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은 매사에 생각, 다시 생각했다 세종은 생각하는 임금이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생각한다’는 한자로 ‘사(思), 념(念), 유(惟, 생각할 유)’ 등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속의 ‘생각’은 국역으로는 모두 45,702건인데 세종은 2,920건이 된다. 세종의 비중이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으로만 ‘생각하는 임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신하들이 상소를 올릴 때는 ‘그윽히 생각하다’[절유(竊惟)] 라는 표현을 쓴다. 더불어 ‘반복사지(反復思之)’를 쓰기도 한다. ‘절유’는 《조선왕조실록》 748건 가운데 세종 131건으로 많다. ‘절유’는 변계량의 ‘찬락천정기(撰樂天亭記)’ (세종 1/9/4)에서 쓰고 있다. ‘반복사지’는 《조선왕조실록》 모두 129건 가운데 세종조에 51건이다. 그밖에 성종 조 19건을 빼면 몇 임금에서 한 두 건일 뿐이다. 신하들도 세종의 ‘여경사지’를 닮아 몇 번이나 생각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하들의 ‘반복사지(反復思之)’에 대해 세종도 때로는 같은 말로 시작하지만 그보다는 ‘신중한 생각’ 혹은 ‘깊은 생각’을 뜻하는 ‘나는 다시 생각하건대’는 ‘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생각하는 정치의 핵심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의 소통에 있다. 소통 곧 사맛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마지막에는 사상을 교환하는 구조를 갖는다. 아는 것에는 지식과 지혜가 있다. 생활 속의 발견은 경험을 통한 지혜로 자란다. 세종 시대 사회적인 지혜는 현장의 노인, 기술자들의 경험에서 얻었다. 온 나라 곳곳에서 얻는 정보, 과거로부터의 전수, 여러 생활 현장에서 얻는 ‘생업의 앎[정보]’이다. 하나는 동적인 낱낱의 자료다. 이는 경험에서 얻은 정보이지만 지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깨우쳤기 때문이다. 이런 살아 있는 정보들이 모여 체계화 되고 한 시대의 지식을 구축하게 된다. 《농사직설》(1429)이나 《향약집성방》(1433)이 바로 이런 자료가 모여 논리체계를 갖추게 된 지식의 산출물이다. 지식은 정적이고 경(經)이나 전(典/傳) 그리고 집단 조사 등으로 쌓여 간다. 지식은 사람과 사물 사이의 소통[사맛] 곧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루어지는 산출물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세종 때 상정소나 집현전 등에서 집단지성의 모습이 보인다. 세종 때에는 이런 지식 축적 과정에 토론이 있었다. 조사와 연구가 기본이 되겠으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은 신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신하들의 간(諫)하는 말도 잘 들었다. 간이란 자기의 의견을 논리화하여 임금에게 전하는 것이다. 간하기는 사대부의 업이며 동시에 ‘직책’으로서의 의무다. 좌의정 허조의 말을 그의 졸기에서 보자. 간하면 행 :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세종실록》 21년 12월 28일) 세종은 더 적극적으로 가뭄 때에 대언들에게 간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다. 정사의 잘못된 것과 백성의 병고를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내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애휼하(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품)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그 말이 비록 사리에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죄주지는 않으리라.’ [言雖不中, 亦不加罪。](《세종실록》 1년 6월 2일) 신하들이 말하기를 주저하는 마음까지 읽어 말이 지나치더라도 간으로 하는 말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 한다. 요즘으로 보면 국회의원의 회의 중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과 같다. 세종은 듣는[以聞] 임금이었다. ‘以聞’은 《조선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공부하고 생각하는 습관은 단지 600여 년 전의 일일까? 독서의 습관은 오늘날에도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여러 책을 한번 씩 읽는 방법이 있고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방법이 있다. 다독이냐 정독이냐 하는 방법이다. 이는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보아야 하겠다. 세종은 어느 편일까? 세종의 목적은 학습을 위해서는 알 때까지 거듭 읽어야하겠지만 윤리학에 가까운 경서(經書)는 여러 번 읽으면서 그 뜻을 현실에 비치어 해석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즉위 2달째에 접어들 즈음에 대군 시절의 스승 이수를 포함해 14명을 경연관으로 하여 10월 17일부터 경연을 시작한다. 교재는 제왕학이라 일컫는 《대학연의(大學衍義)》였다. 그리고 새해 1월 들어 말한다. 읽기는 다 읽었으나, 또 읽고 싶다 임금이 말하기를, “읽기는 다 읽었으나, 또 읽고 싶다.”고 하니, 동지경연(同知經筵) 이지강이 아뢰기를, “읽고 또 읽는 것이 성의(誠意)의 공부를 다 하는 것이옵니다.” 하였다.(《세종실록》1년 3월 6일) 읽기를 마친 뒤 ‘또 읽고 싶다’고 하자, 신하는 그것이 ‘성의의 공부를 다 하는 것’이라고 호응한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이 ‘생각하는 임금’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세종은 ‘나는 모른다.’로 시작하여 학습에 충실하며, 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이때 여러 신하들에게 토론을 유도하며 필요한 일을 적합한 사람에게 맡겨 그가 업적을 이루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확신이 서는 일에 대하여는 ‘독단위지(獨斷爲之, 홀로 판단하여 행한다)’의 확신을 가지고 처리했다. 세종은 학문이 깊지만 늘 모자라고,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하며 배움에 목말라 있다. 이처럼 철학은 애지(愛知, philosophy – 지식으 알아 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실 우리 생활은 지금까지 아는 것보다 알아야할 것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세종은 말한다.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민간의 일을 다 ‘알 수 없으니’[부득진지 - 不得盡知], 만일 이해관계가 백성에게 절실한 것이 있으면, 너희들이 마땅히 모두 아뢰라.[당실계지 - 當悉啓之]” 《세종실록(세종 3년 1월 3일)》 또 세종의 정치는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더욱이 임금이라는 위치에서 사회와 떨어져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모든 것을 물어서 아뢰라’ 고 말한다. 곧 “백성의 사정이 편안하고 편안하지 않는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