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지만 원래 역법(曆法)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과 맞춘 것이기에 우리나라는 반드시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옛 사람들은 대설부터 동지까지의 기간을 삼후(三候)로 나누어서, 초후(初候)에는 산박쥐가 울지 않고, 중후(中候)에는 범이 교미하여 새끼 치며, 말후(末候)에는 여주(박과에 속하는 식물)가 돋아난다고 하였지요.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동짓달이라(時維仲冬爲暢月) 대설과 동지 두 절기 함께 있네(大雪冬至是二節)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六候虎交角解)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不鳴蚓結)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乃挺出水泉動)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身是雖閒口是累) 위 시는 열두 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각각 7언 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19세기 중엽 소당(嘯堂)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의 일부입니다. 여기서는 이 무렵 호랑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11월 1일 ‘떡 만들기’를 새롭게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지정 대상은 떡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전통적 생활관습까지를 아우른 것입니다. 떡은 곡식가루를 시루에 안쳐 찌거나, 쪄서 치거나, 물에 삶거나, 혹은 기름에 지져서 굽거나, 빚어서 찌는 음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일생의례(백일ㆍ돌ㆍ혼례ㆍ상장례ㆍ제례)를 비롯하여 주요 절기 및 명절(설날ㆍ정월대보름ㆍ단오ㆍ한가위ㆍ동지)에 다양한 떡을 만들고 나누어 먹었지요. 또한, 떡은 한 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신앙 의례, 상달고사 등 가정신앙 의례, 별신굿과 진오귀굿 등 각종 굿 의례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제물(祭物)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개업떡ㆍ이사떡 등을 만들어서 이웃 간에 나누는 문화가 지속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청동기ㆍ철기 시대 유적에서 시루가 발견된 점,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의 부엌에 시루가 그려진 점을 미루어 고대에도 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추정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떡을 뜻하는 글자인 ‘병(餠)’이 나오고,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 각종 문헌에서 떡을 만들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11월 22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물 째 절기로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입니다. 눈이 내려 추위가 시작되는 때여서 겨울 채비를 합니다. 그러나 한겨울이 아니어서 아직 따뜻한 햇볕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하지요. 이때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추워지므로 사람들은 김장하기 위해 서두릅니다. 또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하는데 무를 구덩이에 묻고,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하고, 겨우내 소가 먹을 볏짚을 모아두기도 하지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설은 ‘손돌이 죽은 날’이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임금이 배를 타고 통진과 강화 사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고 임금은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들어 그런 것이라고 사공의 목을 베었습니다. 사공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사공의 이름이 손돌이었지요. 그래서 해마다 그날이면 큰바람이 불고 날씨가 찬 데, 이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이라고 하여 강화에서는 이날 뱃길을 나가지 않습니다. 이때의 추위를 손돌추위, 그 바람을 손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람들이 윗사람에게 펜으로 편지를 쓰던, 누리편지(이메일)를 쓰던 글 끝에 ‘올림’이라 쓸까 ‘드림’이라 쓸까 망설이게 됩니다. 여기서 ‘올림’은 ‘위로 올리다’ 하는 뜻이고, ‘드림’은 ‘주다’의 높임말인 ‘드리다’로 보이지만 본디 ‘안으로 들이다’ 하는 뜻입니다. 받는 사람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위로 올리다’ 하는 것이고, 내가 주는 것이 보잘것없다는 뜻으로 슬쩍 대문 ‘안으로 들이다’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올리다’는 받는 사람을 높이려는 뜻을 담고, ‘들이다’는 주는 스스로를 낮추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올리다’나 ‘들이다’가 모두 물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품이 아니라 말씀을 보내는 편지라면 ‘올림’이나 ‘드림’은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는 또 다른 우리말에 ‘사뢰다’와 ‘아뢰다’가 있는데 이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사뢰는 것은 속살과 속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아뢰는 것은 모르고 있는 일을 알려 드리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특히 예전처럼 붓이나 펜으로 글씨를 써서 봉투에 넣어서 보낸다면 봉투가 물품이니 봉투 겉에는 ‘올림’과 ‘드림’ 가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9월 말부터 종편 텔레비전 JTBC에서는 국악과 대중음악의 넘나들기(크로스오버)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국악이 가진 멋과 매력을 선사하는 우리나라 첫 국악 경연 프로그램 <풍류대장>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 병마와 싸우느라 이 프로그램을 보지 못하다가 최근 다시보기를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 국악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혼이 담긴 무대 몸짓과 소리를 통해 감동을 받았고, 눈물이 날 뻔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무대는 민요, 판소리 등의 소리꾼들이 새롭게 편곡한 국악과 대중가요를 가야금ㆍ대금ㆍ해금 등 국악기는 물론 기타, 신시사이저, 마린바 등 서양악기에 맞추어 멋진 노래를 불렀음은 물론 흔히 만날 수 없는 남성 가야금병창까지 들을 수 있어 정말 국악에 대해 일반인들이 새롭게 눈 뜰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악을 좀 안다는 사람도 잘 모른다는 ‘정가’ 소리꾼들이 등장하여 ‘정가’의 매력을 한껏 뽐내줬음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려운 음악이라는 ‘정가’에 대해 성시경 심사위원은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것은 물론, 대중음악과 가장 빨리 위화감 없이 화합할 수 있는
