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경기도 하남시는 고대 삼국시대 백제가 처음 도읍지로 삼았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로는 하남시 이성산성이 백제시대 쌓은 성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의견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백제의 처음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 흐르는 남쪽의 요충지인 이곳에 산성을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근처에 왕궁과 관가를 짓고 성을 쌓아 백성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근거가 옳다면 도읍의 근처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신앙의 중심처로 서기 400년 대에 지어진 절도 있었을것이나, 현재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근처에서 절터가 발굴된 적은 없다. 그런데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하남시 이성산성 아래에는 오래된 절터가 있고, 그곳에 고려시대 초기로 평가되는 석탑도 있어, 어쩌면 그 절의 시작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남시 춘궁동에는 고골 저수지 옆에 석탑이 2기가 서있는데, 하나는 5층이고 다른 하나는 3층이다. 두 석탑은 바로 옆에 세워져있지만,그 규모가 서로 달라 같은 시대에 세워진 것 같지는 않다. 탑의 규모로 보아서는 예부터 매우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보원사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었던 큰 절이었다. 보원사의 창건은 백제 후기로 생각되는데, 보원사터 근처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마애삼존불》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용현리마애삼존불》은 백제 후기에 세운 보원사의 주변 기도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원사에 대한 기록은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의 탑비에 나오는데, 보조선사 체징은 827년(흥덕왕2)에 보원사에서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율)를 받았다고 한다. 또 신라 후기 효공왕8(904) 보원사는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로 융성하였다고 최치원이 법장화상전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런 보원사는 고려초 광종26년(975)에 당대 고승인 법인국사 탄문이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종 2년(1036)에는 보원사의 계단(戒壇)에서 승과고시로 경전시험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계단(수계를 받는 제단)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으나 보원사에도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 방등계단 처럼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왕산에 보원사가 있다고 한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사세가 계속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그 이름도 생소한 봉업사(奉業寺)는 안성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폐허지만 한때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함께 고려시대 경기도 3대사찰로 꼽히는 거대한 규모의 절이었다. 절 이름 "봉업"이란 고려의 왕업을 받든다는 의미로, 조선조 서울 근처 왕릉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지었던 절들처럼 왕실과 관련된 절 이름이다. 현재 서울 근교에는 왕능과 관련된 절들로 남양주 봉선사, 강남 봉은사가 대표적인데, 봉선사는 세조의 광릉, 봉은사는 성종과 중종의 능을 관리하기 위한 절이었다. 안성의 봉업사는 고려의 첫 임금인 태조 왕건의 초상을 절에 모시고,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던 절로 고려가 창건된 뒤 고려광종때 봉업사로 새롭게 중창된 뒤 조선이 들어설 때까지 고려왕실의 보살핌을 받고 융성했던 절이었다, 그러나 절의 흥망성쇠도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랐기에 조선이 들어선 이후 고려의 흔적 지우기 영향으로 봉업사는 조선시대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안성 봉업사가 있던 곳은 안성 죽주산성 바로 아래로 넓은 평지로, 지리적으로 영남에서 서울로 오르는 길목이어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지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조선조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청계산은 경기도 과천시와 의왕시에 걸쳐있는 큰산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남쪽의 아름다운 명산이다. 청계산은 근처 관악산(해발 629m) 보다는 약간 낮은 해발 618m에 이르는 산으로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이 청계산에는 의왕시의 고찰인 청계사가 있다. 청계사의 창건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때라 하나, 크게 융성한 시기는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0년(1284) 당시 고려 중신이었던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를 중창불사에 투입하면서 부터다. 조인규는 청계사를 원찰로 삼아 100여명의 스님을 상주하게 하고, 자신의 사당을 짓고 자기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지내면서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후 조선으로 나라가 바뀐 뒤에는 이 절을 천태종에 복속시켰으며, 세조 13년(1431)에는 중창주 조인규의 6세손인 조현이 다시 한 번 중창하게 하였다. 그 뒤 연산군 9년(1503), 불교 탄압 당시 한양의 남쪽에 있던 봉은사가 맡았던 선종 본찰의 역할을 이곳 청계사에 맞겨 조선 선종의 본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에 타버려 폐사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국 절을 찾아다닐 때마다 '임진왜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지난 번 찾았던 강화도 고려산 적석사 주변에는 여러 절들이 있다. 그중에 적석사와 같은 시절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 절들을 찾던 중 오늘은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는 인도에서 온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산꼭대기에 있는 연못에 피어있던 아름다운 5색깔의 연꽃 가운데 하얀연꽃이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 인도에서 온 스님은 고려산 주변에 절을 짓기 위하여 몇날 며칠을 살폈다. 그러다가 하룻밤 꿈속에 나타난 노인이 고려산 꼭대기에 올라보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뒤 고려산엘 올랐다. 가서 보니 산꼭대기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 아름답게 피어난 화려한 연꽃5송이가 있어, 이를 하늘 높이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이 명당터라 생각하고 5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 스님이 창건한 절은 동쪽에 청련사, 남쪽에 적련사(현재 적석사), 가운데에는 황련사, 서쪽에는 백련사, 북쪽에는 흑련사로 전하고 있다. 5곳의 절 가운데 흑련사의 존재는 확인이 안되고 있지만 이곳을 뺀 4곳의 절은 지금도 같은 전설을 간직한채 그 전설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절들은 고구려시절의 유적이나 유물은 찾을 수 없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화도는 한민족의 태고적부터 역사유적이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선사이전으로 따지면 수많은 고인돌들이 있고, 마니산에는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산성과 산의 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이 있다. 