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정석현 기자] 이 책은 뇌졸중으로 삼킴곤란(연하장애) 후유증을 겪은 저자의 진솔한 병상일지다. 저자는 이 책의 집필 동기를 “삼키지 못하는 절망에서 삼키는 기쁨의 과정을 적은 이 경험담이 삼킴곤란 환우들에게 작은 희망의 실마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라고 했다. 뇌졸중 환자의 50~70%는 삼킴곤란을 동반하며 전체 입원환자 6%, 재활의학과 입원환자의 32%가 삼킴곤란 증세로 고통받고 있다고 하니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인터넷신문 발행인으로 술ㆍ담배도 하지 않을뿐더러 날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등 체력관리를 열심히 해왔으나 뜻하지 않게 찾아온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물과 음식을 전혀 삼키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해 9월 중순의 일이다. 저자는 삼킴곤란 진단을 받은 뒤,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 이 병의 예후를 알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을 뿐 아니라 단행본으로 도움이 될만한 책자를 찾았으나 허사였다. 그러다가 겨우 ‘연하장애’라는 이름의 책을 발견하여 사서 읽어보니 책은 일본책의 번역판으로 용어에서부터 일반 독자의 눈높이와는 동떨어진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으로 되어있었다고 했다. 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3) 1923년, 마침내 내가 완성됐어. 멋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지.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도 나를 구경하러 왔단다. 메리는 내게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어.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한다 하더구나.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 아주 특별한 집이 한 채 있었다.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왜 지었는지 베일에 싸여 있던 곳. 사람들은 그곳을 광복 뒤 보금자리로, 전쟁 중 피난처로, 전쟁 뒤 공동주택으로 썼다. 태풍에 무너질 뻔하고 화재로 불에 탈 위기도 있었지만, 이 은행나무 아래 집은 행촌동 언덕 위에서 거의 100년을 버텼다. 이 책 《딜쿠샤의 추억(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 아주 특별한 집)》은 2017년 8월 8일,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공식 등록되어 2021년 시민들에게 개방된 ‘딜쿠샤’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립문역에서 약 10분만 가면 쉬 닿을 수 있는 이 저택은, 그 이국적인 이름만으로도 무한한 추측과 신비를 자아낸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하는 ‘딜쿠샤’는 주인을 잃은 뒤, 오랫동안 진짜 이름은 잊힌 채 ‘붉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흔히 ‘부자 3대 못 간다’라는 말이 있다. 대를 이어 부를 지키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재산도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지키는 것 자체가 일이다. 관리해야 할 것도, 신경을 써야 할 것도 많다. 그래서 300년 이상 ‘재벌가’로 부를 이어간 가문을 보면, 응당 그 비결이 궁금해진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무려 300년 동안 만석꾼으로 이름을 떨친 ‘경주 최부잣집’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임금이 바뀌면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하던 시절, 굳건한 처세와 대를 잇는 철학으로 무려 12대 300년 동안 부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는’ 나눔의 정신으로 조선 최고의 ‘적선지가(積善之家)’가 되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던가. 덕을 쌓은 집안에 복이 있듯, 최부잣집은 부를 베풀수록 나날이 번성했다. 부를 베풀고, 민심을 얻고, 그 민심이 더 큰 부를 불러들이는 부의 선순환. 그것이 바로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이었다. 이 책, 《명가-나눔을 실천한 최부잣집》은 그 부의 비밀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최부잣집을 소재로 2010년 방영한 사극 《명가》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p.8) <기왓장 내외>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시에 나오는 기왓장 내외. 이 내외는 나라 잃은 임금이 사는 대궐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름답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일상이었을까? 이런 기왓장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그야말로 허울뿐인 임금이 되어 덕수궁에 갇히다시피 한 사람, 바로 고종이었다. 45년 동안 조선의 임금으로 재위하면서, 끝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책임을 통감할 수밖에 없던 고종은 덕수궁에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기쁨을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자신이 환갑 때 얻은 딸 덕혜옹주였다. 1912년 5월,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지 2년 뒤에 태어난 덕혜는 고종 임금과 붕어빵처럼 닮아 있었다. 이 책 《동시와 함께하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는 조선의 마지막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화가 났나?’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해.’ ‘아냐, 슬픈 표정인데?’ 종이에 꽉 차게 그려진 어떤 사람이 우리를 뚫어지게 보고 있어요. 살짝 올라간 눈매에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묘사된 풍성한 수염, 다소 불그레한 살집 있는 얼굴이 씩씩한 장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강렬한 눈매를 가진 그림 속의 인물이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듭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선비화가 윤두서입니다. (p.8) 정면을 응시하는 부릅뜬 눈. 한 번 보면 쉬이 잊기 어려운 그 얼굴. 바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미술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법한 이 그림은, 해남윤씨 종가를 대표하는 종손이자 선비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18세기 초 그린 것이다. 지금은 얼굴만 남아있어 미완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X-선 투과 촬영 등 정밀히 조사한 결과 본디 다소 옅게 그려졌던 신체 부분이 보존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신체는 지워져 버렸으나, 그가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했던 세상은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이 책의 부제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임진왜란 때 중히 쓰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인물이 둘 있다. 