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한째인 ‘소서(小暑)’입니다. 소서라는 말은 작은 더위를 뜻하지만 실은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인데다 장마철과 겹쳐서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때입니다. 소서 무렵에는 논의 모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로, 김을 매거나 피사리를 해 주고 논둑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하기도 하지요. 이때에는 호박과 각종 푸성귀가 나오기에 다양한 음식이 입맛을 돋우는데, 특히 국수나 수제비 등 밀가루 음식이 구미를 당깁니다. 또 민어는 한창 기름이 오를 때여서 민어고추장국은 매운맛과 함께 달콤한 맛이 나 첫 여름의 입맛을 상큼하게 돋우어줍니다. 그 밖에 민어로 요리한 조림ㆍ구이ㆍ찜ㆍ회를 비롯해 민어포 등의 먹거리도 인기 있지요. 요즈음은 농약을 치면서 농사를 지어 예전처럼 피사리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김매기를 하는 농부들은 허리가 휘고 땀범벅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에서 논바닥을 헤매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07년 고종황제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호소한 직후인 그해 7월 6일 매국노 가운데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고종에게 양위를 종용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그 책임이 폐하에게 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친히 도쿄에 가서 일본의 천황에게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세가와 주둔군 사령관을 대한문 앞에 맞아 면박(面縛, 양손을 등 뒤로 돌려 묶고 얼굴을 쳐들게 하여 사람에게 보임)의 예를 하십시오.”라고 협박했습니다. 고종은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이냐”라고 책망했지만 이후 이완용과 송병준이 날마다 고종에게 독촉했고, 송병준이 만든 친일단체 일진회가 나서서 온 나라에서 유세한 것은 물론 궁 밖에선 ‘촛불시위’까지 벌였지요. 고종황제는 일본과 대한제국 대신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7월 19일 새벽 3시에 “이제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라는 조칙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대한매일신문>은 그해 7월 23일 논설에서 ”한국의 내각대신이 일제히 궁에 들어가 황제의 뜻에 반하여 (폐위를) 강박”했다면서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여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씨름도’가 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오른쪽 사람은 입을 꽉 깨물었으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두 다리를 떠억 버티고 선 모양새를 보면 이번엔 이기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왼쪽에 번쩍 들린 사람의 표정을 보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양미간 사이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으며, 눈빛은 쩔쩔매는 듯 너무나 처절합니다. 더구나 한쪽 다리는 번쩍 들려있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질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왼쪽 사람이 넘어진다면 과연 어느 쪽으로 넘어질까요? 자세히 보면 왼쪽 사람들은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 아래 구경꾼들은 몸을 뒤로 젖힌 것은 물론 뒤로 손을 짚은 채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요. 그래서 왼쪽 씨름꾼은 당연히 이쪽으로 넘어질 것이란 짐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잘못 그려진 부분이 한 군데 있는데 뒤로 몸을 젖힌 구경꾼의 손을 반대로 그려놓았는데 참 어색합니다. 천하의 단원이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아니면 재미있으라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일까요? 타임머신 타고 옛날로 돌아가서 단원에게 물어볼 수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9일 문화재청은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에 만든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되는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입니다.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들은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는 평가지요. 특히, 이 활자는 지금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을해자(1455년)’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종 ‘갑인자’는 세종 당시 천문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자들이 만든 활자라서 품질이 뛰어나다는 게 국내 서지학계의 평가지요. 조판 기술이 대폭 개선된 이 활자들은 흔들리지 않게 찍혔고 인쇄 속도도 두 배로 빨라졌음은 물론 서체의 세련된 아름다움이 더 큰 특징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이번 금속활자의 발굴은 훈민정음은 물론 세종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합니다. 한글이 소리와 꼴, 뜻이 하나의 이치로 이어진 글자이자 인류의 역사에 없던 새로운 형식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우리 겨레는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마실 때 소반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소반의 쓰임새에 따른 종류를 보면 임금 수라상을 비롯하여 궁궐에서 쓰던 상을 ‘궐반’이라 하고. 잔치할 때 쓰는 큰상으로 개화기 이후 만들었던 ‘교자상’도 있지요. 또 돌을 맞는 아이를 위해 차리는 상 곧 ‘돌상’이 있는데 이를 ‘백완반(百琓盤)’이라고도 합니다. 그 밖에 점쟁이가 점을 칠 때 필요한 기구인 방울, 살, 동전 등을 올려놓고 쓰는 ‘점상’이 있으며, 머리에 이었을 때 구멍이 나 있어 앞을 내다볼 수 있으며, 다리는 어깨 위에 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고상(풍혈반)’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혼인예식 때 쓰는 ‘합환주상’도 있지요. 