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김충선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공손히 누르하치의 강궁을 받아드렸다. 묵직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서 그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었다. 이 자와 한판 도박을 벌려야 한다! 여진의 칸 누르하치의 환심을 사야만 개벽의 서막을 제대로 열 수 있는 길이 아니던가. 이순신의 나라를 위해서 전부를 바치고자 했던 젊은 장수 김충선은 강궁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성공할 수 없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조선을 굽어 살핀다면 그는 성공할 것이었다. 넌 자신이 별로 없어 보인다. 누르하치가 엷은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김충선의 아래 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칸의 강궁을 대하는 것도 황송하온데, 심지어 지엄하신 옥체로 직접 하사 하시니 소생 몸 둘 바를 몰라 이러합니다. 김충선은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다하였다. 그따위 격식은 조선 왕의 어전에서나 뱉어 내거라. 난 자유로운 위인을 본래 숭상한다. 그대에 대해서 보고 받기로는 아주 담대하고 열정적이며 파격적이기까지 하다고 들었거늘, 어찌 이 모양이냐? 여진의 칸 누르하치는 약간은 경멸의 시선으로 김충선을 대하였다. 김충선은 상대의 돌연한 태도에 전혀 굴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로 응대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김충선의 담담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대하며 일패공주는 지난날의 그의 내력을 상기하였다. 김충선,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장수로 바다를 건너왔다. -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 하고자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중략) 단지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 사야가 김충선은 부하 장병 3천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하였다. 실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상황이었다. 누가 그의 항복을 믿을 수 있겠는가? 임진년 초의 전세는 누가 보더라도 조선의 일방적 패배였다. 일본군의 맹공에 속수무책인 조선왕조는 몽진을 감행 하였고 불과 개전 20 여 일만에 한양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하였다.임금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명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고까지 한 절박한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사야가 김충선은 그런 막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을 배신하고 조선으로 투항하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김충선이 화살을 사용하여 독수리를 사냥하겠다고 나서자 일패공주는 우려를 나타냈다. 물론 김충선이 비범한 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지만 화살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다. 그가 백발백중 명중률을 자랑하는 것은 화승총이었다. 당신은 화살에도 자신이 있다는 건가요? 다만,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너무 무리한 청을 수락하는 건 아닌가요? 지금이라도 철회를 하는 게 어떨까요? 홍타는 아직 어리고, 비교적 내 말을 잘 듣는 편이니 다른 것으로 인정받으면 되지 않겠어요? 일패공주는 진심으로 김충선을 염려하고 있었다. 장부의 말 한 마디는 그것으로 족하오. 자칫 대업을 망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녀는 김충선과 부친 누르하치가 혹여 대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공주의 조언을 듣고 보니 내가 경망되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 만일 실패 한다면 나 또한 개벽의 대업을 망가뜨린 죄인으로 목숨을 담보해야 할 것이요. 무서운 말이었다. 이번 일로 만일 여진의 칸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발생 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내 놓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좀처럼 인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패륵의 입에서 찬사가 튀어나왔다. 날짐승을 명중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실감한 적이 있던 그로서는 김충선의 화승총 솜씨에 그만 감격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김충선은 패륵의 칭찬에 공손한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시는 까만 눈동자에 불만을 가득 담아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별로 훌륭하지 않아. 김충선은 순간적으로 긴장되어 뒷목이 뻐근해졌다. 왕손들을 모두 감동시켜야만 누루하치와의 면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패륵이 눈을 흘겼다. 홍타, 넌 사냥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몰라. 독수리를 잡는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고. 칸은 활로 독수리를 사냥한 적이 많아. 누르하치의 활 솜씨는 대단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난처한 김충선을 곁에서 지켜보던 일패공주가 거들고 나섰다. 홍타, 이번에는 굉장히 멀리 날고 있는 독수리를 명중시켰어. 칸의 독수리 사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홍타이시는 콧방귀를 날렸다. 칸의 활솜씨가 훨씬 더 멋있어. 패륵도 홍타이시를 달랬다. 물론 칸의 활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냐? 어린아이답지 않게 홍타이시는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찌푸려진 콧등이 귀여움을 더했다. 김충선이라 합니다. 김충선은 예의를 다하였다. 비록 어려 보였지만 왕도의 풍모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시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우릴 감동시킬 자신이 있다고? 최선을 다할 따름이지요. 그보다 중요한 일은 별로 없다. 하늘과 땅에 맹세코 부끄럽지 않게 정성을 다한다면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야. 김충선은 내심 탄성을 토했다. 5살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린 홍타이시는 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격려, 감사합니다. 천만에, 모처럼 귀한 손님이시니 기대가 클 뿐이야. 홍타이시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면서 막사를 나섰다. 김충선은 경탄의 실소를 흘리면서 그 뒤를 따랐다. 이미 막사 밖에는 패륵을 비롯한 일패공주 등 누르하치의 왕손들이 진을 치고 김충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김충선이 어떤 행동을 보여줄 것인지 잔뜩 기대하는 시선들이었다. 김충선은 칭칭이 하얀 천으로 감겨진 석 자 길이의 화승총을 봇짐에서 풀었다. 저것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조총이란 병기 아닌가? 패륵이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칸으로 행세하는 누루하치의 자식들이니 그들은 모두가 공주이며 왕자의 신분이었다. 