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금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는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유비, 관우, 장비 등 3인이 의형제를 맺고, 제갈양의 초려를 찾아가는데, 무인(武人) 장수들의 위엄을 그려내기 위해 웅장한 우조(羽調)로 부른다고 이야기하였다. 예부터 사대부들이 <적벽가>를 즐겨온 배경은 호령하듯 높고 크게 질러내는 소리가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점, 찾아온 손님들을 세워놓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초려의 젊은 주인, 제갈량(諸葛亮)에게 장비는 불만이 많았다는 점. 제갈량은 형주에서 문인(文人)들과 교류하며 20대 중반부터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자(字)를 따라 와룡선생으로 불렸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이어서 후에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였고, 유비가 병사함에 그의 장남을 보좌할 고명대신이 되었다는 점,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을 따르고 있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는 점도 함께 이야기하였다. <적벽가> 이야기 가운데, 이번 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화용도 좁은 길에서 만난 조조와 관우의 “살려 달라.”와 “칼 받으라.”의 싸움이 처절하게 펼쳐졌다는 이야기, 조조와 그의 모든 장졸들이 모두 다 꿇어 엎어져, 앙천(仰天) 통곡을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관공의 어진 마음, 조조를 쾌히 놓아주고, 돌아와 공명께 법대로 처벌하기를 요청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공명이 내려와 관우의 손을 잡고 회답하기를 “조조는 죽일 사람이 아닌 고로 장군을 보냈으니 그 일을 뉘 알리요.”라고 답을 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판소리 <적벽가>의 주요 대목은 이제까지 소개한 바와 같이 조조와 관우가 만나게 된 화용도 대목을 비롯하여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군사 설움타령’, 적벽강 싸움‘ 등으로 구분이 되는데, 유파에 따라서는 조금씩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은 글자 그대로 풀밭 속의 오두막집을 세 번째 돌아본다는 뜻으로 숨어 사는 현명한 사람을 임금이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 만난다는 말이다. 임금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만들 위인을 얻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는 말이다. 이 대목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근간으로 왕실의 품위와 선비의 격조가 미술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문기(文氣)가 흐르는 품위와 격조는 조선백자의 미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17~18세기 영ㆍ정조 연간에 제작된 조선백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왜란(1592~1598)과 호란(1636~1637)의 피해를 극복하여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회복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조선 제2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조선의 관요에서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백자 큰 항아리가 바로 ‘백자달항아리’입니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18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이 백자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게 생겼다 해서, 1950년대에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달항아리를 조선백자의 알맹이로 꼽는 이유는 절제와 담박함으로 빚어낸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에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달항아리만의 특징입니다. 조선의 이상과 세계관을 담은 백자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습니다. ‘예’란 유교 문화 전통에서 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의 열한째로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든 ‘소서(小暑)’입니다. 하지 무렵까지 모내기를 끝낸 벼는 소서 때쯤이면 김매기가 한창이지요. 요즈음은 농약을 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예전처럼 논의 피를 뽑는 일인 피사리나 김매기 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허리가 휘고 땀범벅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는 때입니다.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에서 논바닥을 헤매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늘이지만 여간 고마운 게 아닙니다. 거기에 실바람 한 오라기만 지나가도 볼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지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소서 날 남을 위한 솔개그늘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때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철이므로 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집니다. 특히 시절 음식으로 즐기는 밀가루 음식은 이때 가장 맛나서 열무국수나 수제비를 즐겨 해 먹습니다. 채소류로는 호박이며, 생선류로는 민어가 제철인데 민어포는 좋은 반찬이 됩니다. 또 민어는 회를 떠서 먹기도 하고, 매운탕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화용도 좁은 길에서 만난 조조와 관우의 이야기를 하였다. 조조가 안전하다는 화용도 좁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매복해 있던 관우에게 잡히게 되었다. 조조와 수하 장수들의 생사가 관우 장군에게 달려있으니 별반통촉해 달라고 애원하는 대목이 눈물겹기만 하다. 조조는 옛날 유공지사와 자택유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살려 달라고 간청한다. 판소리에서 확인되는 이야기의 전개는 너무도 사실적이다. 사설의 처리를 아니리와 발림(동작이나 연기)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펼치고 있어서 훨씬 이해가 빠르고 재미있다. 같은 사설의 동일한 내용을 노래한다고 해도 경기좌창으로 감상하는 적벽가와는 대조적이다. 