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가람 기자] 수임졍, 승월대,승월교 , 청허부... 지난 내용은 송강선생이 광한루원을 조성시의 광한루원만을 소개하였다. 해서 이번호에는 광한루원 앞 요천수와 관련한 선조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소개해 본다. 광한루 앞 요천 건너편 바위의 아랫 부위엔 “승월대(昇月臺)”란 표기가 있다. 승월대란 말을 풀이하면 달에 오르는 누대라는 뜻이다. 그 전설의 내용은 팔월 한가위 둥근달이 떠오르면 하늘의 선녀들이 광한루원앞 요천변에 내려와 비파를 타며 춤과 노래로 밤새 노니다가. 새벽닭이 울 때 이곳 승월대에서 금빛 달기둥을 타고 달나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다. ↑승월대 위에자리했다는 기록을 통해 지난해조성한수임정(水臨亭) 승월대는 요천을 사이에 두고 광한루와 마주하고 있는데 그 위에 수임정(水臨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근래 수임정을 복원하였다. 물을 내려다보는 정자라는 뜻의 이 수임정과 광한루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재현코자 건립한 다리가 승월교 이다. ↑승월교(昇月橋) 승월교는 승월대와 천상의 월궁인 청허부를 이어주던 전설의 금빛 달기둥을 상징한다. 선녀들과 요천에서 노니다가 승월대위에서 달기둥을 타고 월궁에 오르듯이 사람들이 승월교를 건너 지상의 월궁
[그린경제=가람 기자] 오는 6월 22일(토요일)춘향전의 배경이 된 남원 광한루원에서 국악 뮤지컬 가인춘향이 오후 8시에 공연이 펼쳐진다. 남원시에서는 명승인 광한루원의 야경과 춘향사랑, 판소리 동편제의 본고장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접목시켜 체류형 관광상품으로 특화시키기 위하여 상설 공연으로 기획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전라북도의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의 공모사업으로 선정 국 도비 1억 4천만원을 확보 추진되는 상설공연은 이몽룡이 성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 곳으로 알려진 광한루원에서 야간의 풍광과 함께 펼쳐져 극의 감동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남원시립국악단이 오는 6월 22일부터 10월 19일까지 4개월동안 매주 토요일 저녁 8시부터 광한루원 특설무대에서 국악 뮤지컬가인춘향을 야간상설로 공연할 예정이다. 특히 여름행락철을 맞아 관광객이 몰리는 7월 19일부터 한 달 동안은 금요일에도 공연을 진행해 더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남원 국악의 멋을 알릴 계획이다. 창극과 뮤지컬의 장점을 섞어 춘향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국악 뮤지컬 가인 춘향은 젊은 층의 선호도가 높은 뮤지컬의 빠른 전개와 활기찬 율동, 구체적인 서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
[그린경제=가람 기자] 지금부터 118년 전이었던 1894년 갑오년.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동학도와 농민군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왜군과 관군, 민보군의 반격으로 20~30만 명의 무참한 순절자를 뒤로 한 채 역도, 폭도, 비도가 되어 눈보라 휘몰아친 광야와 산야로 내몰리고 숨어 살아야 하게 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막을 내리던 해였다.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도 세월이지만 역도로 몰린 동학도와 농민군, 그리고 그 가족들은 행여나 그 흔적이 남아서 다시 잡혀 갈까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남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자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휘부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싸우다가 살아남으신 유태홍 교구장의 구술을 최병헌 후임 교구장이 기록으로 남긴 「남원군 종리원사 부 동학사」 및 순교약력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 남원의 참상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연구결과가 전라좌도 농민군의 총 지휘부였던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 당시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단 1년간 시작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 부침 속에
[그린경제=가람 기자] 춘향전의 배경지로 잘 알려진 광한루원(廣寒樓苑. 명승 제33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원래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26년 (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 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면서부터 광한루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송강정철에 의해서 이상향의 세계인 월궁을 상상하며, 확장 한 것이 오늘날의 광한루 형태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광한루에도 걸려있는 편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철의 전라관찰사시절을 노래한 그의 시, “청풍명월”을 소개한다. 청풍명월속에....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栽培塢竹挹淸風(재배오죽읍청풍)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 달과 노닐고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한해 남녁관찰사로 일할 적에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정철은 일 년여 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냈다고 술회한다. 이 시는 정철이 남원
그림경제=가람 기자] 송강 정철과자미(진옥)의 사랑이야기..... (백일홍꽃을 보고 자미라하는데 남원의 시목이기도 하다. 송강이 전라감사로 있을 무렵이라니 정철이 48세 전후의 중년시기였던 것 같다. 남원 관아에 자미(紫薇)라는 동기(童妓)가 있었는데 송강이 자미의머리를 얹어주었다고 한다.(머리를 얹는다는 것은 옛날 처녀들이 결혼을 하면 긴 머리를 돌돌 말아 머리위에 얹고 풀리지 않도록 비녀을 꽂는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당시 송강의 관찰사 시절을 그의 시에서 잠시엿보자. 청풍명월속에....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달과 노닐고 栽培塢竹挹淸風(재배오죽읍청풍)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한해남녁관찰사로 일할적에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화자는 일년여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밝은달과 맑은바람과 더불어 지냈다고 술회한다. 이 시는 정철이 남원의 광한루를 크게 증축(1582년 선조 15년)하고, 쓴시다. 송강은 광한루 연못을 파고,세 개의 섬(삼신산,삼신선도)을만들어동쪽의방장섬에배롱나무를중앙의봉래섬에는대나무를서쪽오작교옆의영주섬에는연정을세웠고호수