오늘부터 서서히 기지개를 키려 합니다. 아직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재활훈련을 하지 않는 일요일 하루만 우리문화편지를 써서 매주 월요일 독자 여러분께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모자란 것이어도 여러분께 다가서려는 제 마음이니 너그럽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큰 것은 지름이 1자(30.3cm)쯤 된다. 타원형이며, 머리는 작고 둥글다. (가운데 줄임) 주머니가 있어 먹물을 담고 있는데 다른 동물이 습격하면 그 먹물을 뿜어내어 현혹한다. 그 먹물을 가져다 글씨를 쓰면 색이 매우 빛나고 윤기가 난다. 다만 오래 두면 벗겨지고 떨어져서 흔적이 없어지는데 바닷물에 담그면 먹물의 흔적이 다시 새롭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정약용(丁若鏞)의 형인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이 흑산도 유배시절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있는 ‘오징어’에 관한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오징어가 아니라 ‘오적어(烏賊魚)’라고 써 놓았습니다. 다산의 제자 이청(李晴)이 붙인 설명에 보면 ˝날마다 물 위에 떠 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71년 7월 5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구 송산리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는 도중에 우연히 벽돌무덤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무덤 입구에 놓인 지석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부흥시킨 제25대 무령왕 부부임을 알려주었고,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사와 동아시아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지요. 국립공주박물관은 2021년 무령왕릉 발굴 50돌을 기려 특별전시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특별전을 오는 9월 14일부터 내년 3월 6일까지 엽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령왕릉 출토유물 5,232점 전체를 공개하는데 1971년 발견 이후 무령왕릉 출토유물 모두를 한자리에서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요. 상설전시실에서는 무령왕릉 출토유물 가운데 임금과 왕비가 착용한 대표적인 국보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시하였음은 물론 도입부에는 백제인들의 내세관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받침 있는 은잔을 전시하고 그 안에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임금과 왕비의 관꾸미개, 금귀걸이, 청동거울, 무령왕릉 석수 등 주요 유물은 진열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총독은 문무관의 어느 쪽에서도 임명할 수 있는 길을 열고, 헌병에 의한 경찰제도를 보통 경찰관에 의한 경찰제도로 바꾸며, 다시 복제를 개정하여 일반 관리ㆍ교원 등의 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을 폐지하는 것은 물론 조선인의 임용ㆍ대우 등에 고려를 하고자 한다. 요컨대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에 따라 정치상ㆍ사회상의 대우에도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동일한 취급을 할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란다.“ 이는 1919년 8월 서울로 부임한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시정방침훈시」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3.1만세 운동 이후 무력만을 앞세운 통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일본은 일단 당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3.1만세운동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해군 퇴역 장성인 사이토 마코토를 3대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는 부임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文化統治)‘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문화통치(文化統治)‘라고 내세운 것과는 달리 신문은 모두 검열을 거쳐야 했으며, 치안에 관한 법이 가장 우선으로 제정되어 감시는 오히려 더 심해졌지요. 그리고 이후 총독부는 1930년대 민족말살정책을 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화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괴짜 화원은 아마 최북(崔北, 1720~죽은 해 모름)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 북(北) 자를 반으로 잘라서 ‘칠칠(七七)’을 자(字, 어른이 되어 붙이는 또 다른 이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여보게, 칠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스스로 자로 삼았다니 괴짜 화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최북한테는 ‘최메추라기', '최산수' 등의 별명이 있지요. '최메추라기'는 그의 메추라기를 그림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어서 붙은 별명이고, 역시 '최산수'라는 별명은 그가 산수화를 잘 그렸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인 〈메추라기> 그림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최북은 어떤 힘 있는 이가가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윽박지르자 차라리 나 자신을 자해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아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습니다. 또 그는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는 술에 취해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라고 외치며 물에 몸을 던지는 등 괴짜 삶을 살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 최북 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작가 계용묵(桂鎔默, 1904~1961)은 1935년 돈에 의해 왜곡되는 인간 심리를 파헤친 작품 <백치(白痴) 아다다>를 발표합니다. <백치(白痴) 아다다>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웬만큼 확산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물신숭배 하는 세태에 깊이 빠진 황금 만능주의를 비판한 소설입니다. 순수한 백치 여인 아다다는 ‘돈’을 물신화하는 타락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흠이 나지 않은 영혼의 표상이지요. 초기작품을 발표한 이후 한동안 고향에서 침묵을 지키다가 내놓은 이 <백치 아다다>로 계용묵은 재출발과 동시에, 작가로서의 확고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벽(障壁)>(1935)ㆍ<병풍에 그린 닭이>(1939)ㆍ<청춘도(靑春圖)>(1938)ㆍ<신기루(蜃氣樓)>(1940) 등을 발표하면서 세련된 기교로써 그의 문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광복 뒤 격동과 혼란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별을 헨다>(1946)ㆍ<바람은 그냥 불고>(1947) 등을 선보여가지만 현실인식의 소극성을 크게 뛰어넘지는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