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이제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무척 고심했지요. 그래서 세종 때에는 정초 등이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이란 농업책이 나왔고, 효종 때는 신속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 같은 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농사관련 책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도 있는데 이 책은 《열하일기》, 《허생전》 등으로 유명한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쓴 책입니다. 《과농소초(課農小抄)》는 충남 당진의 면천(沔川) 군수였던 박지원이 1799년에 썼는데 땅을 깊숙이 갈아 잡초를 제거하는 따위의 농경법을 개량하여, 노동력을 줄이고서도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 농민들에게 지우는 부역을 줄이고, 농기구의 개량을 통해 노동력을 절감할 방법을 꾀하기도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을 늘리는 방법으로 땅에 거름을 주는 방법의 개선과 논에 물을 대는 방법의 개량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박지원은 사행단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 농업의 현황을 살펴 조선과 중국의 농학을 견주면서 책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려면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입는 옷이 배냇저고리입니다. 오희문이 쓴 임진왜란 때 9년 3개월에 걸친 피란일기 《쇄미록(尾錄)》에 “오늘이 곧 새로 난 아기의 삼일이다. 몸을 씻기고 비로소 새 옷을 입히고 이름을 창업이라고 지었으니…"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새 옷이 바로 배냇저고리를 뜻합니다.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입힌다고 하여 ‘일안저고리’, ‘이레안저고리’, ‘이란저고리’라고도 하였고, ‘배안의 옷’, ‘첫돈방’이라고도 했으며, 제주도는 특이하게 삼베로 지어 ‘봇뒤창옷’이라고 했지요. 배냇저고리는 품을 넉넉히 하고 길이를 길게 해 배 아래까지 덮었으며, 소매도 길게 해서 손을 완전히 감쌌습니다. 깃과 섶을 달지 않고, 아기의 수명이 실처럼 길게 이어지라는 뜻에서 고름 대신 길게 무명 실끈을 꼬아 붙여 앞을 여며줍니다. 갓난아기는 목욕을 자주 해주어야 하는데 이때 입고 벗기기가 아주 편한 옷이 바로 배냇저고리입니다. 남자아기의 배냇저고리는 재수가 있다 하여 시험을 보거나 소송이 벌어졌을 때 부적같이 몸에 지니는 풍습이 전해집니다. 집안의 장수한 어른이나 어머니의 옷으로 배냇저고리를 만들어 입히기도 했지요. 엄마가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쑥쑥 새순 돋는 봄날 / 명자야 명자야 부르면 / 시골티 물씬 나는 명자가 / 달려나 올 것 같다 / (가운데 줄임) 사랑도 명자꽃 같은 것이리라 / 흔해 빠진 이름으로 다가왔다가 /가슴에 붉은 멍울로 / 이별을 남기는 것이리라 / 명자야 명자야 / 눈물 같은 것 버리고 / 촌스러운 우리끼리 바라보며 / 그렇게 한세상 사랑하자” 위는 목필균 시인의 <명자꽃 만나면>이란 시입니다. 명자꽃은 작지만 화사한 아름다움으로 볼수록 신비한 매력이 숨겨진 꽃입니다. 4~5월에 피는 들꽃이지만 관상용으로도 많이 기릅니다. 한방에서는 목과(木瓜)라 하여 한약재로 쓰는데 경기도에서는 아기씨꽃 또는 애기씨꽃이라 부르고, 전라도에서는 산에 피는 해당화라 하여 산당화(山棠花)라고 하며, 처자화, 당명자나무라고도 부릅니다. 시골 한적한 곳을 지나다 문득 발견한 붉은 꽃. 묘한 아름다움에 끌려 한참을 들여다보지만, 처음엔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지요. 집에 와서 식물도감을 찾아본 뒤에야 이 꽃에 “명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명자”라는 이름을 촌스럽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자꽃은 꽃이 아름다워 아녀자가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 즈믄해를 이대로 전하여 봄 직하지 않은가 / 삼년 뒤 정월 초하룻날 밤 치지정에서 다시 펼쳐 보고서 시를 짓는다.” 이는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다시 꺼내 보고 감탄하여 지은 시입니다. 그렇게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안평대군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447년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신선들과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노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깬 뒤 너무나 생생한 장면을 잊을 수 없어 화가 안견에게 부탁해서 그린 그림이 바로 세로 38.7㎝, 가로 106.5㎝ 크기의 몽유도원도입니다. 이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있는데 텐리대학은 이 그림이 훼손될까 봐 염려된다면서 2009년 이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몽유도원도를 보고 그와 가까웠던 스물세 명의 선비들이 감상평을 써두었지요. 그 뒤 10년이 지나지 않아 안평대군은 그의 형 수양대군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감상평을 썼던 사람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먹었던 과자를 흔히 “한과(韓菓)”라 하는데 이는 한복, 한식처럼 서양의 과자나 중국의 한과(漢菓)와 구분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 토박이말로는 “과줄”이지요. “과줄”에는 유밀과, 약과, 정과, 다식, 숙실과 따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줄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유과”라고도 하는 “유밀과”를 꼽아야 합니다. 유밀과는 찹쌀가루에 콩물과 술을 넣어 반죽하여 삶아낸 것을 얇게 밀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내어 쌀 고물을 묻힌 것이지요. 유밀과는 크기나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큰 것은 “산자”, 손가락 굵기는 “강정”, 팥알만 하게 썰어 말려 튀긴 뒤에 엿으로 뭉쳐 모나게 썬 것을 “빙사과(氷砂果, 賓砂果)”라고 합니다. 그 밖에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어 만드는 것으로 제사 지내는 데에 빠지지 않는 “약과”, 생과일이나 식물의 뿌리 또는 열매에 꿀을 넣고 조린 “정과”, 쌀ㆍ깨ㆍ밤 등을 가루 낸 것이나 송화가루 등을 꿀로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틀인 다식판에 찍어낸 “다식(茶食)”, 밤ㆍ대추 등에 꿀을 넣고 졸이거나, 이를 삶아 으깨서 꿀ㆍ계피가루에 버무려 밤ㆍ대추모양으로 만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최근 한 블로그에는 “국보 제83호와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사한 것이 일본 고류지(광륭사)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이다. 