바로 이 책 《조선의 영웅 김덕령》의 주인공인 김덕령과 송구봉이다. 조선 중기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둘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눈과 신분의 굴레에 매여 높은 뜻을 못다 펼친 채 스러져갔다. 솔직히 역사에 밝은 이에게도 김덕령과 송구봉의 이름은 생소할 법하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고도 반란 수괴 이몽학을 도왔다는 죄명으로 모진 국문을 받다 순국했고, 율곡 이이의 절친한 벗이었던 송구봉은 율곡을 능가하는 천재로 이름이 높았으나 미천한 출신 때문에 출사하지 못하고 재야에 묻혀 지냈다. 지은이는 먼지를 덮어쓰고 박제되어 있던 두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들은 둘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많았던 덕분인지 유난히 전설과 설화가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얼기설기 엮어낸 지은이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전우치가 족자에서 뛰어나온 것처럼 두 사람이 책 밖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광주 무등산 기슭에서 태어난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지관이 무덤을 쓰려고 점찍어둔 자리에 김덕령의 부모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병신춤이라 부르지 마시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 장애자들 내 동생 어린 곱사 조카딸의 혼이 나에게 달라붙어요. 오장 육부가 흔들어 대는 대로 나오는 춤을 추요.” (p.14) 광대 공옥진이 춘다. 오장 육부를 뒤흔들며 춘다. 이른바 ‘병신춤’이다. ‘병신’이라는 말에 내포된 부정적 어감을 지우기 위해 ‘곱사춤’으로도 불리는 이 춤은,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이들의 한과 눈물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한판 굿에 가깝다. 한 시대를 풍미한 판소리 명창, 1인 창무극의 대가, 곱사춤 명인 공옥진은 아이돌 그룹 투애니원의 단원 공민지의 고모할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공민지 또한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예인의 피’를 입증하듯, 수많은 아이돌 그룹 가운데서도 예사롭지 않은 춤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은이는 이 책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 – 광대 공옥진》을 통해 명인 공옥진이 한평생 걸었던 예인의 길, 그녀가 남기고 떠난 소중한 유산을 딸에게 들려주는 듯한 친근한 어조로 풀어낸다. ‘우리 인물 이야기’ 시리즈의 일곱 번째 이야기로 나온 이 책을 읽다 보면 ‘공옥진’이라는 한 인간이 일궈낸 아름다운 유산을 오롯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고행록(苦行錄). 이 책의 주인공, 한산 이씨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한글 자서전에 붙인 제목이다. 얼마나 인생이 고단했으면 자서전에 ‘고행록’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정경부인까지 올랐지만, 인생의 그림자와 거친 비바람에 눈물 흘린 날들도 참으로 많았다. 이 책 《고행록, 사대부가 여인의 한글 자서전》 지은이 김봉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근무하던 시절, 진주 유씨 모산종택을 방문해 두루마리 형태의 친필본을 직접 보았다. 당시 장서각에서는 한산 이씨 부인의 《고행록》 번역 작업이 한창이었고, 지은이는 한글문헌학 전공자로서 자료집 편찬을 주관하고 있었다. 이때 펴낸 자료집이 《고행록: 17세기 서울 사대부가 여인의 고난기》였고,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를 올올히 풀어낸 것이 이 책이다. 사실 한산 이씨는 남편의 정치적 부침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기에, 유명천의 행적과 한산 이씨의 고행록을 견준 지은이의 노고로 하나의 완결된 서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한산 이씨 부인은 아계 이산해의 고손녀로 1659년(효종10), 기해년에 태어났다. 한산 이씨 가문은 이산해와 그 아들 이경전
[우리문화신문=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 《우리말의 탄생 2판-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최경봉, 책과 함께, 2019)》는 우리말 사전 편찬사를 다루고 있다. 초판이 나온 지 14년 만이다. “근대사의 맥락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사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말의 존재 의미를 생각할 계기를 만들었다”(6쪽)라는 초판에 대한 평가는 2판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자료를 모으고 부지런히 쓴 노력이 돋보인다. 제목으로만 보면 오랫동안 무관심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우리말과 글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열렬히 주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주시경 이래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경성제대 ‘과학적’ 국어학 감싸기가 도드라지는 점이 첫번째 지적할 점이다. 그러면서 말글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 교조화된 민족주의, 결벽증적 도덕성의 억압(45쪽, 338쪽, 358쪽)’ 등의 표현이 보인다. 이 책은 ‘과학적’이란 말을 ‘민족주의’와 대립시키면서 과거 한글전용주의를 가리켜 민족주의 감정에서 나온 편협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학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여기서 ‘과학적 국어학’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오구라와 고바야시가 경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은근히 친숙하면서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조선, 그러나 보면 볼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신기한 조선.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만큼 재밌는 사실도 많고, 이 책의 부제처럼 ‘민초의 삶부터 왕실의 암투까지’ 다양한 결의 역사를 두루 맛볼 수 있는 시기가 조선이다. 《조선 산책》 지은이 신병주 교수는 조선사 전문가로, 역사의 다양한 모습과 그것이 오늘날 지니는 함의를 꾸준히 전달해왔다. 이 책은 2015년 10월부터 <세계일보>에 ‘역사의 창’이라는 이름으로 약 3년 동안 격주로 연재한 칼럼을 시의에 맞게 적절히 재구성한 것이다. 칼럼에 연재한 글이니만큼 각 꼭지가 재미있으면서도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 책의 어느 부분을 펴서 읽어도 술술 읽힌다. 이 책의 제목이 ‘산책’인 것에서 알 수 있듯 각 꼭지가 그렇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말랑말랑한 주제가 많다. 그 가운데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꼭지를 발췌해보았다. #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그렇다. 근엄할 것만 같은 ‘조선 남자’, 선비도 육아일기를 썼다. 16세기 학자 이문건(1494~1567)이 쓴 《양아록》이 바로 그 일기다. 그럼, 누구를 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