위에서 유공지사와 자택유자 두 사람을 생각해서 제발 덕분에 살려 달라는 대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중국 춘추 전국시대 정(鄭)나라의 자택유자가 위나라를 쳐들어갔는데, 위나라의 유공지사에게 쫓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활을 잘 쏘았는데, 유공지사는 자택유자에게 직접 활 쏘는 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활쏘기를 지도해 준 간접적인 선생이 된다고 해서 그를 예우하여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에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 생활과 생업 활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설명카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가운데 많은 유물이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1974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발견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견해를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자료가 수습되었고 이후 발굴에서도 새로운 자료들이 연이어 확인되는 등 역사ㆍ학술적 값어치를 인정받아, 1976년 사적(면적 546,908㎡)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 발굴과 연구 성과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1호 돌널무덤의 발견 1974년 4월 국립박물관은 부여 초촌면 현지 주민의 제보를 받고 유적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나갑니다. 조사팀은 판석 위에 큰 돌이 얹어져 있었다는 주민의 상세한 설명에 이미 도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표를 제거하고 덮개돌을 들어 올린 뒤 흙을 제거하다 보니, 예상과는 달리 동쪽 벽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경기좌창으로 부르는 <적벽가>의 내용 중, 적벽 전투에서 크게 패한 조조와 그의 군사들이 화용도(華容道) 좁은 길에서 관우(關羽)에게 잡혀 목숨을 구걸하는데, 관우는 조조 일행의 길을 열어주고 말머리를 돌렸다고 이야기하였다. 적군을 생포했으나 돌려보냈다고 하면, 과연 누가 이긴 것인가? 개선장군의 늠름한 자세로 돌아와 환영받아야 할 관우의 측면에서 볼 때, 조조를 놓아주고 빈손으로 돌아온 그를 대하는 시선이 궁굼하기만 하다. 그의 승리인가? 아니면 그 난관을 어떻게든 뚫고 되살아 간 조조의 승리인가? <적벽가>가 던져주는 대의(大義)란 참으로 크고 멋지다. 경기좌창으로의 <적벽가> 내용은 이미 소개하였거니와 같은 대목을 정권진 명창의 판소리로, 관우와 조조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기좌창과는 달리, 판소리에서는 시작 부분부터 벌써 연극을 감상하듯, 관우와 조조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리>로 진행되고 있다, 아니리란 창(唱)이 아니라, 말로 하는 곧 대사 부분이다. 조조의 부하들이 “전후좌우가 복병이고, 진퇴유곡입니다. 전일 승상(조조)께서는 관공에게 깊은 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로 부르는 <적벽가>와 경기 좌창의 <적벽가>는 사설 내용이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을 빼고는 창법이나 선율 진행, 표현방법, 등이 양자가 전혀 다른 노래라는 점, 좌창을 <잡가(雜歌)>라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조조와 그의 군사들이 화용도 좁은 길에서 관우(關羽)에게 잡혀 목숨을 구걸하는 대목을 소개한다. 서울, 경기의 좌창 가운데 한 곡인 적벽가에는 적벽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조조의 군사가 화용도 좁은 길로 들어서자, 그곳에 매복해 있던 관우(關羽, 관운장, 관왕)에게 잡혀 목숨을 구걸하는 대목이 나온다. 관우가 조조에게 목을 늘여 칼을 받으라고 명하는 대목이 예사롭지 않다. 이 대목의 경기좌창 사설은 아래와 같다. “이놈, 조조야,! 너 잡으러 여기 올 제, 군령장 두고 왔다. 네 죄상을 모르느냐? 천정(天情) 거역하고 백성을 살해하니, 만민(萬民) 도탄(塗炭)을 생각지 않고, 너를 어이 용서하리. 간사한 말을 말고, 짧은 목, 길게 늘여 청룡도(靑龍刀) 받으라, 하시는 소래, 일촌간장(一寸肝腸)이 다 녹는다.” 위에서 군령장(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정선아라리가 불리고 있는 지역을 아라리권역, 또는 메나리권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 ‘메나리’라는 말은 ‘뫼놀이’, ‘뫼노리’의 변화형으로 산에서의 놀이, 곧 유산(遊山)의 의미라는 이야기, 서울 경기는 경 토리 권역, 수심가 토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그리고 전라도 지방은 육자배기 토리 등이 특징있게 불린다는 이야기, 김옥심 경기명창은 메나리권의 ‘정선아리랑’을 경토리로 불러 널리 확산시켰는데, 지금도 이 노래는 ‘경기제 정선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판소리의 ‘적벽가’ 또는 경기 12좌창의 ‘적벽가’라는 노래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이 독자로부터 있어 이에 대해 견줘보기로 한다. 원래, ‘적벽가’는 판소리 5마당, 곧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가운데 하나로 그 내용은 중국 위ㆍ한(漢)ㆍ오 등 삼국의 조조, 유비, 손권 등이 서로 싸우는 중국소설 《삼국지연의》 속에서 적벽강에서의 싸움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그런데 판소리 말고도 서울 경기의 좌창 12곡 속에도 ‘적벽가’라는 노래가 들어있어서 이들은 같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정선아리랑>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소리이다. 197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 고장 사람들은 ‘아라리’, 또는 ‘아라리 타령’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비 기능요이지만, 모심기하거나, 논밭에서 일할 때, 노동요로도 부르고 있다. 이 노래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폭넓게 불리고 있어서 이 지역을 아라리권역, 또는 메나리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본디 ‘메나리’라는 말은 ‘뫼놀이’, 또는 ‘뫼노리’의 변화형이다. ‘뫼놀이’는 ‘산에서 놀이하는’ 곧 유산(遊山)의 뜻이므로 산간 지역의 소리조라는 뜻이 강하다. 서울의 12좌창 가운데 첫 번째 곡이 바로 ‘유산가’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메나리권이라 함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으로부터 그 아래의 충청 일부 지역을 포함, 경상도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뜻하는 음악적 사투리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산악지대는 교통의 발달이나 문화의 지체 현상이 심각하였으며 지역의 언어가 서로 소통치 못함에 따라 전통적인 민속의 노래도 각 지역, 또는 지방마다 서로 다른 특징적인 어법(語法)을 지닌 채, 전해 왔다. 우리나라의 민요 권역은 강원지역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