그리고 이후로 많은 유적들이 있지만, 고려시대 세계를 휩쓸던 몽골과의 투쟁과정에 임시왕도가 되었던 곳이 강화도다. 그런 까닭으로 강화도에는 읍내의 중심에 강화산성이 있고, 그 가운데는 고려궁지가 있었다. 지금은 고려궁지가 얼마나 컸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쉽지만 고려궁지의 일부만이 남아서 옛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고려는 세계를 휩쓸던 몽골과 싸우기 위하여, 개경을 떠나 급한 물줄기로 나뉘어 섬이된 이곳 강화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투쟁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 힘이 무한하다는 부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자 대구 부인사에 있었던 대장경을 대신할 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는데, 그 팔만대장경의 판각지도 또한 강화도였다. 그렇게 몽골과 투쟁시절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 강화도에는 오래된 절들도 많은데, 오늘은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시대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절들 중 하나인 적석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철종 6년(1855) 12월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장수 황씨의 집안으로 조선 초 명재상인 황희의 후손이다. 그의 10대조는 황진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8대조인 황위 또한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의 가문은 유학의 선비정신에 투철하여 도리와 의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틈 철저하였으나, 시류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문의 역사속에 황현의 아버지는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시골 땅 광양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그 곳 광양에서 황현이 태어났다. 아버지 황시묵은 한 때 양반가문에서는 잘 나서지 않던 상업에 뛰어들어 가산을 불리기도 하였으나, 양반가문으로 집안 분위기 일신을 위하여 1850년 쯤 광양으로 이사하였다. 광양에 터를 잡은 황시묵은 선비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집안에 유교경전과 1천여 권의 다양한 책을 갖추어 놓고 인근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런 환경에서 황현도 유학과 선비의 길에 들어섰다. 황현의 스승은 왕석보(1816 ~ 1866)로 경학과 시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왕석보는 황현이 11살 때 지은 시를 보고 매우 놀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인의 풍수지리학에 대한 관심은 이땅에 터를 잡고 집짓고 살면서 부터로 생각된다. 한국은 사계절이 분명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렸하고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매우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름이면 더위와 함께 매우 습기가 많아 견디기 어렵고, 겨울은 메마른 혹독한 추위가 심하여 또한 견디기가 어려운 자연환경이다. 이러한 자연조건은 사람이 사계절을 살아야 하기에 그 대비책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우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그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 보다 더 예민하고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또 이런 곳에 사는 동식물도 특별하여 동물들은 민첩하고, 식물은 뿌리와 열매에 특별한 약효가 있다고 한다. 이런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탐구하였다. 추위를 잘 넘기기 위하여 집안에 불기운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온돌(구들=구운돌)을 발명하여, 불기운을 방바닥으로 보내어 방안을 따뜻하게 하고, 그 냄새, 연기와 먼지가 가득한 불기운 찌꺼기는 방바닥을 거쳐서 뒤쪽 굴뚝으로 빼내는 기술을 수천년 전부터 연구 개발하여 극도로 발전시켰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가을도 저물어가는 11월 하순이다. 이제 남쪽에만 남은 단풍잎이 조금 남아서 마지막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산천에는 어디에도 절이 없는 곳이 없지만,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잘 어울려진 절을 찾기는 그리 쉽지많도 않다. 한국의 산하에는 오래되고 유서깊고 장대한 절들이 전국 방방곡곡 많고도 많았지만 전국토를 휩쓸고간 전쟁의 상처로 대부분 절들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뜻있는 스님들이 나타나 다시 복원불사를 진행하여 그나마 오늘날 볼 만한 절들이 들어섰다. 광양의 성불사 또한 그런 역사의 상처를 이겨내고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성불사는 이름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절」이라는 뜻으로 이 절의 부처님은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미륵을 모시고 있다. 불교의 창시자는 석가모니인데 그는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세상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왕위였지만, 그는 그 예정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미륵은 석가모니의 제자였으나 세상의 인연이 짧아 석가모니 보다 먼저 타계하였는데, 그가 미래 이 세상에 올 것이라는 석가모니의 수기예언에 따라 불교에서는 미륵을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해 여수 향일암은 예부터 한국인의 관음보살 기도처로 유명하다. 향일암은 본래 백제말기 의자왕 4년(644)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하는데, 창건당시에는 원통암이라 불렸다. 원통암이란 관세음보살을 모신 암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원통암이 고려 광종9년(958)에는 윤필거사가 금오암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조선 숙종 41년(1715)에는 인묵대사가 향일암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전한다. 향일암이란 늘 해를 보고 있는 암지라는 의미다. 향일암은 한국내 관음신앙의 이름난 기도처이기에 언제나 붐비는 암자다. 향일암은 돌산갓으로 유명한 여수반도에서 떨어진 돌산도의 남쪽 끝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에는 반드시 배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돌산도가 현대적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금은 언제나 수시로 오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온통 암벽으로 둘러싸인 곳 험준한 산 꼭대기에 있기에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다시 지은 주차장에서 가파른 계단길로 15분 정도는 올라야 하며, 암자로 오르는 길부터 암자의 구석구석이 모두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기도를 위한 전각을 짓기도 매우 어려운 곳이다. 그런 험한 곳을 다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