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풀꽃들의 수다 - 유 미 영 부쩍 시끄러워진 양지뜸 소곤소곤 도란도란 떠들어 대는 풀꽃들의 수다에 귀를 쫑긋 세운 봄볕이 녹아든다 바람이 순해진다 (어른들을 위한 동시) 이승철 시인은 그의 시 <변산바람꽃>에서 “급하기도 하셔라 / 누가 그리 재촉했나요 (중간 줄임) 언 땅 녹여오시느라 / 손 시리지 않으셨나요 / 잔설 밟고 오시느라 / 발 시리지 않으셨나요.”라고 노래했다. 아마도 바람이 불어 언 땅을 녹여 변산바람꽃은 피었나 보다. 그렇게 봄의 풀꽃들은 우리 곁에 다가섰다. 이렇게 바람이 피워낸 꽃의 종류를 보면 “여기도 바람꽃, 저기도 바람꽃 하니까 이것저것 생김새 보고 이름 붙여주다가 나도 끼워 달라고 귀찮게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럼 너도바람꽃이라고 해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너도바람꽃’, 그럼 나도 빠질 수 없다고 해서 ‘나도바람꽃’, 꽃대가 1개씩 자라서 ‘홀아비바람꽃’, 회오리바람처럼 보인다 해서 ‘회오리바람꽃’, 꿩 발자국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꿩바람꽃’도 있다. 그밖에 만주바람꽃, 풍도바람꽃, 태백바람꽃이 있으며, 그저 아무 꾸밈도 없는 소박한 이름 ‘바람꽃’도 있다. 이렇게 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공 부 - 김기준 운구를 해 보면 안다 저 길이 곧 나의 길이라는 것을 운구를 하다 보면 철이 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언젠가 친구를 운구해 보면 이윽고 깨닫게 된다 먼 길 가는 길이 이미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운구는 하늘이 주신 기회이자 참다운 공부다 “눈물 짓고 이별하고, 황천길로 떠날 적에” / “빈손 들어 배 위에 얹고, 황천길로 들어갈 때 /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이라 (가운데 줄임) 방문 안을 바라보니, 머리맡에 약그릇과 / 지성구원 하던 모양 여기저기 던져있고” / 처자권속 돌아앉아, 눈물 짓고 있는 모양 / 산천초목도 설워하고, 일촌간장이 다 녹는다.“ 이는 서울시 휘몰이잡가 예능보유자 박상옥 명창이 부르는 상엿소리 사설이다. 우리 겨레는 사람이 살다가 이승을 떠나면 상여를 태워 저세상으로 보낸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온갖 궂은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에는 누구나 아름다운 꽃상여를 태워주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주검을 운구한다. 앞에는 동네에서 가장 목청 좋고 곡을 잘하는 사람이 상엿소리를 하고 좌우로는 상여꾼들이 적게는 20명이 좌우에서 상여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2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문전옥답을 버리고 매서운 한파를 뚫으면서 만주 망명길에 오르는 내용이다. 당시 망명길에 관한 내용은 일기와 회고록 등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자료로 고성이씨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사록(西徙錄)》이 있다. 《서사록》은 음력 1911년 1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의 망명과정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만주망명을 결심하게 된 이유와 전답 등을 처분하고 짐을 꾸리는 준비과정 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또 백하 김대락이 쓴 《서정록(西征錄)》 역시 만주망명을 위해 서울에서 의주행 기차에 올라타는 내용부터 만주에 도착하여 정착해가는 초기 망명생활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상룡 선생의 《서사록》과 김대락 선생의 《서정록》에 따르면, 당시 만주망명길에 오른 일행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안동에서 추풍령역까지는 도보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서울로 간 뒤 경의선을 통해 서울 - 평양 - 의주 - 신의주로 이동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울 엄마 - 황선복 울 엄마 누운 무덤가엔 허리 굽은 할미꽃이 짠하다 소쩍새 소리 서러워라 이웃한 제비꽃도 슬프다 이승 떠나신지 이미 오래건만 차마 잊지 못한 자식 그리워 빨간 산딸기 조롱조롱 매달아 산길마다 호롱불 밝히셨나 보다 하얀 찔레꽃 향기가 깊게 퍼진다. 중국 연변 동포 김영자 작가는 ‘우리문화신문’에 장편실화문학집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를 인기리에 연재했고, 드디어 그 문학집을 지지난해 책으로 엮어냈다. 