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음식을 얹어 나르거나 방에 놓고 식탁으로 쓰는 상(床)의 종류를 소반(小盤)이라고 합니다. 소반에는 다리 모양새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뉩니다. 다리가 하나뿐인 상은 “외다리 소반[獨脚盤, 單脚盤]”이라 하고, 다리가 셋인 것은 “삼각반(三脚盤)”이라 하며, 다리 모양이 개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개다리소반[狗足盤]”이라 합니다. 또 호랑이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호족반(虎足盤)”, 말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마족반(馬足盤)”, 대나무 마디같이 조각한 것은 “죽절반(竹節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 관가로 출장 다니던 소반이 있습니다. 바로 공고상(公故床)이 그것인데 옛날 높은 벼슬아치가 궁중이나 관가에서 숙직할 때 집의 노비들이 이 상에 음식을 얹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고 하지요. 지금처럼 구내식당이나 외식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번(番) 곧 숙직이나 당직을 할 때 자기 집에서 차려 내오던 밥상이라 하여 “번상(番床)”, 바람구멍을 냈다고 하여 “풍혈상(風穴床)”이라고도 합니다. 양옆에 손을 잡을 수 있도록 “亞(아)” 자나 “卍(만)” 자로 된 뚫새김(투각) 구멍이 있으며, 앞쪽에는 내다볼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기운차게 일어나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 고대처럼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하게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의 뜻있는 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 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신국민을 양성할만한 문화를 진흥할지어다.” 이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 자에 쓴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 일부입니다. 내용을 보면 국수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닌 우리 고유문화의 장점 위에 다른 문명의 우수한 것을 더하여 국민을 이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진정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 오자키가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뒷간을 맡는 귀신인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곳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하며, 젊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수광의《지봉유설》에는 매달 음력 6일, 16일, 26일에 측신이 뒷간을 지키는 날이므로 뒷간 출입을 삼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키려면 음식도 적게 먹어야 했겠지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뒷간에 갈 때는 헛기침한다고 하지요.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으면 길일 밤을 택해서 뒷간에 불을 켜고,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쓰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 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지요. 경첩은 신라시대의 유물에서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목관장식, 금속제품, 목공품의 장식에 세련미를 더하여 생활전반에 널리 쓰였습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지요.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 이중병풍, 제비추리(아래쪽이 제비 꼬리 모양), 구름, 난초, 나비, 호리병, 박쥐 따위로 불렀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람이 셰상에 나셔 무릇 모든 일에 의심 있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가히 믿을 만한 것을 보고도 행치 안으면 대단히 어리셕은 일이라 아이 기르는 데, 역질 일관으로 말 할진대 슈쳔년 이래로 사람마다 지낸바 위태함을 이로 말할 슈 업는 재앙이더니. 다행히 하느님 보살피는 덕으로 우두법이 나셔 일백 여달 피 동안에 텬하만국에 사람 건진 것이 가위 부지기슈요 우리 대한으로 말하더래도 이십 오년 지간에 그 효험 본 사람이 또한 몇십만 명이 될 것이니 이는 죡히 의심을 파하고 믿을 만한것이오. 하물며 나라에셔 마을을 셜시하고 관원을 두어 아모됴록 백셩의 역질을 예방하게 하시니 츄후라도 미신함이 업거날 슬푸다 엇지 이러틋 생각지 아니하난고” 위는 의생이며, 국어학자였던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 황성신문 1903년 03월 24일 자에 발표한 “권종우두설(勸種牛痘設)” 일부입니다. 여기서 지석영은 “우두법이 나셔 우리 대한으로 말하더래도 이십 오년 지간에 그 효험 본 사람이 또한 몇십만 명이 될 것”이라며 그런데도 믿지 못하고 우두를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개탄합니다. 이는 요즘 코로나19 백신에 관해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 민족적으로 하나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으뜸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사랑과 미움이나 친하거나 친하지 않음의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이 말은 1923년 오늘(3월 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된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이 1925년 11월 1일 67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기 직전 동포들에게 고한 말입니다. 박은식 선생은 황성신문 주필, 독립신문사 사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3월 21일 임시정부 의정원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臨時大統領李承晩彈劾案)>을 통과시킨 다음 3월 23일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특히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한국근대사의 첫 번째 고전이 된 책을 쓴 분입니다. 《한국통사》는 한국근대사를 ‘국혼’이 담겨 있으면서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태극은 우주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며, 빨간색은 존귀와 양(陽)을 의미하고, 파란색은 희망과 음(陰)을 의미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습니다. 또 사괘의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가운데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합니다. 이 태극기는 박영효가 1882년 9월 일본에 가는 배 안에서 만들었다는 ‘박영효 창안설’이 있지만, 최근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박영효 창안설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등록문화재 제382호 ‘데니태극기’인데 이는 고종(재위 1863-1907)이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지요. 데니는 1886년 청나라 리훙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외교고문이 되었는데,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고 조선이 주권독립국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일로 청의 압력을 받아 1890년 파면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 고종이 태극기를 하사한 것입니다. 데니태극기는 가로 263cm, 세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가 진 후에도 얼마간은 빛이 남아 있어서 낮이 좀 더 길게 느껴집니다. 춘분 즈음엔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둥지기 곧 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으려고 물꼬를 손질하지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은 이 음력 2월을 이르는 것으로, 바로 춘분을 앞뒤 때를 가리킵니다. 옛말에 ‘춘분 즈음에 하루 논밭을 갈지 않으면 한해 내내 배가 고프다.’ 하였습니다.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 대부분 사람은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지요. 그 흔적으로 “점심(點心)”이란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다과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 끼가 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은 왕실문화도감 《무구(武具)》를 펴냈습니다. ‘무구’는 유물의 다양한 그림과 시각자료를 함께 수록한 책으로 ’군사‘를 주제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펴내는 사전식 도감입니다.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실 문화에 대해 일반인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 축적을 위해 《조선왕실 복식(2012)》, 《궁중악무(2014)》, 《국가제례(2016)》, 《의장(2018)》을 펴냈으며, 이번에 5번째로 《무구》를 펴낸 것입니다. 이 책에는 먼저 ’궁시(弓矢)‘ 곧 각궁, 예궁, 죽궁 등의 활과 화살을 수록하였습니다. 이어서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철환이나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인 화포와 비격진천뢰, 조총, 그리고 서양식 청동제 화포인 불랑기 등까지 함께 수록하였지요. 또 조선 시대 군복에 차던 칼인 환도(環刀), 운도, 언월도부터 사인검(四寅劍,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등 인(寅) 자가 네 번 겹쳐지는 시간에 맞추어 쇳물을 부어 만든 보검)과 같이 상징적인 칼까지 정리하였습니다. 그밖에 기창, 용도창, 마상창 등 창은 물론 긴 몽둥이에 짧은 몽둥이를 고리로 연결한 타격 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국보 제102호 ‘충주 정토사터 홍법국사탑 (弘法國師塔)’이 있습니다. 고려 목종 때의 스님 홍법국사의 탑으로, 고려 현종 8년(1017)에 세웠습니다. 또 이 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겼습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스님으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지요. 기단(基壇)은 네모난 바닥돌을 깐 뒤에 8각의 아래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높직한 괴임을 두어 가운데 받침돌을 올린 뒤 다시 윗 받침돌을 얹어 놓은 모습입니다. 가운데 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고, 윗 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탑에서 가장 큰 특징은 탑신(塔身)의 몸돌로,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지요. 몸돌에는 공을 가로ㆍ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습니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