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교는 통일신라의 귀족중심의 교종불교에서 통일신라말 중국달마대사의 학풍을 이어받은 새로운 선종 9산선문이 도래하면서 남원실상산파의 실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후 남원불교는 전국적으로 유명승려와 불자 일천여명이 몰려들면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고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사찰들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각종 석조문화재가 불사되는 등 새로운 불교문화를 주도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불교성지화가 진행된다. 이렇게 남원지역은 그 과정 속에서 남원에 많이 분포되어있는 화강석에 불상부조화 작업의 결과물인 바위부처님 즉 마애불이 많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남원시대산면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우리지역의 마애불은 대부분 통일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사회혼란시기에 조성되었다. 이는 마애불의 특성상 통일신라말과 후삼국 그리고 고려로의 재통합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의미가 부여 되어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또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실 때에 하신 손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로 남원지역 마애불의 대부분이 수인형태에서 설법인(전법
[그린경제=가람 기자]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옛 성으로 상호 중요한 요새인데 수도 없는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아막성은 1,500여년전의 산성으로서 성벽을 이루었던 석재들이 무너져 수북이 쌓여 있으며, 산 중턱에는 4~5m 높이의 돌기둥처럼 생긴 돌탑이 서있다. 금방 바람만 불어도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한 세월 넘어가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돌탑은 성 돌로 쌓은 데다 덩굴들이 탑을 감고 있어오랜 세월 버텨낸 것이다. 이 돌탑을 쌓은 것은아영이 고향인 박철수씨가 1967년 스무 살 새내기 때 아래 문성암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쌓은 것으로아침이면 일어나 새로운 대학생활과 삶의 꿈을 하나씩 돌덩이 싣고 쌓고 또 쌓았다고하니 더욱 놀라운일이다. 얼마전 TV 사극에서 삼국의 영토분쟁사를본 뒤 백제와 신라의 모산성(아막성)에 대한 얘기에 눈길이 갔다. 백제 무왕은 4만 병력으로 아막산성을 포위하니 신라왕 진평은 정예 기병을 보내 막아 싸웠다는 대목이다. 백제군은 신라군을 평지로 끌어내기 위해 패한 척 도주하여 매복했는데, 신라 장수 무은이 적의 도주를 쫒아 군사 1천
[그린경제=가람기자] 변강쇠전 이야기는 이렇게 이루어 진다. 평안도 월경촌에 옹녀라는 여자가 있었다. 열 다섯에 시집가서 남편이 죽는데, 매년 계속 개가하나 매번 죽는다. 스무 살에도 남편이 죽자, 동네 남자들이 이 여자를 자꾸 범하는 일이 벌어져, 동네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결국 동네에서 쫒겨나고, 이어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궁합을 본 뒤 혼례를 치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다 궁합이 잘 맞아 삼남지방을 유람하면서 변강쇠가 일은 아니하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다 죽을병이 들게 된다. 이들은 어느 날 한 주막에서 지리산 뱀사골의 고로쇠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뱀사골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와 고로쇠물을 마시며. 병을 치료하며 살았던 곳이 들독골이라고 전한다. 이후 병이 완쾌되자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며. 힘자랑을 했다고 하며, 그 들독이 있다 해서 들독 골이라 한다. 병이 낳은 후 백장계곡에서 살게 된다. 게으름을 타고난 강쇠, 산속에 들어와서도 피둥피둥 놀기만 하여 땔꺼리 조차 없어, 하루는 옹녀가 나무를 해 오라 했다. 낮잠만 퍼잔 강쇠는 해질녘 길가의 장승을 뽑아 와서 땐다. 이 일로 전국의 장승들이 모여 회의를 한뒤, 변강