이 작품은 중국 연변의 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로 중국조선족의 백년이주사와 정착 그리고 번영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이 책의 펴냄에 즈음하여 연변신시학회 안생 회장은 “위대한 모성애는 우리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스며 있으며 가장 부드럽고 가장 여린 곳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어 우리로 하여금 생활에 대한 끈질긴 추구와 고난과 시련에 대한 참고 견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했다.”라고 평했다. 그 글에 보면 아버지가 일찍 저 멀리 하늘나라로 떠나갔는데 허약한 엄마는 연 며칠 울다가 크게 수척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돌도 채 안 되는 어린 아기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뚝이 가라사대 - 이 달 균 어허, 할 말 많은 세상, 그럴수록 더욱 입을 닫으시오. 조목조목 대꾸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니 침묵이 상수요 대신 이놈 말뚝이 잘난 놈 욕도 좀 하고 못난 놈 편에서 슬쩍 훈수도 두려 했는데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예에에. 이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좆반인지 허리 꺽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레 이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꼴뚝아 밭 가운데 쇠뚝아 오뉴월에 말뚝아 잔대뚝에 메뚝아 부러진 다리 절뚝아 호도엿 장사 오는데 할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이는 한국 전통탈춤의 하나인 봉산탈춤 제6과장 <양반과 말뚝이 춤>에서 양반이 말뚝이를 찾자 말뚝이가 양반들을 조롱하는 사설이다. 한국 탈춤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말하라면 당연히 말뚝이다. 말뚝이는 소외당하는 백성의 대변자로 나서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로 양반을 거침없이 비꼰다. 특히 말뚝이는 양반을 희화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봉건 질서까지 신랄하게 비판해댄다. 그래서 양반들에게 고통받고도 울분을 배출할 데가 없던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말뚝이는 탈춤에서 신이 난다. 여기 이달균 시인은 그의 사설시조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액 면 가 - 윤 준 경 나는 나를 늘 싸게 팔았다 아예 마이너스로 치부해 버렸다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에 육십 년이나 절었다 그래서 나의 액면가는 낮을 수밖에 없고 때로 누가 나에게 제값을 쳐주면 정색하며 다시 깎아내리곤 했다 자신의 액면가를 곧잘 높여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겉으로는 끄덕끄덕하면서도 속으로는 씁쓸하다 그들의 액면가는 부르는 만큼 상종가를 치기도 하는데 나는 늘 나의 값을 바닥에서 치르며 흘끔흘끔 앞뒤를 곁눈질 한다 깎이고 깎인 액면가가 내가 되었다 이제라도 제값을 받아보자고 큰소리 한번 치고 싶은데 유통기한이 끝나간다 무릎이 저리다 조선시대만 해도 장수하는 사람이 드물어 임금이 직접 예순 살이 넘은 문신들에겐 양로연을 , 일흔 살이 넘은 사람에겐 기로연을 베풀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인이며 화가였던 강세황은 양로연에 참여할 나이인 예순 살이 되도록 벼슬을 하지 못한 포의한사(布衣寒士)였다. 하지만, 강세황은 보통 물러나 쉴 나이인 61살 노인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능참봉(왕릉을 지키는 벼슬)으로 시작하여 6년 만에 정2품 한성부판윤(현재 서울시장 격)에 오르는 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빈 절 - 김상아 승(僧)이라 하여 다 비울 수 있겠는가 숨을 쉬는 한 가슴은 뛰고 뛰는 가슴엔 사랑이 깃든다 질기디 질긴 화두 산문 밖에 내놓고 가시지 않는 분 냄새에 목탁소리 산란(散亂)터니 법당문 걸어 매고 소지공양* 하더니 풍경마저 낮잠 든 고요한 날에 마지막 독경 방울 떨구고 동그란 동자승 미소로 허물을 벗었다 승이라 하여 비웠는가 비우려고 숨결도 지웠는가 주저앉은 지붕 위로 칡 순 새로 돋았는데 이끼 낀 돌담 가에 구릉대꽃* 피었는데 * 소지공양 : 손가락을 불태워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수련방법 * 구릉대 : 뱀꽃을 이르는 사투리. 