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 히말라야 그늘 아래 부처를 우러르고, 종교적 믿음으로 환생을 기원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 티벳. 산 아래 사람들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산병으로 여행하기도 힘들지만 가장 낮은 자세로 하염없이 삼보일배를 행하며 살아가는 티벳. 우리 신문 최우성 사진부장은 지난 9월 30일부터 10월 7일까지 티벳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티벳의 불교문화를 생생하게 전해줄 귀한 사진들을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편집자말) 티벳의 서울인 라싸에는 '달라이라마'가 있었던 포탈라궁과 또 하나의 큰 절인 조캉사원【大昭寺(대소사) 】이 있다. 조캉사원은 티벳을 최초로 통일했던 '송첸캄포'왕이 7세기에 지은 사찰로, 그는 당나라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그녀가 모셔온 당나라의 불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캉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본래 당나라 황실가의 여인이지 공주는 아니었다. 그런데 티벳을 통일한 송첸캄포가화친하는 조건으로 당시 당나라 황제인당태종 이세민에게황제의 딸인 공주를 자신의 왕비가 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자 당태종 이세민은 처음에는 티벳왕 송첸캄포를오
[우리문화신문= 티벳 라싸 최우성 기자] 감단사(간댄사원, 甘丹寺)는 중국 티벳 자치구의 라싸시(市)로부터 4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겔룩파(Gelukpa) 3대 사원 중 한 곳이다. 4일 찾은 감단사는 해발 4200미터 고산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라싸서부터 시작된 고산병이 완전히 가시기 전이라 내심 걱정스러워 전날 김치와 고추장을 단단히 먹어둔 덕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진 감단사 가는 산길은 포장도로가 생겨 편하게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지만 도로가 생기기 이전, 이곳을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일 듯싶었다. 한국의 어지간한 절은 거의 다 가봤지만 티벳의 절들은 절벽과도 같은 고산지대에 지어놓아서 그런지 한국의 절과는 그 외형부터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공해로부터 아직 안전한 고산의 청정한 공기와 푸른 하늘,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태양빛에 반사된 짙은 밤색 지붕과 흰색 벽으로 칠해진 사원 모습은 한폭의 그림 같기만 하다. 감단사는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宗喀巴) 스님이 명나라 초기 1409년에 건립한 겔룩파의 첫 사원이다. 겔룩파 3대 사원이라하면 곧 감단사(간덴사원, 甘丹寺), 색랍사(세라사원,
[우리문화신문= 티벳 라싸 최우성 기자] 티벳의 상징으로 꼽히는 라싸 포탈라궁의 웅장한 건축물에 앞에 서니 압도되는 느낌이다. 2일 10시(현지시각) 무렵 도착한 포탈라궁은 불보살을 모신 방이 3천개인 것은 물론전체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 10만㎡에 달하며, 거대한 법궁(法宮)으로 해발 고도 3,600미터에 자리하고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고산증을 걱정해 물을 마시면서 쉬엄쉬엄 포탈라궁을 올랐다. 푸른 하늘 아래 웅장한 건축물이 하나의 성을 이룬 포탈라궁은 7세기 초 티벳 왕조 33대 왕 인 송첸캄포가 티벳을 통일하고, 637년 라싸의 홍산(紅山)이라는 언덕위에 포탈라궁을 짓게 된다. '포탈라'라는 이름은 ‘관음보살이 산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의 ‘포탈라카(普陀珞珈)’에 유래한다. 1642년, 제5대 달라이라마(1617-1682)를 왕으로 하는 티벳 왕조 간덴 왕국이 성립되는데 달라이라마는 오랫동안 훼손된 포탈라 궁전을 개축하기 시작한다. 이에 1648년에 백궁이 완성되어 티벳정부를 이곳 백궁으로 이전하게 된다. 공사는 그의 사후 1694년까지 계속되었고 1690~94년에 홍궁이 증축된다. 그러나 1959년 티벳 포탈라궁은 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창 청량산 문수사는 644년 백제 말기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 연기에 따르면 자장이 당에서 귀국하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당나라에서 기도수행하던 청량산과 같은 느낌을 받아 이곳 석굴에서 7일간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땅 속에서 문수보살이 나오는 꿈을 꾸고, 그곳을 파보니 문수석상이 나와서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자장은 이곳 청량산을 연상하여 이곳의 산 이름도 청량산이라 하고 절이름은 문수사라 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유래를 갖고 있지만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현재의 건물들로는 대웅전, 문수전, 한산전, 금륜전 만세루 요사채 일주문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전북유형문화재 제 51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문수전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52호이고 문수사의 설화를 간직한 문수석상은 문수전에 안치되어있다. 문수보살은 대승경전의 지혜보살로 경전에 따르면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나 지혜의 도리를 깨친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전에 따르면 문수보살은 깨달음의 경전이라 부르는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요 보모라고도 표현된다. 일설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기384년 인도에서 온마라난타 존자가 중국을 거쳐 백제에 처음 불법을 전해주고 절을 세운 곳이 불갑사라고 한다. 영광에는 법성포가 있는데 그 말 자체가 법(진리)의 성인(마라난타)이 들어온 포구 라는 뜻이다.그런 역사적 사연을 담아 절을 짓고, 그이름도 불갑사, 즉부처 불(佛) 첫째 갑(甲) 그래서 불갑사(佛甲寺)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갑사의 유래나이름보다는 근래 붉게 피어난 꽃무릇 때문에가을철불갑사를 찾는다. 해마다 9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무릇의 대향연이 불갑사 일주문부터 불갑사 경내와 주변 그리고불갑산으로오르는 등산로까지 가득 피어나기 때문이다. 9월 초순부터 피기 시작한 꽃무릇은 정렬의 화신인 양 붉게 피어나는데, 그 꽃잎은 가늘게 곡선으로 피어나 10여일 동안 잠시 머물다 시간이 가고나면어김없이 시들고 만다. 불교의 가르침인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을 느끼게 하면서,그래서 일찍 피어난 꽃무릇은 시들고 늦게 피어난 꽃무릇은 화사하게 피어있고, 그 중 며칠이지만 늦은 늦동이는 이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그런데 꽃무릇에는 그럴듯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깊은 절에 불도를 배우는 젊은 스님이 있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태안군 안면읍 정당리에 자리잡은 절로 1998년 새롭게 창건된 절이다. 