하나하나 눈여겨보니 어딘지 모르게 늠름하면서도 왕족의 특권인 오만한 자태도 엿보였다. 특히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첫 째 패륵은 누나가 데려온 김충선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방자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난 그가 어떤 재주로 우리 형제들을 만족 시킬지 정말 궁금해. 나이는 16세나 17세 정도 되어 보였고 허리에는 호랑이 가죽의 허리띠에 짧게 보이는 호신용 패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손목에는 금빛의 장식물을 감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 마다 경쾌한 짤랑 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우리 집안의 장자죠. 패륵왕자라고 해요 일패공주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동생을 소개했다. 김충선은 패륵을 마주 응시하며 친밀한 미소를 보였으나 어색하게 마무리 짓고 말았다. 패륵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손님은 처음이니까 우리도 기대하는 바가 크지만 과연. 누르하치의 첫째 왕자라면 향후 누루하치의 뒤를 이어 칸의 보좌에 오를 대상이니 만큼 예사롭지 않은 위치이며 형제들에 대한 영향력 역시 최고가 아니겠는가. 김충선은 누구보다도 그를
[그린경제/얼레빗= 유광남 작가] 공주는 방도가 있을 것이라 믿소. 김충선의 믿음이 일패공주는 싫지 않았다. 밉지 않았다. 당신은 꽤나 사람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어요.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거요? 옳아요. 하지만 수월 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약간의 관문을 돌파해야 해요. 관문을 돌파해야 한다? 일종의 칸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시험하겠다는 것이구려. 일패공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김충선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뿌렸다. 칸을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어려움이라도 난 헤쳐 나갈 것이오. 어떤 시험이요? 내가 미리 알려준다면 어찌 시험이라 할 수 있겠어요. 일패공주는 불빛에 상기 된 표정을 지었다. 김충선은 그녀의 미묘한 얼굴빛을 대하자 갑자기 젊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새침하게 보이면서도 애교가 내포되어 있는 야릇한 얼굴이며 표정은 충분히 사내의 감정을 뒤흔들 만 하였다. 그...렇소? 김충선은 가까스로 대답을 하고 그녀를 외면했다. 혹시나 자신의 심경을 상대방에게 들킬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패공주가 누구인가. 그녀는 예사롭지 않은 내력을 소유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과감하고 담대하며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일패공주? 그녀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아침 식사는 혼자보다도 둘이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워요. 일패공주는 바닥에 떨어진 토끼구이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흙이 묻어 있는 부위를 손으로 털어냈다. 그 광경을 김충선은 묵묵히 주시할 다름이었다. 건주여진의 누루하치를 독대하고자 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던 사람이 바로 일패공주였다. 김충선은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던 터였지 않은가. 내 건강을 위해서 와 준 거요? 일패공주는 병사들을 향해서 나직하게 명령했다. 전원 물러가라. 만주를 지배하는 누르하치의 병사들은 일제히 군용견을 이끌고 물러났다. 그들은 먼발치에서 경호 태세에 돌입하였다. 일패공주가 토끼의 살점을 뜯어냈다. 아주 잘 익었군요. 솜씨가 제법 이예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설마 당신의 방문을 내가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김충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일은 내가 사과 하리다. 그때의 일이라니요? 일패공주는 되물었다. 아련한 배신감이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그것은 오랜 고통이 되어 가슴에 사무치도록 작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여진의 군사를 움직일 수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새벽의 한기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서릿발처럼 내리 꽂혔다. 만주의 북풍은 예사롭지 않게 대지를 훑었다. 시리다. 김충선은 추위를 넘어선 한파에 몸을 도사렸다. 이미 봄이 왔건만 만주의 얼어붙은 벌판은 얼음장 같은 바람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작별을 고하고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를 만나기 위해서 머나 먼 길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이로구나. 김충선은 독백처럼 중얼 거렸지만 그 벌판의 끝에 목적지가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서둘러서 야영을 끝내고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이제 거의 건주여진의 누루하치와 상면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시장 끼가 몰려들었다. 요기를 좀 해야겠군. 김충선은 봇짐에서 건량을 뒤적였다. 비어 있었다. 간밤에 마지막을 잠결에 씹어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흘간의 행군 끝이었던 탓에 너무도 피곤하여 요기와 잠을 동시에 해결했던 것이다. 바스락 김충선의 촉각이 순간적으로 예민해졌다. 그의 손이 옆구리에 닿는 순간에 이미 매끈한 여인네의 손가락 같은 암기가 잡혀졌다. 손으로 잡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이미 암기는 예리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이순신은 냉엄한 표정으로 큰 아들 회와 평소 아끼고 있던 조카 완을 싸늘한 시선으로 쏘아 보았다. 어디서 이리 준엄한 눈빛이 쏟아질 수 있단 말인가. 평상시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순신의 노여움이었다. 이러한 분노의 시선은 바다 위에서나 종종 발휘 되었다. 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적선을 마주했을 때가 아니고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회와 완은 고개를 무참히 떨구었다. 그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용서 하소서. 용서할 수 없다. 너희들이 정녕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난 용서도, 이해도, 용납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의 안색이 푸르게 변해갔다. 노화가 격탕하여 얼굴빛을 시퍼렇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이회외 이완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들은 설마 이순신이 이토록 분노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충선은 날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나갔다. 그는 스스로 어려운 길을 자청하였다. 과연 누가 그러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겠느냐? 이순신의 탄성은 이해가 충분하였다. 사야가 김충선은 오로지 이순신의 새 하늘을 열기 위해서 만주행을 택한 것이지 않은가? 여진과의 대타협을 이루기 위한 김충선의 선택은 위험한 곡예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