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김산은 3.1. 운동 후 공부하러 잠시 일본에 갔다가 소련으로 갈 생각을 합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김산은 작은 형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전하라며 준 200원을 갖고 국경을 몰래 넘지요. 김산의 계획은 안동(지금의 단동)으로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시베리아 간섭군이(백군과 이를 지원하는 외국 세력으로 추정) 초래한 전란 상태로 기차가 다니지 않았습니다. 김산은 방향을 바꿔, 우당 이회영 선생이 세운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로 향하는데, 신흥무관학교로 가기 위하여 홀로 700리를 걸어가지요. 그것도 15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한 달 이상을 걸어서 여행합니다. 여행 중 김산은 중국인 여인숙에 숙박할 때 어린 조선놈이 혼자 다니다가 돈을 뺏길까봐, 매일 밤 밖에 나가 몰래 땅에 돈을 파묻었다가, 새벽에 돈을 파내가지고 아침도 먹지 않고 여인숙을 떠났답니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홀로 타국의 700리를 걸어간다? 저요? 으~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김산은 가는 도중 어느 마을에 들렀는데, '아리랑'에 중국 정부군의 형편없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주 김남윤 클래식 투어 수업은 오케스트라 펼쳐보기로 오케스트라의 얼굴인 현악기, 그 중에서도 첼로와 더블베이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연주자들이 나와서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연주하는 시간도 있었지요. 연주곡 중에는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 Saens)의 동물의 사육제도 있었는데, 첼로는 사육제에 나오는 동물 중 백조를, 더블베이스는 코끼리를 연주합니다. 첼리스트 이지영씨의 연주를 들으니 첼로 연주가 백조의 우아함을 더하는 것 같고, 또한 신윤경씨가 연주하는 더블베이스는 뒤뚱뒤뚱 대는 코끼리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듯합니다. 더블베이스는 워낙 저음 악기라 독주 연주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 더블베이스 독주 연주도 들어보았습니다. 연주곡 중에서 수강생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 것은 이지영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쟈클린의 눈물입니다. 원래 첼로의 음색이 처연한 맛이 있지만, 쟈클린의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쥐어짜는 애절함이 더합니다. 이는 쟈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 쟈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1945~1987)에게 헌정된 음악이라 더욱
▲ 《아리랑》, 김산ㆍ님웨일즈, 동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아리랑을 읽었습니다. 책 표지의 《아리랑》 제목 밑에는 폭풍의 시대, 역사가 명하는 바에 따라 불화살 같이 살아간 한 조선인 독립혁명가 김산의 고뇌, 좌절, 사랑, 열정, 사상의 피어린 발자취!!라고 쓰여 있네요. 이 책은 1937년 죽음을 각오하고 장개석 국민당 군대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중국 연안의 중국 공산당을 찾아간 푸른 눈의 여인 님 웨일즈(본명 : 헬렌 포스터 스노우)가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에 대해 쓴 전기입니다. 님 웨일즈는 그곳에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새로 결성한 조선 민족해방동맹을 승인받기 위하여 대표로 파견된 김산을 만나, 김산의 파란만장한 삶을 듣고 글로 풀어냈습니다. 당연히 1941년에 먼저 영문으로 책이 나왔고, 나중에 우리말로 번역된 것입니다. 김산! 자기의 꿈과 이상을 바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바친 공산당에 의해 오히려 일본 스파이, 트로츠키 주의자로 몰려 1938년 억울하게 총살당한 순결한 김산! 책에는 민족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자를 거쳐 공산주의자로 변하는 김산의 삶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광동코뮌에 참여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응칠 역사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혹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씀드린다면,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에 쓴 자신의 자서전입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라면서 안응칠 역사는 또 뭐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응칠은 안 의사의 자(字)입니다. 안 의사의 배와 가슴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응칠 역사는 안응칠(중근) 개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직접 썼으니까 자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안 의사는 이 자서전을 1909. 12. 13. 쓰기 시작하여 사형집행 11일 전인 1910. 3. 15. 집필을 마쳤습니다. 안 의사는 자서전 집필을 끝낼 무렵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일제가 사형을 빨리 집행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서론만 쓰고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지요. 안응칠 역사 끝부분에 가면 안 의사가 평석(平石)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사형집행일을 예정보다 한 달 남짓 늦추어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평석 고등법원장은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비행기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 5시 30분에 광조우 공항에 내렸다. 광조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지만 서울 가는 비행기는 17시 05분에나 있기에 그 막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우리는 광조우 시내 관광을 나선다. 첫 번째 목적지인 월수공원(越秀公園)으로 향하는데, 가는 동안 전기 자동차가 지붕 위의 전선에 접선하여 운행하는 것이 눈에 띈다. 월수공원(越秀公园) - 얼마나 뛰어나고 빼어난 공원이기에 공원 이름도 월수공원인가?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태극 기공운동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야 중국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또 한쪽에서는 중년과 노년의 남녀들이 사교춤을 춘다. 글쎄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사교춤을 추는 모습은 나에게는 낯설다. 이런 것도 문화 충격이라 할 만 하겠지. ▲ 공원에서 태극 기공운동을 하고 있는 중국인들 ▲ 공원에서 사교춤을 추고 있는 중국 중,노년의 남녀들 조금 위로 올라가니 5마리의 양을 조각해놓았다. 