[그린경제=가람 기자] 전북 남원시 왕정동에 한우물이라는 마을이 있다. 남원시내의 한켠 서북쪽에 우뚯 솟은 교룡산 자락의 남서쪽으로 자리한 마을로 방죽과 큰 샘이 자리한다. 지금은 방죽은 메워 농토가 자리하고 있지만 수십년전만 해도 낚시꾼들이 모여들던 방죽이었다. 옛날 한우물마을에는후처와 아들 3형제를 둔 심성고운 농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농부는 피로에 지쳐 길가에 쓰러진 한 나그네를 구하게 된다. 오랜동안 정성을 다하여 몸이 완쾌할 즈음인데,그 나그네는 어디론가 흘쩍 사라져 버렸다. 그후 세월이 흘러 두어 해가 지난 어느날 그 말없이 떠났던 나그네가 농부를 찾아왔다. 지난날 저의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인사도 못드리고 사라져 버렸던 나그네를 기억하시냐며, 그간의이야기를자초지종의 이야기한다. ▲ 한우물 전설의 고장 표지석 본인은 지관인데 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곳 마을 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엄청난 명당을 찾았단다. 그래서 긴장이 풀린탓인지 그간의 고생에 지친나머지 병을 얻어 쓰러지게 되었는데, 은인께서 날 구해주었다며, 죄송해 하였다. 병이 완쾌될 무렵 그는 명당문제로 너무 큰 고민속에 말도 없이
[그린경제=가람 기자] 5월! 계절의 상큼 함 만큼 온 누리에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봄꽃의 화려함이 한풀 가시고, 온 누리에 신록이 찾아오면서 따스한 햇살과 함께 봄의 화려함을 맘껏 뽐내는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남원시 운봉 바래봉 철쭉과 아영 봉화산 철쭉 군락지가 철쭉제 마치고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 바래봉철쭉은 현재 하단부와 중간부가 5월 12일경까지 만발할 것이 예상되고 5월 17일까지는 8부능선 그리고 25일경까지 정상능선이 만발할 것이 예상된다.아영면 봉화산 철쭉은 이번 주말에 만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환상적인 천상의 화원을 이룰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리산 바래봉, 세석평전, 황매산 철쭉 등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봉화산철쭉이 알려진 것은 오래지 않는다. 봉화산의 철쭉 군락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50ha) 자연 철쭉이 매봉주변에 집중화 되어 있으며, 꽃이 크고 색상이 선명하여 멀리서 보면 불이 타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킬 정도며, 그 풍경이 장관을 이뤄 감탄을 한다.또한 타 지역의 철쭉보다 수고가 높고(2m) 터널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어, 붉은 철쭉터널 속을 들어가 본 사람들은 그 황홀한 경험을 잊지 못해 매년 찾고 있으며, 매일 60
▲ 미스남원 진 최세이, 선 윤영경, 미 서하선, 정 이유경 [얼레빗=가람 기자] 춘향제의 꽃인 제83회 춘향선발대회에서 최세이양(20, 광주, 조선대 응용화학소재학과 재학)이 미스춘향 진의 영광을 안았다. 29일 밤 7시부터 춘향예술회관에서 열린 춘향선발대회에서 최양은 윤영경양과 막판까지 경합을 벌인 끝에 춘향제 최고의 미인으로 선정됐다. 또 선에 윤영경양(21, 서울, 동국여대 방송연예과 휴학), 미에 서하선양(20, 경기 안양, 세종대 영화예술과 재학), 정에 이유경양(23, 서울, 이화여대 교육학과 재학), 숙에 공유미양(21, 경기, 서울대 체육교육과 재학), 현에 최수미양(21, 서울, 동아방송예술대 방송연예학과 재학), 해외동포상에 전려홍양(22, 중국연변, 연변대 경제관리학과 재학)이 각각 뽑혔다. 최수미양은 우정상도 함께 받아 기쁨을 더했다. 한편, 올 춘향선발대회는 전국 각지와 중국, 미국에서 295명이 참가해 지난 13일 KBS남원방송문화센터 공개홀에서 예비심사를 거쳐 예비춘향 31명을 선발했다. 예선을 통과한 31명은 지난 19일부터 10박 11일 동안 합숙을 하며 자신의 기량을 다시 한번 수련했다. 또 춘향의 절개와 얼을 되새기고
[얼레빗=가람 기자] 남원은 남방의 근원이 되는 천년의 고도다. 특히 남원은 기록물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알려진 춘향전, 흥부전, 최척전(홍도전), 변강쇠전 그리고 만복사저포기 등의 고전은 물론, 전북권의 문집 중 남원 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70%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니 남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록문화의 보고라 하겠다. 그 중 대표적인 남원의 기록물은 용성지이다. 용성지는 다른 기록물과는 다르게 남원에 관한 종합보고서이다. 개인의 문집은 개인의 경험과 행적만 기록되었지만 용성지는 그것을 모두취합해서 균형있게 편집했다는 뜻이다. 서남대 이현식교수의 남원문화대학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용성지』 편찬과 체제는 조선 조정에서 만든 『여지승람(輿地勝覽)』, 지방에서 만든 평양의 『평양지』나 순천의 『승평지』 등의 영향을 받았다. 『여지승람』은 성종 때(1481년, 성종 12) 처음 만들어진 후에 중종 때(1530년, 중종 25) 증보되고 숙종 때 다시 증보되었는데, 숙종 때의 자료가 『용성지』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 ≪용성지≫ 표지와 속지 『용성지』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차례 편찬되고 여러 차례 보완되었다. 1699년(숙종 25)에 남원부사 이구징(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