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一區耕鑿水雲中(일구경착수운중) 물과 구름 낀 가운데에 한 뙈기 밭 갈고 우물 파니 萬事無心白髮翁(만사무심백발옹) 만사에 무심한 백발의 늙은이라네 睡起數聲山鳥語(수기수성산조어) 산새들 지저귀는 몇몇 소리에 잠깨 일어나 杖藜閑步遶花叢(장려한보요화총) 지팡이 짚고 산책하며 꽃들 구경하네 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벗 안응휴에게 지어준 한시입니다. 하지만 이는 안응휴에 대한 찬사(讚辭)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삶의 지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이 흐르고 구름 낀 가운데에서 한 뙈기의 밭을 갈고 우물을 파니 안응휴는 낮잠을 자다가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깨 일어나 지팡이 짚고 산책하며 꽃들 구경한다고 노래합니다. 이 시에 대해 허균(許筠)은 《국조시산》에서 “초탈하고 뛰어나 미칠 수가 없다.”라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에서, “문장과 성리학은 그 경계(境界)에 이르면 한 몸이다. 당나라 한유(韓愈)가 문으로 도를 터득한 사람인데 성혼이 바로 그러하다.”라고 했습니다. 성혼은 “학문이란 어버이(父母)를 섬기고, 형(兄)을 따라 함으로써 당연함을 얻는 것이다. 마음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빗장수비'를 아실 것입니다. 이탈리아 축구 대표 팀 ‘아주리 군단’은 ‘빗장수비’로 유명하지요. 아무리 뚫으려 해도 빗장을 지른 것처럼 뚫리지 않는 수비 덕분에 붙은 별명입니다. 한옥 문에는 이 빗장이 또 다른 자물쇠 구실을 합니다. 한옥을 짓는 마지막 매듭이 빗장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 전통건축은 빗장에 공을 들였습니다. ‘빗장’은 문을 닫은 뒤 그 중간쯤에 나무나 쇠로 만들어진 긴 막대를 가로질러서 열리지 않도록 하는 막대입니다. 구멍을 파 빗장을 질러 넣어 걸리도록 덧대어 놓은 나무를 둔테(빗장걸이)라고 하지요. 빗장에는 주로 거북무늬가 많이 쓰이는데 그 까닭은 거북이 십장생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거북머리인 귀두(龜頭)는 남성의 생식기를 닮아 생명과 다산(多産), 번창의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빗장을 풀겠습니다. / 어둡고 험한 세상 살면서 / 가리고 잠갔던 / 마음의 빗장을 풀겠습니다.” 석정희 시인은 그의 시 <빗장을 풀고>에서 이제는 마음의 빗장을 풀겠다고 합니다. 요즘 대다수 문에서 쓰는 도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학과 예술성이 빗장 하나에도 곁들여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참외라는 이름에서 ‘참’의 의미는 / 그 이치를 내 따져 알 수 있다네 / 짧은 놈은 당종(唐種)이라 부르고 / 긴 놈은 물통이라 부른다지 / 베어놓으면 금빛 씨가 흩어지고 / 깎아놓으면 살이 꿀처럼 달지 / 품격이 전부 이와 같으니 / 서쪽 오이란 말과 한가지라네” 위는 조선중기의 이응희(1579-1651)가 지은 “참외[眞瓜]”라는 시인데 어찌나 토속적이고 소박한지 한 편의 풍속화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묘사한 시도 있지만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참외는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적은데 매우 달다.”라고만 나옵니다. 또 참외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부터 참외를 즐겨 먹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오던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에는 알록달록한 개구리참외, 겉이 노란 꾀꼬리참외, 색깔이 검은 먹통참외, 속이 빨간 감참외, 모양이 길쭉한 술통참외, 배꼽이 쑥 나온 배꼽참외, 유난히 둥그런 수박참외 등이 소개돼 다양한 종류의 참외가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밖에 쥐똥참외라는 것도 있었는데 맛이 없어 아이들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람이 많이 죽는지라, 임금이 한성부에 명하여 집계하여 보니 죽은 자가 4백 57인이 되고, 또 병조에 명하여 호군(護軍) 다섯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면서 사람의 주검이 문을 나가는 것을 헤아려서 아뢰라고 하였다. 좌찬성 황보인(皇甫仁)이 고려 숙종(肅宗) 때의 옛일에 따라 돌림병 귀신에게 제사지내어 예방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5월 1일 치 기록으로 서울에 돌림병이 돌아 심각했음을 얘기하면서 돌림병 때문에 귀신에게 제사지내기까지 했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말로 돌림병(한자말로는 전염병)이라 부르는 병들은 《조선왕조실록》에만도 259건이 검색될 정도로 고통을 받았지요. 특히 지금은 별것 아닌 홍역 같은 돌림병에도 쩔쩔 매곤 했는데 홍역이 돌면 세 갈래 길에 짚을 십자 모양으로 깔아놓고 “벼슬떡”을 올려놓고, 마마신이 가기 전에 떡을 잘 먹고 가시라고 비손하는 이 행위를 했는데 이를 사람들은 “마마배송”이라 했지요. 그때에 견주면 의학이 엄청나게 발달했는데도 지난해부터 온 세상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사망자도 많이 나왔을 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붉은 동백꽃이 담벼락에 활짝 피었다 / 곱디고운 나비도 한 마리 그 곁엔 꿀벌도 춤을 춘다 / 어느새 좁은 골목길 메운 사람들 참새처럼 재잘재잘 / 누가 먼저 꽃을 그리기 시작한 걸까? 꿈 없던 마을에 / 향기를 한 아름 선사한 무명의 화가들 / 그들은 동피랑의 천사들이어라. - 이한영 ‘동피랑 마을’ - 경남 통영에는 동화 같은 벽화로 가득한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습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통영시 동호동, 정량동, 태평동, 중앙동 일대의 언덕 위 마을을 일컬으며 여기서 ‘동피랑’이란 이름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벼랑 위에 들어선 집이 주는 이미지처럼 이곳의 집들은 크고 번듯한 집이라기보다는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집들과 조붓한 골목길로 이뤄진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대부분 도회지에서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통째로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현대식 주거지인 아파트를 짓게 마련인데 이곳 동피랑 벽화 마을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통영시가 동포루(東砲樓,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이 있던 자리)의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이 일대를 철거하려고 하자 ‘푸른통영21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도화서 화원으로, 한국적이고 운치 있는 멋진 작품을 그린 화가입니다. 