람은 그 끼니를 굶는다.
둘째, 언제고 밖에 나갔던 사람은 빈손으로 대문 문지방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셋째, 날마다 잘 때는 이 집안 흥륭(興隆)을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기여하였나를 스스로 반성하라 

이것뿐이니 모두 잘 준수해 주기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으로 식을 마쳤다. 뭐 대단한 거나 있나 했더니 기껏 요것뿐이라 싱거운 것 같았으나 막상 해 보니 수월하지 않다. 타성이란 무서운 거라, 처음 얼마동안은 식구 가운데 몇몇 사람이 가끔 끼니를 굶었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이 되니 여인네들이 식사를 차려 놓으면 온 가족이 일시에 달려들어 화닥닥 먹어 치우고 하여, 전 같으면 하루 종일 부엌에 매달려 있어야 했던 여자들이 시간이 남아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마을 갔다 돌아오다가도
하마트면 잊을 뻔 했구나.....
하고는 그 근처에서 돌맹이든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라도 집어 들고 집엘 들어선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풀락 거리고 드나들며 노는 개구쟁이들도 신바람이 나서 아무거나 마구 주워 들였다. 

그러는 중에 이왕이면 이렇게 아무거나 집어 들일 게 아니라, 소용이 될 것을 하는 식으로 차츰 그야말로 목적의식이 분명하여져 갔다. 그래서 두엄자리에는 거름이 모여 더미가 생기고,아스시라고 해도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개똥을 주워 들이고,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잔 돌맹이를 주어다 비에 패인 데를 메꾸고, 어른들은 큰 돌맹이를 주워 들여 산더미 같아지니 그 해 가을에는 울타리를 뜯고 돌각담을 쌓아, 이렇게 하여 온 집안이 씩씩하고 청신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약속한 일 년이 지났다. 가족들은 그 동안의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만장일치로 어른의 중임(重任)을 요청하였다. 꼬마 어른도 과히 사양치 않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책은 따로 없었다. 먼젓번 3개 조항을 더욱 힘써 실천하자는 그것뿐이다. 다시 또 그 해가 지나고 보니, 이젠 집안 살림이 틀이 잡혔다.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며 하는 말이,
할아버진 늙으셨구, 이제 아버지께서 어른노릇 하슈. 그 동안 보아서 많이 배우셨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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