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복날의 마지막 말복(末伏)입니다. 올해는 초복과 중복이 열흘 만에 온 것과 달리 중복과 말복은 스무날(20일) 차이인데 이를 우리는 월복(越伏)이라고 합니다. 1614년 이수광이 펴낸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책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면 복날을 '양기에 눌려 음기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날'이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여름철은 '화(火)'의 기운, 가을철은 '금(金)'의 기운인데 가을의 '금‘ 기운이 땅으로 나오려다가 아직 '화'의 기운이 강렬하므로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초복, 중복, 말복'이라고 하지요. 또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복날을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기제복에서 ‘복(伏)’은 꺾는다는 뜻으로, 복날은 더위를 꺾는 날 곧, 더위를 피하는 피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장마가 끝나고 입추와 말복 무렵이 되면 날씨가 좋아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많아서 벼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평안도 연변(沿邊) 각 고을 구자(口子, 소규모 초소)의 적변을 정탐하는 사람은, 한 군데마다 열 명을 정원으로 하여, 평상시에는 2교대로 나누어 근무하고, 변고가 생기면 번을 합해서 운영합니다. (가운데, 줄임) 그 근무자 가운데 정탐꾼이 4백 9명인데...“ 이는 《세종실록》 28년(1446년) 1월 4일의 기록으로 여기서 말하는 정탐꾼 곧 체탐인(體探人)은 요즘 말로 하면 첩보원으로 조선 초 세종대왕 때 주로 활약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건국 초기 북방 영토를 확정 짓는 과정에서 고려 이래 현지의 토착세력이었던 여진족이 수시로 변경을 넘어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고, 이에 조선은 곳곳에 성과 목책을 쌓고 방어에 치중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체탐인(體探人)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거주지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다음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하곤 했지요. 또한 체탐인은 북방지역뿐만 아니라 왜인들이 드나들던 남해안에서도 활약했고, 대마도에 보내 체탐 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들 목숨을 걸고 활약했던 체탐꾼은 하루를 정탐하면 15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3년마다 50명 중 1명을 뽑아 6품 이하의 산관직 곧 정식 문관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왕 때 의방(醫方,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펴내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펴내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길이 잘 든 말)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 치료술을 엮은 책)를 내의원이 국(局)을 설치해 속히 찍어내게 한 다음 조정과 민가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위는 광해군일기[정초본] 32권, 광해 2년(1610년) 기록으로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동의보감》은 2009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고, 2015년에는 보물 제1085-1호에서 국보 제319-1호로 승격되었으며, 올해(2021년)에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주관하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과학기술사-3-2(2020)’로도 등록되었습니다. 책 제목의 ‘동의(東醫)’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축음기와 레코드가 소개된 것으로 알려진 1890년 이후 우리나라의 음반 시장은 우리 기술이나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마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약 20개 정도 음반회사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1933년 이후로는 콜럼비아ㆍ오케ㆍ빅타ㆍ포리돌ㆍ태평 등 5대 음반사가 음반시장을 장악했지요. 하지만 이런 음반사들은 일본 음반사들의 자회사였기에 광복과 함께 이름마저 사라졌습니다. 광복 이후 민족자본에 의한 음반산업이 등장할 기회가 되었는데 1947년 8월 5일 고려레코드가 처음으로 국산 음반을 제작하면서 국내 음반산업이 걸음마가 시작되었지요. 첫 음반은 광복에 맞춰 '애국가'가 그 문을 열었습니다. 그 소개를 보면 합창에 음악대학 합창단, 독창에 송진혁, 지휘에 김성태, 피아노 반주에 최성두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는 ‘조선의 노래’, ‘건국의 노래’, 해방기념가‘, ’계명의 노래‘ 등도 녹음돼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음반 제작 기술을 배울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힘겹게 음반제작을 이루어낸 것으로 원반 1장을 다듬는 데만 한 시간 이상 걸렸음은 물론, 가수나 반주자가 조금이라도 실수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낮 땡볕 논배미 피 뽑다 오신 아버지 / 펌프 꼭지에 등대고 펌프질 하라신다 / 마중물 넣어 달려온 물 아직 미지근한데 / 성미 급한 아버지 펌프질 재촉하신다 / 저 땅밑 암반에 흐르는 물 / 달궈진 펌프 쇳덩이 식혀 시린물 토해낼 때 / 펌프질 소리에 놀란 매미 제풀에 꺾이고 / 늘어진 혀 빼물은 누렁이 배 깔고 누워있다" 위는 고영자 시인의 '펌프가 있는 마당풍경' 시인데 무더운 여름날 펌프가 있는 마당 풍경이 수채화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0년에 펴내 근세기 한국문학의 고전이라고 평가되는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도 “동네 입구로 들어선 꼽추는 헐린 외딴집 마당가로 가 펌프의 손잡이를 눌렀다. 그는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축였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걸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금 지구상은 온통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이렇게 몹시 더운 날, 예전엔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가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수돗물을 쓰기 전에는 한동안 집집이 마당 가에 펌프가 있었습니다. 펌프는 압력작용을 이용하여 관을 통해 물을 퍼 올리는 기계입니다. 널찍한 마당 한쪽에 놓여 있던 펌프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43년 오늘(8월 3일)은 백산 안희제 선생이 숙원인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날입니다. 