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영천에는 영산전으로 유명한 거조사가 있다. 거조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절이라고 하나창건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경내에 자리한 영산전은 고려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연대가 오래된 한국 전통건축물로 꼽힌다. 영산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영축산을 재현한 전각이다. 그 때 영축산에는 무수한 사람들과 신들이 모여들어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며, 그 설법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깨달은 사람들 곧 아라한들이 설법을 듣는 모습을 재현하여 영산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 영산전이 있는 거조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면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법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하는 설과경덕왕(742~765)때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의 역사가 신라까지 올라가는오래된 거조사는 경상북도 내 명산인 팔공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미타불이 머물고 있다는 뜻에서 거조사(居祖寺)라고 불렀다. 이 거조사는 다른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 부처님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삼막사는 관악산의 남쪽 삼성산에 있는 오래된 절이다. 삼성산은 관악산보다 낮은 해발 480m로그 이름은3인의 성인이 장막을 치고 수도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통일신라 초기 원효, 의상, 윤필, 3인의 성인이 함께 수도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하여 삼막사라고 했다. 삼막사지에 따르면, 삼막사는 원효스님이 처음 창건하였고, 신라 말에는 도선국사가 중건하면서, 한때는 관음사라고 불렀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중수하고 다시 삼막사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에는 나옹화상도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 잠시 머물렀으며, 조선을 개국하고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국운 융성을 기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조선 초기인 1398년 왕실의 도움으로 여러 전각들도 중건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억불의 시대로 접어들어중창불사는 크게 이루지 못하고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1880년 고종17년에 현재의 명부전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을 중건하였다.조선조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동서남북 방위별 명찰 중에 속해 남쪽을 대표하는 절이기도 하였다. 조선조 서울을 중심으로 4대명찰은 동쪽에는 불암사, 남쪽에는 삼막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창녕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역사유적으로는 삼국시대 이전 가야시대부터 유적들이 남아있다. 험한 바위산인 화왕산의 산마루 근처에는 넓은 부분에 산성을 쌓았는데성의 둘레길이가 2.6km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이 화왕산의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관룡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관룡사는 창건연대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창건된 절로 역사도 깊다. 신라의 불교공인은 법흥왕14년(527)으로 관룡사의 창건은 신라 진평왕 5년(583) 증법국사가 처음 개창했다고 전하며, 관룡사의 창건은 신라의 절 들 가운데서는 매우 빠른 시기이다.이후 관룡사는 신라에서 8대 사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관룡사는 600년 대 원효대사가 있을 때는 제자 1천명을 모으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룡사라는 절의 이름은 창건주 증법국사가 절을 지을 때 화왕산 위에 있는 3개의 연못에 살던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후의 많은역사는 기록된 것이 전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축물과 그 안에 있던 기록들이 불에 타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과 관련한 그림을 불화라고 하는데 불화 중에 가장 큰 불화는 괘불이다. 괘불은 대웅전처럼 부처님을 모신것이 아니라, 대웅전 밖에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의식의 주인공으로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그린 불화이다. 이런 불화는 주로 부처님 오신날 또는 영산재 수륙재 등 많은 신도들이 모일 때, 절에 온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안으로 다들어가기 어려운 날 대웅전 밖에 괘불대에걸고 법회를 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그런 괘불은 너무 커서행사가 끝나면 족자처럼 둥글게 몰아서, 보관함에 넣어서불전의 뒷편에 주로 보관하고 있다. 이런 괘불은 행사에 많은 신도들이 모이는 큰 절에 주로 있는 것으로, 괘불이 있는 절은 그것 만으로도 절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괘불의 원류는 유목민인 몽골인들이 창안한 불화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목초지를 찾아 말을 타고 늘 이동하는 생활을 하기때문에 이동하면서도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말에 실을 수 있는 크기의 이동에 편리한 두루말이식으로 부처님 그림을 그려서 가지고 다니면서 예불을 했던데 유래한다. 이런 불화가한국에는 고려 후기 몽골시기에전해져 괘불이 생겨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오백나한이란 오백명의 '나한'이란 뜻인데, '나한'이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가운데사람으로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말로, 본래는 '아라한'이었다. 