[그린경제=가람 기자] 남원문화대학에서는 답사활동을 통하여 호남3대석물로 알려진 윤효손선생, 최상중선생, 최시옹 선생의 묘동을 답사하였다. ○문효공 윤효손(文孝公尹孝孫) 묘동 신도비 규모도 웅장하고 화려하다. -윤효손 신도비(국가보물 584호) 전남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 경국대전 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 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을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이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
우리나라 불교는 통일신라의 귀족중심의 교종불교에서 통일신라말 중국달마대사의 학풍을 이어받은 새로운 선종 9산선문이 도래하면서 남원실상산파의 실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후 남원불교는 전국적으로 유명승려와 불자 일천여명이 몰려들면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고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사찰들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각종 석조문화재가 불사되는 등 새로운 불교문화를 주도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불교성지화가 진행된다. 이렇게 남원지역은 그 과정 속에서 남원에 많이 분포되어있는 화강석에 불상부조화 작업의 결과물인 바위부처님 즉 마애불이 많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남원시대산면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우리지역의 마애불은 대부분 통일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사회혼란시기에 조성되었다. 이는 마애불의 특성상 통일신라말과 후삼국 그리고 고려로의 재통합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의미가 부여 되어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또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실 때에 하신 손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로 남원지역 마애불의 대부분이 수인형태에서 설법인(전법
[그린경제=가람 기자]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옛 성으로 상호 중요한 요새인데 수도 없는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아막성은 1,500여년전의 산성으로서 성벽을 이루었던 석재들이 무너져 수북이 쌓여 있으며, 산 중턱에는 4~5m 높이의 돌기둥처럼 생긴 돌탑이 서있다. 금방 바람만 불어도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한 세월 넘어가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돌탑은 성 돌로 쌓은 데다 덩굴들이 탑을 감고 있어오랜 세월 버텨낸 것이다. 이 돌탑을 쌓은 것은아영이 고향인 박철수씨가 1967년 스무 살 새내기 때 아래 문성암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쌓은 것으로아침이면 일어나 새로운 대학생활과 삶의 꿈을 하나씩 돌덩이 싣고 쌓고 또 쌓았다고하니 더욱 놀라운일이다. 얼마전 TV 사극에서 삼국의 영토분쟁사를본 뒤 백제와 신라의 모산성(아막성)에 대한 얘기에 눈길이 갔다. 백제 무왕은 4만 병력으로 아막산성을 포위하니 신라왕 진평은 정예 기병을 보내 막아 싸웠다는 대목이다. 백제군은 신라군을 평지로 끌어내기 위해 패한 척 도주하여 매복했는데, 신라 장수 무은이 적의 도주를 쫒아 군사 1천
[그린경제=가람기자] 변강쇠전 이야기는 이렇게 이루어 진다. 평안도 월경촌에 옹녀라는 여자가 있었다. 열 다섯에 시집가서 남편이 죽는데, 매년 계속 개가하나 매번 죽는다. 스무 살에도 남편이 죽자, 동네 남자들이 이 여자를 자꾸 범하는 일이 벌어져, 동네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결국 동네에서 쫒겨나고, 이어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궁합을 본 뒤 혼례를 치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다 궁합이 잘 맞아 삼남지방을 유람하면서 변강쇠가 일은 아니하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다 죽을병이 들게 된다. 이들은 어느 날 한 주막에서 지리산 뱀사골의 고로쇠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뱀사골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와 고로쇠물을 마시며. 병을 치료하며 살았던 곳이 들독골이라고 전한다. 이후 병이 완쾌되자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며. 힘자랑을 했다고 하며, 그 들독이 있다 해서 들독 골이라 한다. 병이 낳은 후 백장계곡에서 살게 된다. 게으름을 타고난 강쇠, 산속에 들어와서도 피둥피둥 놀기만 하여 땔꺼리 조차 없어, 하루는 옹녀가 나무를 해 오라 했다. 낮잠만 퍼잔 강쇠는 해질녘 길가의 장승을 뽑아 와서 땐다. 이 일로 전국의 장승들이 모여 회의를 한뒤, 변강
[그린경제=가람 기자] 전북 남원시 왕정동에 한우물이라는 마을이 있다. 남원시내의 한켠 서북쪽에 우뚯 솟은 교룡산 자락의 남서쪽으로 자리한 마을로 방죽과 큰 샘이 자리한다. 지금은 방죽은 메워 농토가 자리하고 있지만 수십년전만 해도 낚시꾼들이 모여들던 방죽이었다. 옛날 한우물마을에는후처와 아들 3형제를 둔 심성고운 농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농부는 피로에 지쳐 길가에 쓰러진 한 나그네를 구하게 된다. 오랜동안 정성을 다하여 몸이 완쾌할 즈음인데,그 나그네는 어디론가 흘쩍 사라져 버렸다. 그후 세월이 흘러 두어 해가 지난 어느날 그 말없이 떠났던 나그네가 농부를 찾아왔다. 지난날 저의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인사도 못드리고 사라져 버렸던 나그네를 기억하시냐며, 그간의이야기를자초지종의 이야기한다. ▲ 한우물 전설의 고장 표지석 본인은 지관인데 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곳 마을 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엄청난 명당을 찾았단다. 그래서 긴장이 풀린탓인지 그간의 고생에 지친나머지 병을 얻어 쓰러지게 되었는데, 은인께서 날 구해주었다며, 죄송해 하였다. 병이 완쾌될 무렵 그는 명당문제로 너무 큰 고민속에 말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