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겉으로는 짐짓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장예지 역시 몹시 놀라운 상황이었다. 설마 이런 장소에서 이런 날에 김충선의 지기를 만날 줄이야. 구대일은 구대일대로 다음의 처신을 어찌해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김충선과 그녀의 관계가 궁금했다. 낭자는 내 친구와 어떤 사이요? 장예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떤 사이던가? 김충선과 자신은 스승과 제자인가? 아니면 깊은 연모의 대상? 그도 아니면 이제는 생판 남남? 전에 조금 인연이 있었지요. 조금의 인연이란 말에 구대일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호, 다행이구려.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요. 혹 가까운 상대였다면 내 친구에게 큰 결례를 저지를 뻔 했지 않습니까. 대일은 넉살 좋게 말하였다. 비록 말은 그리 하였어도 여전히 켕기는 구석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조금 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인연입니까? 장예지는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그 말인 즉, 현재는 전혀 미련이 없는 관계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그런 것이 궁금하세요? 장예지의 질문에 구대일이 웃었다. 제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친구가 충선입니다. 또한 그 벗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또한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오표는 제거해야 할 장예지의 등 뒤로 바싹 다가서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막연한 시선으로 하천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 역시 젊은 특권이 아닐까. 오표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그녀의 고통을 마무리하는 역할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오표는 침통에 숨겨진 오독침(五毒針)으로 그녀의 목덜미 양쪽에 자리한 천주혈(天柱穴) 중 한 곳을 찔러 버리고 그녀의 등을 슬쩍 밀어 청계천으로 밀어버리면 그만 인 것이다. 그녀는 포청에 의해서 단순 추락사로 기록될 것이었다. 혹시 우리 구면 아닌지요? 그 삶과 죽음이 엄숙한 순간에 불쑥 이방인 한 명이 끼어들었다. 갓과 도포를 착용한 선비가 장예지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오표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의외의 방해자로 인해서 노여움이 잠시 끓어올랐다. 동반하여 죽을 자? 선비는 넉살 좋은 생김새였다. 소생은 승정원 주서(注書)로 있는 구대일이라 하외다만. 장예지는 낮선 인상으로 접근해 온 구대일로 해서 잠시 혼란스러운 눈길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사람이 별로 머리가 영특하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오표가 장예지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맑게 흐르는 청계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살구나무 가지에 꽃잎이 시름하는 모양을 보니 봄이 깊어가는 모양이었다. 그 분과 이곳을 거닐었다. 장예지의 가슴에 사부 김충선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사람과 걸었던 수표교의 향취가 마지막 이란 생각이 들자 콧등이 시큰거렸다. 아니, 비단 청계천만이 아니고 이제 한성과는 작별을 고할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번잡한 세속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고향의 산골짜기에 비구니들만이 모여 있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장예지는 그리 떠나고자 했다. 사부, 대업을 반드시 이루소서. 사부 김충선과 마지막 이별을 고하기 위해 그녀는 추억의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표가 그녀의 행방을 뒤 쫒아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추적과 암살, 교란과 침투에 독보적인 훈련을 받은 전사였다. 사모하는 정인을 단념해야 하는 여인의 심리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반드시 그녀가 나타날 것이란 예측은 적중했다. 충분히 기다려 주겠소. 오표는 내심 중얼거렸다. 장예지의 가냘픈 몸매를 뒤 따르며 그녀의 손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김충선이 우리에게 보여준 지난 5년간의 성과를 헤아린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기됩니다. 이회가 부친 이순신에게 아뢰었다. 이순신이 대답대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김충선은 1592년 임진전쟁이 시작되자 바로 부하들과 투항하여 조선을 위하여 조총 기술을 전수하고 조선의 관군들은 물론이고 의병과 합류하여 무수히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충선은 어떤 면에서 이순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무관이면서도 역시 그는 학문적 성취가 남달랐다. 유학의 조예도 깊었으며 병서(兵書)를 풍부하게 섭렵하였고 두뇌가 비상하였다. 생각은 깊었으나 행동은 빨랐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을 선택하였고 까다로운 조선의 사회에 적응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 친구는 기필코 이루어 낼 것입니다. 이번에는 김충선과 동갑인 이울이 믿음을 드러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했지 않느냐. 이순신은 두 아들을 둘러보았다. 이회와 울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버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일은 사람이 꾸미는 것이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이 다시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단지 치열하게 투쟁했던 그들 오랑캐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이순신은 거부하였다. 공연히 조정을 자극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이순신이 말한 조정이란 곧 선조를 일컫는 것이다. 왕은 지금 마지못해 방면한 이순신에 대해서 철저한 이중 삼중의 감시를 펼치고 있는 중이 아니던가. 절대 자중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이회가 머뭇거리다가 부친 이순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회는 수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일행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지난 새벽에 감시자가 미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애 대감을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이번에는 어떤 연유로 곽장군을 피하시는 겁니까? 이순신은 아들 두 명을 둘러보았다. 서애대감은 결코 곤경에 처해질 분이 아니다. 하지만 곽장군은 다르지. 어떤 면이 다르옵니까? 이번에는 둘째 울이 물었다. 서애대감의 탁월한 지혜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어떤 위기에서도 서애대감은 흔들림이 없다. 그와의 관계를 공개 하는 것은 의심 많은 왕에게 믿음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곽장군은 다르다. 그는 천생 선비이며 의병장이다. 술수를 모르는 담백한 대나무와도 같다. 