백산 선생은 1916년 무렵 고향의 논밭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뜻 있는 이들과 함께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 따위를 파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규모였던 상회는 1917년 합자회사로 바꾸고 1918년이 되자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이때 중요 출자자는 안희제, 경주 최부자집 주손 최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였지요.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독립운동자금을 위한 나라 안 독립운동기지로 삼기 위해 영남지역 지주들이 여럿 참여해 조직한 대규모 무역회사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자금은 회사의 손익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지원해야 했기에 결손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도 그걸 알고 있는 주주들은 1921년 한 차례, 1923년 두 차례나 자금을 보태 자금 위기를 막아주었는데 이러한 지원은 장부거래 형식을 띄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이 되고 귀국하여 경교장으로 온 김구 선생은 최준 선생을 불러 독립자금 지원에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마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우리가 익히 아는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렸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 그림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10》에는 “다리(가체)를 구름처럼 얹은머리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아래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귀밑으로 하늘거리는 잔털”이라는 표현으로 이 여인은 우리 전통미인의 전형이자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평가했지요. 조선 후기의 현실적 소재를 다룬 이 미인도는 이 방면 으뜸 걸작으로 꼽히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여인의 전통적 미인상의 한 전형을 보인 작품으로 비단천 먹 채색으로 그린 것이며, 사실적 기법으로 정통초상기법을 따라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또 윤곽선(쌍선)을 그린 뒤 그 안에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화폭은 113.9cm x 45.6cm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미인도가 있습니다. 바로 윤두서의 손자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9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 한기를 이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이 무덤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무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무덤을 헤쳐나가자 죽은 남편을 향해 애끓는 사랑과 비통함을 토하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유물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무덤에 묻힌 이가 1586년 31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은 이응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응태의 아내 곧 원이엄마는 한지에 한글로 편지를 써서 망자의 가슴에 덮어둔 것입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하얘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시 이 편지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온 한글 편지는 1586년에 쓴 원이엄마 편지보다도 앞선 15C중반~16C전반에 쓴 것으로 보이는 군관 나신걸(羅臣傑)의 편지도 있습니다. “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마가 끝나자마자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더위는 세상을 점령했고 밤새 열대야에 시달리고, 낮에는 에어컨 바람 탓에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지요. 이러한 불볕더위 속에서도 코로나19 탓에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 하나를 선사합니다. 바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박연폭포>가 그 그것이지요. 작품의 크기는 세로 119.7㎝, 가로 52.2㎝인데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화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진경산수화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그림은 《박연폭포》와 함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3대 명작으로 꼽히지요. 특히 이 《박연폭포》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우렛소리를 거느린 높이 37m 폭포의 물줄기는 단박에 내리그은 정선의 붓끝에서 세차게 귓전을 때립니다. 특히 길게 과장해서 그려진 폭포수는 그림 아래 개미만큼 작게 그려진 선비와 시동 때문에 크게 대비됩니다. 그 대비는 소리의 크기를 인물의 크기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인 1905년 오늘(7월 29일)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가쓰라-태프트협약(Katsura-Taft Agreement)”이 맺어진 날입니다. “가쓰라-태프트협약”은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타로가 회담하여, 미국의 대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 조건으로 승인한 밀약입니다. 그 협약의 중심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일본이 양해하고,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 확립을 양해하는 일입니다. 이후 이 비밀 협정을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으며,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종은 미 국무부에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라는 말을 전했을 정도로 미국이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줄 것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일본에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하지요. 또 그의 딸 엘리스가 조선에 와서 조미 우호를 위해 축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