그런데, '아'자를 빼고 부르기 쉽게 '나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이 깨달음을 위하여 수도정진하면 그 깨침의 정도에 따라, 4단계를 거쳐야 아라한이 된다고 하는데, 그 첫째단계는 '수다원' 단계이고, 둘째단계는 '사다함'인데 사다함과에 이른 사람은 한번은 윤회해야 하는 단계이며, 셋째단계는' 아나함'이고, 마지막 단계에 이른 수도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아라한'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단계로 불가에서는 중생계에서는 부처님과 같은 단계로 여기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많은 수도자들이 부처님처럼 '아라한'과의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부처님은 수많은 아라한과에 든 제자들을 거느리고 주요 경전을 설하고 또수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처럼 해탈의 경지에 들었기에 그 능력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불자들에게는 자신의 작은 소원정도는 이루어줄 수 있는 능력있는 의탁자로 아라한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생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 곁에는 살아서 바보라는 말 듣기를 좋아했던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정치인으로 쉽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자기 옆에 무수히 많았지만 그 길을 마다하고 굳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가 그 길을 택하여 갔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길은 비록 어렵지만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노무현을 우리는 바보라고 불렀다. 그런 바보 노무현은 그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국민들이 있어서 천신만고 끝에 바보들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 나라를 바보들의 세상이 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바보를 손가락질하며 비아냥댔고, 그를 따르던 많은 국민들은 그를 보호하거나 변호해주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는 어렵사리 대통령직을 마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피폐한 고향농촌을 되살리는 일에만 매진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정치에서는 그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끊임없는 뒷조사와 먼지떨이, 그리고 누명이 씌워지자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종로구 북한산 사모바위 아래남쪽 기슭에 자리한 승가사는 조선시대 한양주변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절로 서울 북쪽에 있다. 본래 창건은 통일신라 경덕왕 15년(756) 당시 당나라의 생불로 추앙받고 있던 천복사의 승가(僧伽)대사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고 한다. 승가사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의 거의 정상부분인 8부능선에 자리하고 있어, 걸어서 올라가자면 구기동 이북오도청 근처에서 약 1시간 30분은 걸어가야 하기에꽤 힘든 길이나, 지금은 절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매 시간 운행하고 있어, 다리가 편치 않은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런 승가사는 신라이래 고려를 거치면서는 대각국사 의천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할 정도로 유서깊은 절이었다. 그러나조선조에 이르러 전국의 사찰을 통폐합하면서 선교 양종으로 나누었을 때 승가사는 선종으로 구분하여 그 명을 이어왔다. 조선 말기에는 고종의 왕비인 민비가 왕자 낳기를기원하면서 전국의 기도처에 불공을 드릴 때, 이곳 승가사 마애부처님에게시주를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찰의 전각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 남아있는 한국의 전통마을 가운데 주민들의 집을 초가로 이은 마을은 제주 성읍민속마을과 순천 낙안읍성마을이 있다. 다른 전통마을들은 초가집보다는 기와집이 많은 편이나 순천에는 대부분 서민들이 살았던 까닭서인지 민가는 모두 초가로만 이루어져 있다. 제주는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 초가가 아닌 억새로 이은 초가였다. 농촌에서 초가는 벼농사를 짓고 남은 볏집을 엮어서 지붕을 이었다. 옛날 서민들은 감히 기와를 구워서 지붕에 올릴 수 없었기에볏집이 지붕을 잇는 최고의 재료였다. 여름내 피땀흘려 농사를 짓고, 벼를 수확하는 가을걷이를 다 마친 뒤 주민들은 자기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볏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남자들은 볏집을 뽑아서 새끼를 꼬고 또 초가 이엉을 이었다. 이런 일들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작업으로 했다. 노동의 고단함 속에서도 노래와 덕담을 나누며 작업을 했으며다 이은 이엉으로마을 주민들은 이집 저집을 돌아가면서 지붕을 씌었다. 지붕에 이엉을 얹는 일은 고난도의 노동이다. 자칫 잘못하다 떨어지면 크게 다치는 사고도 많아서 농사의 끝인 지붕 개량은 큰 일가운데 하나였다. 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순천 선암사로 들어가는 조계산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옛날에 쌓은 무지개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는 반원형으로 마치 성문의 앞처럼 보이지만, 돌로된 반원형의 다리를 계곡의 사이에 놓은 것은 절로 들어가는 계곡이 이세상과 천상 사이를 갈라놓은 것으로 공간의 비유적 표현이다. 불교에서 절은 부처님을 모신곳으로, 부처님이 있는 곳은 불국토로영원한 즐거음이 있는 곳이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중생계로 온갖 고통과 생사 윤회가 끝없이 계속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절을 찾는다는 것은, 불상이 있는 산속의 전각을구경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파속에서 시달리는이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의 부처님 세계로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경전상설명의 의미에서중생계와 불국토는 너무도 멀고도 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불교의 이상세계인 부처님이 모셔진 불국토로 나아가는 길에는 상징적으로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다리가 있으니, 그 다리가 바로 이세상에서하늘로 걸쳐놓인 무지개다리다. 그런 의미로 옛부터 절로 가는 계곳에는 많은 다리들이 놓였고, 그 다리는 무지개형상으로 놓았다. 비록 그리 크지도 않은 계곡사이에 놓인 다리이지만, 이 다리는 이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운람산 수도암은 완도의 옆에 있는 고흥반도의 끝자락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운람산의 옛이름은 모악산이었다고 하여, 지금도모악산 수도암이라고도 한다. 작은 절 수도암은 그 창건연대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하며, 그 창건주는 신라 흥덕왕때영헌스님 또는 고려 순종 때인 1083년 도회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연원은 멀고 멀지만, 옛 자취는 별로 없어서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수도암은 조선 후기 미륵신앙의 도량이며 기도하는 절로,절안에 전각들은 작지만, 그 안에는 대웅전, 지장전, 무루전, 삼성각 등이 있어 갖추어야할 전각은 모두 갖추었으며, 그 가운데무루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이나 그 이름은생소하다. 봄이 깨어나는 운람산 수도암은 작지만 매우 아늑한 절로, 절의 입구에 새로지은 재래식 해우소는 자연생태순환의 고리를 잇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있어보여 불교의 순환과 윤회를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