오색 예복을 입은 5명의 선인들이 양을 타고 하늘에서 광조우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벼이삭을 나눠주고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일 큰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16세기 함경도 홍원 기생 홍랑이 사랑하는 연인 고죽 최경창을 떠나보낸 후 애절한 마음을 담아 쓴 시입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처음 이 시를 배운 뒤 홍랑의 고죽에 대한 애절한 사랑에 감동을 받았었지요. 그러다가 고죽의 자손들이 홍랑의 무덤을 고죽의 옆에 같이 모셔두고, 지금까지 예를 갖춰 돌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전에 두 연인의 무덤에 다녀왔습니다. ▲ 홍랑 무덤 앞에 세워진 홍랑시비 참! 무덤에 다녀온 얘기를 하기 전에 두 연인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이들의 사랑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홍랑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홍원 기생이 됩니다. 홍랑이란 이름도 요즘처럼 말하면 미스 홍이라 할 것이니, 사실 홍랑의 이름은 모르는 것이지요. 그리고 최경창(1539~1583)은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써,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으며, 정철, 송익필, 백광홍, 김득신 등과 함께 조선 8대 문장가의 한 명으로 꼽힐 만큼 문재(文才)를 날렸습니다. 그런데 최경창의 호 고죽(孤竹)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네팔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사실 어제 작가들 작품 발표를 하면서 이번 여행의 큰 줄기는 끝난 것이다. 오늘은 가벼운 마음으로 카트만두 시내 관광을 하고 한국에서 온 일행들은 밤 비행기로 떠나고, 외국 작가들은 각자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다들 며칠 정도만 더 머무르다 네팔을 뜬다는데, 요코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간다고 한다. 중국 쪽에서야 차타고 휑하니 갔다 왔지만, 여기서는 15일간이 소요되는 트레킹 일정이다. 하여튼 요코 대단하다! 저 조그만 체구에 카메라 짐이 많아 배낭도 앞뒤로 메고 다니던데 또 15일간의 고난의 행군을 하려 하다니... 짐을 다 싸서 호텔 로비에 맡겨놓은 후 우리는 시내로 들어간다. 그런데 헨릭은 그대로 호텔에 남는다. 몸살이 났단다. 세미나까지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린 것일까? 하긴 5,200m의 그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현지인들과 그렇게 미니 축구를 하였으니, 아무리 강인한 헨릭이라도 긴장이 풀리면서 몸살이 날만 하지. 사실 오늘 가고자 하는 곳은 나로서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이고, 따라서 여행기로 기록을 남긴 곳이다. 그래도 간단하게라도 훑으며 지나가자. ▲ 스와얌부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오늘은 네팔 국립박물관의 세미나실을 빌려 작가들이 지금까지의 여정 동안 구상하고 다듬고 완성시킨 작품들을 발표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날이다. 그 동안 아침이면 일어나 준비하기에 바빴지만 오늘은 오전을 느긋하게 호텔에서 보내며 각자 발표 준비의 마무리를 한 다음 점심을 먹고 박물관으로 향한다. ▲ 네팔 국립박물관 ▲ 겨우 군인들 검사를 받고 박물관 마당으로 들어왔다. 네팔 여학생들이 박물관 들어가고 있다 박물관 앞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사전 통지가 잘 안 되었는지 한 군인이 나타나 제지한다. 박물관 직원이 나와 설명을 함에도 군인은 우리의 소지품을 다 검사하고서야 들여보낸다. 그 동안 공산반군과의 오랫동안의 싸움이 이런 경직된 문화를 낳았구나. 국립박물관이라지만 우리나라 지방 박물관보다 못한 너무 초라한 박물관인데 그나마도 일본의 도움으로 지어진 박물관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 모서리에서 처마를 받치고 서 있는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지 거시기를 우뚝 세워 자기 아랫배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하! 고놈, 정말 우람하게 생겼네. ▲ 박물관 처마 밑의 조각이 우람한 거시기를 자랑하고 있다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아침에 일어나니 약하게 비가 흩뿌린다. 여기서 국경까지는 다시 얼마정도 꼬불꼬불 길을 내려가야 한다. 길을 돌다보니 떠나온 장무가 눈 위로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장무가 티벳에서 내려오는 산비탈의 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겠다. ▲ 장무에서 국경으로 내려가는 사진 - 머리 위로 산허리에 걸린 도시 장무가 보인다 ▲ 국경에 도착하니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 유럽인이 보인다 - 이들은 티벳을 자전거로 여행하고, 네팔로 넘어가려고 국경에 왔다 국경에 도착하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국경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 위에서부터 급하게 내려오던 급류가 네팔과 티베트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문이 열리면 우리는 다리를 건너 네팔 코다리로 건너가게 된다.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유럽 사람들이 많고, 그 중에는 자전거를 잡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뜻밖에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유럽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먼 유럽에서 이런 오지까지 자전거를 타러 오다니... 유럽인들의 모험심과 탐구심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이윽고 국경의 문은 열리고, 중국 국경관리들의 융통성 없고 불친절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아침이 밝아오고, 우리는 다시 행장을 꾸려 이제 이 세계의 지붕에서 내려가려 한다. 이 고원이 저 밑 세상과 연결되는 길고 깊기 만한 협곡을 통하여 네팔과의 국경도시 장무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방작가는 아직도 얼굴이 간 상태이지만 낮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다시 버스 여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티베트는 우리를 순순히 낮은 세상으로 내려 보내지는 않는다. ▲ 팅그리에서 장무로 향하는 국도 - 아직은 티벳 고원을 지나고 있다 장무로 가기 위해서 다시 한 번 5,000m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산증세가 두렵더라도 티벳인들이 수많은 룽다와 타르초를 바람에 휘날리며 신께 염원하는 5,000m 고개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고개에서 내려 잠시 걸으니 또다시 머리가 띵해 온다. 가자! 가자!! 빨리 이 천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밖에는 없구나. 드디어 버스가 고원 평원을 지나 협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황량한 고원의 세계만 보이던 내 눈앞에 키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나무들이 일어나서 내려오는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는 나무들은 온대의 숲에서 아열대의 숲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