전통혼례 때 신랑, 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의식을 합근례라 합니다. 이때 쓰는 술잔은 작은 박을 쪼갠 ‘합환주잔’인데 이 잔에 술을 담았을 때 쏟아지지 않게 하려고 작은 소반 위에 잔이 걸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상이 바로 ‘합환주상’이지요. 구멍이 두 개인 ‘합환주상’과 달리 그저 구멍이 하나 뚫린 것은 ‘잔상’이라고 합니다. 겨레의 슬기로움이 돋보이는 ‘합환주상’ 참 재미난 상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남북이 갈린 지 어언 70여 년. 분단 뒤 남녘으로 온 실향민들은 그들의 고향에 노래를 두고 왔습니다. 그렇게 두고 온 노래들이 어슴푸레 잊혀가고 있는데 유지숙 명창은 지난 2016년부터 어렵게 어렵게 그 노래들을 찾아 사람들에게 “북녘땅에 두고 온 노래”를 선물하고 있지요. 지난 2019년 12월 11일 그 세 번째 무대에서의 특별한 발견은 북녘의 상여소리입니다. 이제 남녘에서조차 상여소리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들만 겨우 보존될 뿐 상여 행렬이 없는 거리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는 노랫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더더욱 들을 수 없는 북녘의 상여소리를 찾아 헤맨 유지숙 명창은 남녘의 메나리조와 육자배기조 상여소리와는 음악적 특징이 다른 상여소리들을 선보였지요. 황해남도 배천, 황해북도 연산, 남포시 강서, 평안남도 둔덕 그리고 평양에서 불리던 상여소리들입니다. 유지숙 명창은 북녘에서 전해온 상여소리 악보를 오랫동안 익히고, 서도소리 선율이 묻어나도록 시김새를 얹혀 무대에 올렸지요. 그동안 애절한 남녘 상여소리에 익숙해 있던 청중들은 남녘 소리보다는 좀 더 씩씩하고 맑은 북녘의 상여소리에 빠져들어 숨을 죽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襪底江光緣浸天(말저강광연침천) 버선 밑 강 빛은 하늘에 잠겨 푸른데 昭陽芳艸放筇眠(소양방초방공면) 소양강 방초에 지팡이 놓아두고 자네 浮生不及長堤柳(부생불급장제류) 뜬 인생 긴 둑의 버들에 미치지 못하여 過盡東風未脫綿(과진동풍미탈면) 봄이 다 지나도록 솜옷을 벗지 못하네 이는 조선 말기의 한학자, 개화 사상가인 고환당(古懽堂) 강위(姜瑋)가 춘천 소양강의 버들 둑에서 길을 가던 도중 회포를 읊은 ‘수춘도중(壽春道中)’이란 한시입니다. 발아래 소양강 빛은 하늘에 잠겨 푸른데, 소양강가에 피어 있는 방초에 지팡이를 던져두고 잠을 청합니다. 부평초같이 둥둥 뜬 내 인생은 저 긴 둑에 자란 버들보다도 못한데, 봄이 다 지나가지만, 겨울에 입던 솜옷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 때를 만나지 못한 울분의 잠재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인(武人) 집안에서 태어난 강위(姜瑋)는 문인(文人)이기를 바랐지만, 신분적 한계 때문에 길이 막힘을 알고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 동안 배웠으며, 민노행이 죽은 뒤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와 북청에 귀양간 추사 김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남녀 사이 자유스러운 접촉을 금하였던 관습 또는 제도를 “내외(內外)”라 했습니다. 내외의 기원은 유교 경전 《예기(禮記)》 내측편(內則篇)에 “예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궁실을 지을 때 내외를 구별하여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 거처하고, 궁문을 깊고 굳게 하여 남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여자는 임의로 나가지 않으며,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한 예론에서 비롯되었지요. 이 내외법에 따라 여성들은 바깥나들이를 쉽게 할 수도 없었지만, 꼭 나들이해야 할 때는 내외용 쓰개를 써야만 했고, 가마를 타거나, 귀신을 쫓는 나례(綵棚儺禮)와 같은 거리행사 구경을 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용 쓰개의 종류를 보면 얇은 검정 깁으로 만든 너울[羅兀], 치마와 같은 것으로 끈이 달린 쓰개치마,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로 겉감은 초록색, 안감은 자주색을 쓴 장옷, 방한을 겸한 내외용 쓰개 천의, 비나 볕을 피하기 위한 삿갓, 주로 기녀들이 바깥나들이 용으로 머리에 썼던 전모 따위가 있었습니다. 쓰개 가운데는 주로 장옷과 쓰개치마가 많이 쓰였는데 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오늘(1920년 6월 25일)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천도교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했습니다. 《개벽》이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의 어두운 세계는 끝나고 후천의 밝은 문명세계가 돌아온다.”라는 뜻의 ‘후천개벽’에서 따온 것입니다. 창간 취지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ㆍ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 《개벽》의 기사들을 보면 종교ㆍ사상은 물론 정치ㆍ경제ㆍㆍ역사ㆍ천문ㆍ지리ㆍ문학ㆍ미술ㆍ음악ㆍ기술ㆍ풍속ㆍ인물 등을 아우르는 종합지적인 성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개벽》은 창간호부터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ㆍ’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지요.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지만,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하였으며, 그 뒤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호곡장(好哭場)]”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요동벌판 하늘과 땅 사이에 뚝 트인 경계를 보고 외친 말입니다. 연암은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사신단으로 가는 팔촌형 박명원을 따라 지금으로부터 241년 전인 1780년(정조 4)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서 시작해 요동,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을 거쳐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인 열하에 이르는 6달 동안의 여정 속에 열하(熱河)의 문인들,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사귀며 그곳 문물제도를 보고 배운 것을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열하일기》를 현대어로 뒤쳐서(번역) 책을 펴낸이들은 한결같이 '세계 으뜸 여행기'라는 훈장을 달아주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행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