안면암은 한옥의 형태를 갖춘 현대식 콘크리트건물로 가까이에서 보면 좀 어설픈 듯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경관과 잘 어울려, 이제는안면도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안면암은 태안만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바닷가로는 갯뻘이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작은 섬 2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큰바위섬까지는 약 150m에 이르는 곳에 뜨는다리(부교浮橋)를 설치하여 밀물 때에는 물위를 걸어 들어갔다 나올 수 있고, 썰물 때에는 갯뻘에 얹혀진 다리를 걸어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 갯뻘에는 게와 조개들이 살고 있어 썰물때 게들이 집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갯뻘체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때 기름유출사고로 모든 생명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안면암에서 뜬 다리를 걸어 들어가면 바다에는 부상탑(물위에 뜨는 탑)도 있는데 이 탑은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에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와 삼성중공업의 해상 크레인이 충돌하여 기름유츨로 한국에서는 가장 큰 해양오염사고가 발생하여 고통받는 안면도 주민들과 함께 전국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바닷가의 바위에 묻은 기름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894년 고종 31년 충남 공주시 금학동과 주미둥에 걸쳐 자리잡은 우금치 고개에서는 죽창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우금치 전투가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필연은 조선정부의 부패와 무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정부는 부패와 무능을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상실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어났던 1차 동학농민군과 전주에서 화약(1894년 5월 8일)을 맺어 한 때 나마 전라 경상 충청지역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행정을 실현하며 평화로운 시대가 되는 듯 하였다. 집강소에서는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지방관의 도움을 받아 실천하는 등 농민과 지방관청의 민주적 협조행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실시한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로 화해하여 공동으로 서민정책에 협력한다. 둘째,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한다. 셋째, 횡포한 부자들을 엄중히 처벌한다. 넷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처벌한다.. 다섯째,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 여섯째, 천민 차별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백성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무성서원이 있다. 무성서원은 신라 후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고운 최치원이 이곳 정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던 인연으로 이곳 사람들이 그의 선정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하여 세운 최치원의 사당 '태산사'를 짓고 위패를 모시고 그의 학문을 그리며 유학을 공부하는 도장으로 세운 서원이다. 최치원을 모신 사당이 '태산사'라 이름한 것은 이곳의 옛 지명이 '태산현'이었기 때문인데 이곳 사랃들은 옛부터 '태산사'라는 사당을 짓고 그의 선정에 감사하며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 전국의 각지역에 유학의 큰 스승을 모시고 그 지역의 사립학문의 전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곳 사람들이 그를 모신 사당 태산사를 중심공간으로 하여최치원을 이곳 유학의 종조로모시고자 하여 세워진 서원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은 1544년 퇴락한 옛'태산사' 사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고운 최치원 외에이곳에서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을 함께 모셨으며, 이 외에도 정극인, 송세림, 정언증, 감약묵, 김관을 함께 모시었다. 무성서원은 그 규모는 크리 크지 않아 아담한 편이며, 서원의 권위를 높이고자 숙종으로부터 직접 헌판에 붓글씨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의 최대국난기 민족의 생존을 지켜낸 성웅 이순신장군을 모신 또 다른 사당인 정읍의충렬사(忠烈祠)를 찾았다. 정읍 충렬사는 다소 생소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 정읍이 현으로 승격되고 난후처음 현감으로 재직한 곳이기에 정읍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정읍시민들은 그의 선정으로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을 감사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군민들이 돈을 모아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충렬사 건립에 대한 논의는 8.15 광복이 되자 시작되었는데,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하여 창건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전라북도 학생들 및 각계의 성금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8월 공사를 착공하였으나, 6.25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뒤 1963년에 이르러 가까스로 준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렬사 본당만 건립되었을 뿐 사당을 감싸는 담장과 삼문 선양류 등은 그 때 세우지 못하고 하나 하나 세워나가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충렬사 경내에는 대로 변에 홍살문과 선양루가 있었고, 이를 지나 충렬사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계단위에는 솟을 삼문이 있다. 삼문을 오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상주 천주산에는 북장사(北丈寺)가 있다. 북장사는 신라 후기인 흥덕왕 8년(833년) 진감국가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사적기에 의하면 산 위에는 수미굴(須彌窟)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저절로 생긴 돌기둥이 아래는 좁고 위로는 넓어 마치 하늘을 떠 받들고 있는 기둥처럼 보여 산의 이름을 천주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천주산에 의지하여 터를 잡은 북장사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국찰로 여러 엄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1624년 중국에서 온 스님 10여 명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650년 (효종1년) 화재와 1657년 또 한번의 불로 절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본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재창건하였다. 이후 1663년 (현종1년) 여행(呂行)스님이 극락전을 착수하여 8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하고, 차츰 다른 건물들도 세워나갔다. 이렇게 세워진 북장사의 건축물들은 대향로전, 소향로전, 백련당, 향적전, 육화당, 삼강실, 황학루, 한송당, 명부전, 삼성각 등이 있는데, 산 중턱에 경치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각들의 규모가 무척 큰 편이나, 찾아오는 신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