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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죽”은 어디서 온 말일까?

최기호의 “몽골어와 우리말 사이” 1

[한국문화신문 = 최기호 명예교수] 

전 상명여대 최기호 교수는 일본에서 몽골어를 전공했고, 몽골 울란바토르대학 총장을 지냈다. 그런 인연으로 한국어와 몽골어와의 관계를 꿰뚫고 있는데, 그래서 그 두 언어 사이의 말밑(어원)에 대해 깊이 있고, 재미있는 글쓰기를 시작한다. 독자들의 큰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말)

 

타락죽의 말밑 
 

   
▲ 타락죽

옛날에는 우유가 매우 귀해서 암소의 젖을 짜서 약처럼 사용하였다. 임금이 병이 나거나 몸이 약할 때 보양식으로 타락죽을 쑤어서 수라상에 올렸다.  

《동국세시기》에 ‘궁중 내의원에서는 음력 시월 초하루부터 정월까지 임금에게 타락죽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내의원에서 보약의 하나로 타락죽의 처방을 내리고, 타락죽을 내의원에서 끓여 수라상에 올렸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타락죽은 이유식, 보양식으로 좋고 코팥(신장)과 허파(폐)를 튼튼하게 하며 대장운동을 도와주고 피부를 부드럽게 해준다고 하였다.  

이 타락(駝酪)죽은 찹쌀가루에 우유를 섞어 끓여 만든 죽으로 고려 때부터 궁중에서 주로 임금이 먹던 보양식이다. 타락은 약간 발효된 우유제품으로 몽골어로는 타락[tarak]이다. 이 타락은 몽골 유목민의 오축(五畜; 소, 말, 낙타, 양, 염소)의 젖으로 발효시킨 유제품인데 한자로 음사하여 타락(駝酪)이라고 하였다. 아것을 튀르크어突厥語)로는 토로크[torok]라고 한다.  

그러니까 타락의 어원은 몽골제국 시기에 몽골풍(蒙古風)과 함께 고려에 들어온 몽골어 타락[tarak]의 차용어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 조영석의 <소젖짜기>

 

타락죽으로 생긴 유행어 

우리나라에서 우유를 언제부터 먹었는지 정확한 역사 기록은 없지만 《삼국유사》에는‘유락(乳酪)’이나‘범의 젖’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우유를 음식으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북서쪽 초원지방에서는 주로 유목생활은 하였기에 일찍이 우유를 먹었고, 백제 사람들도 우유 짜는 법을 알았고 우유를 먹었다. 

고려 때에는 유목민인 몽골과 교류가 빈번하여서 우유를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 관청으로 유우소(乳牛所)나 목우소(牧牛所)가 있었는데, 여기서 우유 생산을 관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유우소를 타락색(駝酪色)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우유를 궁궐에 공급하였다.  

《고려사》 권99 열전에는 이순우가 근래에 의관들이 약을 만든다는 핑계로 백성들에게 우유를 짜도록 강요하여 유락을 만드는데 이 때문에 암소와 송아지가 피폐해졌습니다.’라는 상소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젖소에게서 우유를 짠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은 어미소의 젖을 모아서 궁궐에 진상했기 때문에 송아지를 굶기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영조대왕은 궁궐에서 타락죽을 금지하였고 암소 도살도 금하고 소를 고을로 돌려보내 백성들의 농사를 돕게 하였다. 

동대문에서 동숭동 대학로가 있는 동산에는 목장인 낙소(酪所)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 산을 타락산(駝酪山)이라고 불렀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타락산은 도성 안 동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의 낙산(酪山)이 바로 타락산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우유 낙(酪)자 대신에 낙타 낙(駱)자를 써서 낙산(駱山)이라고 하는 것은 유래를 모르는 무식의 소치라고 했다.  

규합총서(閨閤叢書)부인필지(婦人必知)에는 타락죽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타락죽은 물에 불린 찹쌀을 맷돌에 갈아서 심말(쌀무리)을 만들고 우유와 함께 끓이면 된다.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는 분락지간(分駱之間)이라든지 분락기(分酪妓)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분락지간은 임금과 궁녀가 타락을 나누어 먹는 정인 사이라는 말이다. 분락기도 임금이 타락죽을 먹다가 남겨서 얻어먹은 약방기생(藥房妓生)을 말한다. 약방기생은 조선후기 내늬원 소속 의녀(醫女)의 총칭이다.  

궁녀나 약방기생은 임금과 하룻밤을 보낸 은전을 입어 별입시(別入侍)가 되었다. 별입시는 원래는 별궁에서 신하가 임금을 사사로운 일로 뵙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역방기생은 별궁에 절차 없이 임금을 사사로이 뵙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이를 분락기라고 하였다.

이처럼 임금님이 타락죽을 먹다가 사랑하는 궁녀에게 남겨주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임금님이 그 궁녀를 사랑하여 성은을 베풀었다는 뜻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녀들 사이에는 나도 타락죽을 얻어 먹어보았으면’하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분락기나 약방기생의 별입시도 타락죽에서 유래한 조선시대 유행어이다. 

   
▲ 임금에게 타락죽을 얻어먹는다는 것은 성은을 입는다는 뜻이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몽골에서 들어온 우유 

오늘날 우리는 우유를 일상적으로 마시지만, 고려시대에는 귀족층에서 우유를 식재료로 귀하게 이용했다. 우유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기 쉬우나, 실은 북방 유목민족에서 우유가 삼국시대에 전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유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다.  

일본 문헌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7세기 중엽, 백제사람 선나라는 복상(福常)이 일본에 건너가 고도쿠왕(孝德王)에게 유락(乳酪)을 헌상하니 유락이 몸에 좋은 약이라며 복상에게 화약사주(和藥使主)라는 성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복상이 백제 소에서 젖을 짰으니 백제소가 일본에 유입된 것이고 우유 짜는 법을 일본에 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우유 제품을 통틀어 타락이라고 불렀다. MBC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장금이가 어린 시절에 연생이와 수라간에 들어갔다가 타락죽을 쏟는 장면이 나온다.  

포도주는 머루나 포도가 나무에서 떨어져 발효되어서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유목민이 말이나 소를 잡아먹고 그 밥통을 말려서 우유를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하였다. 이 용기 안에 있는 우유가 발효되어 시큼한 요구르트가 된 것이 유제품의 시작이라고 한다. 몽골에는 유제품이 수십 종이 넘는데 타락도 그런 유제품의 하나이다.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조선 사신들이 자금성에 도착해 황제 알현을 기다리는 동안 타락차(駝酪茶)를 큰 병으로 하나 보내 왔으나 사신들이 마시려 하지 않았는데 김창업은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타락차는 우유에 엽차를 넣고 끓인 우유차인데 지금도 몽골에서는 수테차(sutaitsai)라고 부르며 늘상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