두 불상은 재료가 다를 뿐 삼산관의 형태, 치마 자락의 처리, 신체 균형 등이 매우 흡사하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일본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쌍둥이’일 절도로 닮았다고 했지만, 이는 잘못입니다. 글쓴이는 지난 2013년 “일본 국보 1호 "미륵상" 일본인 얼굴로 성형수술”이란 제목으로 이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잡지 《역사공론》 1976년 6월호에 실린 일본 미술사학자 나가이 신이치 교수의 <아스카불에 보는 일본과 조선>이라는 글을 보면 “(광륭사 미륵상)의 얼굴 부분에 손대기 전 모양을 떠 놓은 것이 도쿄예술대학에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현재의 얼굴과 다르며 한국국립박물관 불상(한국 국보 제83호) 얼굴과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곧, 조선풍이었던 얼굴을 명치 때 수리하면서 일본풍의 얼굴 다시 말해 일본인이 좋아하는 얼굴로 고쳐 놓아 버린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여섯째로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입니다. 이 무렵부터 못자리를 마련하는 일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지요.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 같은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합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햇차가 나오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다례라는 말이 무려 2,062번이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엔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는 녹차(綠茶)라 부르지 않고 차(茶) 또는 참새 혀와 닮은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작설차(雀舌茶)라고 불렀습니다. 녹차는 우리가 일본에 전해준 뒤 오랫동안 일본에 뿌리내려 그쪽 기후와 땅에 맞는 품종으로 바뀐 것이며, 이를 가공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녹차는 원래 찻잎을 쪄서 가공하는 찐차이고, 우리 차는 무쇠솥에 불을 때면서 손으로 비비듯이 가공하는 덖음차입니다. 그래서 차맛에 민감한 이들은 녹차와 우리 전통차의 맛이 다르다고 하며, 색깔도 다릅니다. 또 한 가지 더 알아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의 진흥을 위해 운영되는 사단법인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서울 세종로 프레스센터 1층 로비에는 커다랗게 확대한 대한매일신보를 배경으로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었던 양기탁 선생과 배설(베델) 선생 흉상이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되어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고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애국계몽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던 신문이지요. 83년 전 오늘(4월 19일)은 양기탁 선생이 병을 얻어 중국 강소성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날입니다. 선생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펼쳐진 국권 회복 운동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양기탁 선생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를 조작하여 구속하였고, 구금된 지 64일 만인 1908년 9월 25일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그 새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도 식었고, 친일배의 농간으로 의연금 일부도 빼앗기고 말았지요. 선생은 언론을 통해 배일사상을 드높였으며, 대한제국 당시 독립협회, 신민회 등의 창건에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굳건한 신념으로 가지고 많은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을 키워낸 이가 오세창 선생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은 아버지 오경석에게 이어받은 골동서화 감식안과 민족정신은 그의 집안뿐만 아니라 전형필 등을 민족문화유산 지킴이로 만들어냈지요. 또 그는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냈는데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입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珍籍書畵)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 십수 년 아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東購西買)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는데, 그중 150점은 그림이다.” 이는 1915년 1월 13일 치 ‘매일신보’에 ‘별견서화총(瞥見書畵叢)’이라는 제목으로 난 기사 내용인데 선생이 이렇게 동서로 뛰어다니며 골동 서화를 사들인 까닭은 조선왕조가 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처음에 임금이 주야 측후기(晝夜測候器, 밤낮으로 기상의 상태를 알기 위해 천문의 이동이나 천기의 변화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는데, 이를 완성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모두 네 벌인데, 하나는 궁궐 안에 둔 것으로 구름과 용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셋은 발이 있어 바퀴자루[輪柄]를 받고 기둥을 세워 정극환(定極環, 별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을 받들게 하였다.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어 점후(占候, 구름의 모양ㆍ빛ㆍ움직임 등을 보고 길흉을 보는 점)에 쓰게 하고, 둘은 함길ㆍ평안 두 도의 절제사 영에 나눠주어 경비하는 일에 쓰게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19년(1437년) 4월 15일 기록으로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측기기 곧 ‘일성정시의’를 만들어 궁궐 안과 서운관에 설치하고, 함길ㆍ평안 절제사 영에 나눠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의 원리와 북극성을 중심으로 규칙적으로 도는 별의 회전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날씨만 좋다면 밤낮 모두 쓸 수 있는 시계입니다. 지름 68㎝로 구리로 만들어진 일성정시의는 한양의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