그런가 하면 ‘씨름’, ‘무동’, ‘빨래터’, ‘점심’ 같은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박하고 사실적인 그림 곧 풍속화를 많이 그렸지요. 여기 '서당'이란 이름의 그림도 역시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당시 서당에서 공부할 때 일어난 재미난 풍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서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회초리가 훈장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을 외우지 못해 방금 종아리라도 맞은 모양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으며, 훈장마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대부분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데 갓을 쓴 기혼자도 있습니다. 정면이 아닌 사선구도의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데 배경은 역시 아무것도 없이 비워 놓았습니다. 종이에 수묵담채 곧 먹으로 그린 위에 엷게 색을 칠한 그림입니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체벌과 매질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훈장 옆에 놓인 가느다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우리는 “경찰, 입양아 폭행 양부 구속영장…의식불명 상태”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보았습니다. 지난 5월 11일은 입양문화의 정착과 국내 입양의 활성화를 위하여 만든 “입양의 날”이었지요. 여기서 수양부모(收養父母)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수양아버지와 수양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 길러 준 부모를 이른다.”라고 풀이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수양부모 풍습이 있었으며 친부모가 있어도 자식의 수명을 길게 하려고 수양부모를 삼기도 했습니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4월 24일 기록에 보면 ‘군사의 수양부모에 대한 상례규정’을 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조 참의 김자지(金自知)가 아뢰길 “3살 이전의 수양은 곧 자기 아들과 같이한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 말을 따라야 마땅하나, 군관들에게는 안 될 듯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옳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이는 국방의 의무 중에 수양부모 상을 당하면 어찌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수양부모로 삼고 나면 아이의 친부모는 그 수양부모에게 선물을 하며, 수양부모도 아이에게 선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5월 27일 국립국악원은 매주 한 편, ‘국악인’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GugakIN 人’입니다. 한글은 전혀 없고, 알파벳과 한자를 섞어 이상한 글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호의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을 위반한 것입니다. 제나라 말과 글을 사랑하지 않고 외국어 쓰기는 즐기는 이러한 행태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태는 국어사전들의 잘못된 이끎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말글연구회 회장을 지낸 고 정재도 선생은 “우리 사전들에는 우리말에다가 당치도 않은 한자를 붙여 놓은 것이 많다. 우리말이 없었다는 생각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데 우리는 한자 없이도 우리말을 쓰는 겨레다. 우리말이 한자 때문에 없어진 것이 많은데 그나마 남아있는 우리말도 한자말로 둔갑시키고 있다.”라고 말했지요. 북한 《조선말대사전》에서는 ‘부실하다’를 우리말로 다루어 “①다부지지 못하다 ②정신이나 행동이 모자라다 ③실속이 없다 ④충분하지 못하다 ⑤넉넉지 못하다 ⑥미덥지 못하다”처럼 풀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林亭秋己晩(임정추기만)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이 드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詩想)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위 시는 경기도 파주 화석정에 걸린 것으로 율곡 이이가 8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입니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지만 최근에 이 앞쪽으로 새로이 길이 생겨 예전의 절경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이 선조 임금과 관련이 있는데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놈들을 피신하다 다다른 곳이 바로 여기 화석정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 다다른 곳인데 앞에는 벼랑 끝 물길이요 뒤에는 왜놈 병사들이 벌떼 같이 몰려옵니다. 그때 한 신하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이부자리를 네 손으로 개어 깨끗한 곳에 두어라. 이어 비를 가지고 자리를 깨끗하게 쓸고 머리는 얼레빗으로 빗고, 빗을 빗통에 넣어 두어라. 이따금 거울을 보며 눈썹과 살쩍을 족집게로 뽑고 빗에 묻은 때를 씻어 깨끗하게 해라. 세수하고 양치하며 다시 이마와 살쩍을 빗질로 매만지고, 빗통을 정리하고 세수한 수건은 늘 제자리에 두어라.” 윗글은 안평대군, 한석봉,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4대 명필의 하나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유배지에서 딸에게 절절히 쓴 편지 일부입니다. 자신은 유배를 떠나고 아내는 목을 매 죽어 부모 없이 홀로 남은 딸에게 이광사는 사랑을 담아 편지로 가르침을 주었지요. 여기에 두 번이나 나오는 살쩍은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던 선비들도 망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살쩍을 망건 안으로 밀어 넣으려 “살쩍밀이”라는 빗을 썼지요. 살쩍밀이는 대나무나 뿔로 얇고 갸름하게 만듭니다. 깔끔한 선비들은 살쩍밀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머리를 가지런히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정한 차림을 중시하여 매일 아침 첫 일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