오히려 조정에 의심이 가해진다면 곽장군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은 무장이었으나 웬만한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오표는 그 우리라는 것이 자신과 일패공주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김충선과 일패공주를 말하는 것인지 진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무슨 뜻이야? 김덕령의 약혼녀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해후할 것이라고는 누가 짐작했었습니까? 사부와 제자이기도 했어. 오표는 잔인했다. 그런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요점을 말해줘. 장예지가 살아 있다면 그건 김충선의 가슴에 또 하나의 형상이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공주님을 위하여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냥 풀어준 것은. 그래서 소신이 수습하겠습니다. 오표는 숨도 쉬지 않고 장예지를 죽인다고 말하고 있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일패공주는 몸을 돌렸다. 그녀 역시도 잔인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오표는 그녀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해줄 일이 있다는 것이 그래도 기꺼웠다. 오표는 그녀의 등 뒤에서 읍을 한 후 의관을 착용하였다. 조선의 선비 복장은 여진, 이제는 만주라 불려야 하는 자신의 족속보다도 복잡하였다. 장예지는 어디로 갔습니까? ...... 일패공주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표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왔다. 4월의 봄 햇살이건만 부드럽지도 따스하지도 않았다. 오표만 그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그 자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김충선은 쉽사리 이순신의 곁에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개벽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내가 이 어려운 시기에 종적을 감췄다면......? 어쩌면 그는 여진으로 날 찾아 떠났는지도 모르겠군. 오표의 안면에 놀라운 신색이 떠올랐다. 이순신과 김충선이 전일 새벽에 집을 나서며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는 것이...... 왜 아니겠는가? 만일 그들이 행동한다면 우리가 절대 필요할 터이지. 그럼 공주께서는? 마다하기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오표! 깊이 들어와 버렸다는 뜻은 무엇일까? 그러나 오표는 짐작하고 있었다. 칸께서 용남하시리라 생각하시옵니까? 일패공주는 서늘한 시선으로 오표를 응시했다. 용호장군이 반대하실 이유 또한 없으리라. 여진을 통일시킨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는 명나라로부터 여진수령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직함을 하사받았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여진은 명나라와 조선이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루는 동안 부락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일사불란한 군대로 탈바꿈 시켰다. 또한 여진이란 호칭을 만주(滿洲)로 바꾸었다. 만주는 만주인 출신을 의미하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김충선의 행적을 수소문 하게나. 난 이 길로 상감을 뵈어야겠네. 그러지. 오표가 가뜩이나 예리한 눈에 힘을 주어 부하들을 둘러보자 살벌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장 김충선의 행방을 추적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하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표는 품안에서 명주 수건을 꺼내어 손가락 마디 4개를 소중히 싸매었다. 임금님께 올리시게. 김충선을 놓친 벌칙이라고 말씀 올리고 또 다른 실수가 발생할 경우 이번에는 목을 바칠 것이라고 전하시게. 강두명은 다소 떨리는 손으로 그가 내미는 명주수건을 건네받았다. 금방이라도 절단 된 손가락들이 그 안에서 꿈틀 거리는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오표는 냉정한 신색을 잃지 않았다. 군주에 대한 충성의 맹세와도 같은 것일세. 강두명은 내심 혀를 찼다. 과연 오표란 인물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집념과 도발적인 욕망을 소유하고 있는 자였다. 의금부 나장에서 어전(御殿)의 내금위로 신분 상승을 꾀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음이 다시 한 번 입증 되었다. 이런 작자를 만난 것은 어쨌거나 강두명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상감마마의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장부의 약속은 천금보다도 귀중한 것을! 하지만 기회는 다시 있을 것이옵니다. 저하를 외면할 수밖에는 없으나 결코 잊지는 않겠습니다. 김충선은 걸음을 빨리 옮겼다. 장예지의 행방을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인지는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를 포기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예지낭자, 난 이제 여진으로 가야 할 것이요. 김충선은 조선을 떠나서 여진으로 갈 예정이었다. 이순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여진은 매우 중대한 역할을 감당 할 것이었다. 여진의 족장 칸 누루하치는 임진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에 2만 원군의 파병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그 제안을 수락하지 못했었다. 우린 10만 여진의 용병이 필요하다. 김충선은 내심 중얼거리며 방향을 북쪽의 자하문(紫霞門)을 향해서 힘 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어둠이 무섭게 몰려들고 있었다. 울적한 심야로군. 밤길을 이토록 두려움 없이 걷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연인이라 믿었던 장예지를 찾지 못하고 조선을 떠나는 김충선의 마음은 지독히 아팠다. 그 통증으로 주변의 그 어느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인왕산은 험준했고 때때로 호랑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그러나 이렇게라도 행동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으며 영문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함은 더욱 컸다. 장예지는 분명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그녀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일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자 내가 부담스러워졌던 것이요? 김충선은 그리 생각 되었다. 장예지는 둘도 없는 조선의 친구 김덕령의 여자였다. 동시에 서로의 연모(戀慕)를 확인 하였으나 조선의 시대적 규범에 의해서 그 마음을 억누르고 외면했었다. 우리 이제 가까스로 다시 해후했거늘. 어디로 또 달아난 것이요. 예지낭자! 가슴이 미어졌다. 울고 싶을 때 울었으면 좋으련만 김충선은 그리하지 못했다. 나라를 위해, 이순신을 위해서는 눈물이 통곡 되었으나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울어 줄 눈물은 이상하게도 인내(忍耐)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김충선은 오늘 밤이 지나면 더 이상 방황할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새 하늘을 열어야 하는 개벽의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윤자신의 앞에서 이순신과 김충선은 상호 불화(不和), 불신(不信)의 연기를 해야만 했지 않은가. 조선 왕의 의심에서 그들은 절대 자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