대매이꽃이라고도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은 그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고 되뇐다. 어디 그뿐인가?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년)는 요석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채 송 화 - 허홍구 발뒤꿈치 한 번 들지 않았었구나. 몸 낮추어도 하늘은 온통 네게로 왔구나. 울타리 하나 세우지 않고도 꽃밭을 일구었구나. 올망졸망 어깨동무하고 사는구나. 채송화는 쇠비름과의 한해살이풀꽃이다. 줄기는 붉은빛을 띠고 가지가 많이 갈라져서 퍼지며, 키는 20cm 안팎이다. 꽃은 7∼10월 맑은 날 낮에 피며 낮 2시 무렵 시드는데 붉은색, 노란색, 흰색과 더불어 겹꽃도 있다. 한번 심으면 종자가 떨어져서 해마다 자란다. 보석을 너무 탐낸 어느 여왕이 수많은 보석과 함께 사라지며 형형색색의 채송화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그래서 꽃말이 가련, 순진, 천진난만이란다. 흔히 키가 작아 ‘앉은뱅이꽃’이라 불리는 채송화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시골 꽃밭 한편 또는 마당 구석이나 장독대에 피어나 눈길을 끌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 허홍구 시인은 오히려 키가 작은 외모를 보고 ‘발뒤꿈치 한 번 들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작은 키를 감추려 일부러 발뒤꿈치를 들어 키가 커 보이게 하지도, 요즘 젊은이들처럼 키높이깔창을 신발 속에 까는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몸 낮추어도 하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헌 구두 - 허태기 발가락 굳은 살 신발이 불편하다 새 구두로 멋 부릴 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새 신발이 꺼림칙하다 신발장 넣어 둔 뒤축 달은 헌 구두 발에 맞춰보니 그렇게 편하다 버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 낡은 뒷창 고치고 터진 실밥 기워주면 새 구두 못지않게 신명 나게 걸어간다 세상살이 별거던가! 낡았다 버리지 말고 늙었다 홀대 마라 길지 않은 삶 기워주고 고쳐가며 마음 편히 사는 것이 최상의 행복.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우리는 어린 시절 손등에 모래를 잔뜩 쌓아놓고 단단하게 다지면서 두껍이에게 새집과 헌집을 바꾸자고 놀이하고 노래했었다. 지금이야 도시생활에 찌들어, 흙 자체를 만져보기도 어려운 삶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집이 조금만 낡으면 미련없이 헐고 새집을 짓는 ‘재개발사업’에 사람들은 미쳐간다. 낡은 것은 무조건 버려야 할 것들인가? 지금부터 한 15년 전쯤 나는 독일 함부르크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엔 지은 지 200~300년쯤 된 낡은 집들에 자랑스레 팻말을 붙이고 마치 문화재 보호하듯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굳이 독일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 생 - 서정란 인생은 계획하다가 어어 하다가 반성하다가 후회하다가 후딱 간다 너무 심각할 필요도 너무 엄숙할 필요도 너무 나를 얽맬 필요도 없이 그냥 강물처럼 흘러가며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이 아닐까? 천하의 명필이라는 추사 김정희. 그는 제주도에 유배 가서 험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좁은 방안에는 거미와 지네가 기어 다녔고,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든 날,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추사는 유배지에서 화가 날 때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도 붓을 들었음은 물론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었으며 어쩌다 한 번씩 받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 올 때도 머뭇거리지 않고 붓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천하의 명필이 되었고, 인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자신에게 엄습해오면 몸부림치지 않고 받아들인 그였다. 그 고통의 시간을 삭이고 곰 삭혀 온전히 발효시킨 내공을 글씨 속에 쏟아부었으며 포기하고 싶은 세월을 붓질로 버텨나갔던 것이다. 서정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