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도 연못의 얼음판 위에서추운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 . 강화 갯벌에는 각종 게와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새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저어새는 멸종위기종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강화 갯벌이 저어새의 보금자리로 알려져 있다. 저어새는 새의 부리가 마치 주걱처럼 생겼고, 그 부리를 물속에 넣고 이리 저리 저어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습성이 있어, 저어새라는 이름이 붙었다. 1990년 문화재청에서 강화군일대 저어새 번식지로 추정되는 강화갯벌을 천연기념물 419호로 지정했다. 여의도의 53배에 해당하는 약 435,016,325㎡(약 1억 4천만평)의 강화갯벌을 지정한 것이다. 강화 갯벌 주위에 살던 사람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사람만을 위한 자연은 아니라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렇게 결론지었다. 겨울철은 갯벌도 얼어붙어 철새는 날아가고 얼어붙은 호숫가에 아이 어른들의 얼음지치는 모습이 정겨웠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추위가 몰려와 바다도 얼어붙었다. 우리나라는그리 춥지 않아 바다가 얼어붙는 일은 없어 보이지만서울에서 가까운강화도 포구가 얼어붙었다. 추운 겨울, 바닷물이 얼어 붙어 배들이 묶여있는 모습을 보니 엄동설한 추위가 실감난다. 물 위에 뜬 배가 아니라 눈과 얼음 위에 갇혀있는 배는한폭의 서양화 같다.그래, 겨울 한파에 배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쉬듯이, 그 배를 움직여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이 참에 푹 쉬었으면 싶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그 근거가 될 만한 유물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고 그의 사리탑이 있게 되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때는 200여칸에 달하는 전각들이 있어 대찰이기도 하였으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을 근처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삼아 조선시대 불교의 맥을 이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기에 그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한편 신륵사(神勒寺)의 이름에 대한 설화는 남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부처님의 가피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 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의 명성을 높게하는 계기가 된 懶翁(나옹) 惠勤(혜근)스님은 고려후기인 忠肅王(충숙왕)7년(1320) 1월 15일에 태어나, 아직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겪은 뒤 20세 되는 해 공덕산 妙寂庵(묘적암)으로 了然(요연)선사를 찾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얼마동안 요연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던 나옹은 요연선사와의 선문답으로 인가를 받고 요연선사로부터 더 큰 깨달음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 겨울 수원 화성의 성곽을 돌아보았다. 화성의 남북으로 수원천 냇가에는 화홍문이 설치되었고, 한국의 정자중 가장 복잡한 구조를 한 방화수류정이 화성의 북쪽 높은 위치에 있다. 이 방화수류정은 평시에는 경치를 즐기는 정자이나, 전시에는 성의 종합 지휘소가 되게 설계하였다. 평시에 돌아본 수원 화성은 경치좋은 방화수류정의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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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새봄이 되면 가녀린 싹을 움티워 무성한 잎이 연못을 다 덮고, 한 여름철이 되면 연못 가득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향기를 멀리멀리 보내던 연꽃들의 겨울나기 입니다.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유는 가을철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그 열매가 비어있다면 그 연꽃은 실패한 것입니다. 겉이 화려하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튼실해야만 성공이라 할 것입니다. 정유년도 저무는 오늘 독자여러분은 얼마나 튼실한 열매를 맺으셨는지... 혹시 저무는 정유년에 조금이라도아쉬움이 있다면, 다시 한 해가 시작하는 무술년 개의 해에는튼실한 열매를 꼭 맺으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조선조 후기에 세웠지만 세계문화유산이 된 수원화성 가운데서오늘은화성 동쪽에 있는 연무대와 동북공심돈 그리고 창룡문을 소개해본다. 조선 후기 마지막 조선의 문화를 꽃피웠던 정조는 한양의 기득권 대신들이 옥죄고 있었기에 이를 벗어나 자신이 꿈꾸었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신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정조는 할아버지에 의하여억울하게 죽어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성의 융릉에 이장하고, 지금의 융릉 근처에 살던 화성주민들을 신도시 화성으로 이전하여 살도록 하였다. 그런 계획으로 신도시는 번개처럼 시작하여 번개처럼 끝났다. 시작부터 끝나는 날까지 그 기간은 단 2년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동안 성을 쌓고 행궁을 짓고, 성벽 주위에 문루를 세웠다. 화성의 남북으로는 2층의 성문누각을 세웠고, 동과 서에는 1층의 성문을 세웠다. 이 모든 공사를 2년 6개월에 미무리했고, 주민들까지 그 터전을 이전하게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화성은 그렇게 완성되었지만, 나라가 쇠하고 망하게 되자,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벽도 허물어지고 건물들도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다시금 복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깊어가는 연말 안면암에는 밀물과 썰물에 뜬다리와 뜬탑이 여전히 걸려있다. 뜬다리는 밀물시에는 이처럼 떠 있다가 썰물이 되면 갯벌에 내려앉는다. 뜬다리는 파도에 출렁거리지만 빠지지는 않는데 그래도 출렁이는 다리를 걷기는 쉽지가 않아 두사람이라면 반드시 손을 잡고 걸어야만 그나마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 태안 유류운반선의 침몰로 온통 오염되었던 때가 2008년 초,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어 썰물시에는 갯벌에 각종 조개와 게들이 나들이하며 생명의 노래를 불러댄다. 안면암의 뜬탑은 유류운반선의 침몰로 사라져간 뭇 생명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안면암 스님들과 신도들이 직접 건립했다고 한다. 안면암에는 다른 절에 견주어 보다 화려한 용왕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때 정림사지오층석탑을대당평백제탑(大唐平百濟塔), 줄여서 '평제탑'이라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전승기념으로 세운 탑으로 잘못 알려졌던 적이 있다. 그렇게 잘못 알려졌던 이유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4면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자화자찬하며그렇게 쓴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여는 7일 밤 낮으로 불탔다고 한다. 그리하여 목조로된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로지 돌로된 이 탑만이 부여 한 복판에 자리 잡았는데, 이 탑의 기단부에 소정방은 자신의 전공을 새겨넣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간 정림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절이ㅣ었다.폐허가 된 채 오랜 세월이 지나자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다가 근래발굴조사 결과 기와조각에서 정림사라는 문구가 발견되어 그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정림사는 백제시대 정형화된1탑 1금당식의 정연한 가람배치 구조를 가진 사찰로 탑과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주요 건물들을감싸는 회랑(복도를 갖춘 궁궐의 구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탑은 돌로 된 것이나, 그 구조는 목조로 지은 탑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붕돌이 넓고 길게 밖으로 나와있고, 지붕 아래 처마는 공포를 번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에는 삼국시대 신라의상대사와 관계된 많은 절들이 있다. 의상스님은 원효스님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최고 학파라 할 수 있는 화엄종의 최고봉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대스승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원효와 의상은 수많은 절들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한국에는 의상대사와 관계된 많은 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부석사라는 절이 두곳 있는데, 하나는 영주 소백산줄기에 있는 봉황산부석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서해가 보이는 서산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가 있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는의상대사가 창건하기도 하였지만, 현재 한국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무량수전)이 있어서 더욱 유명한 절이 되었고, 서산의 도비산 부석사 또한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있으나, 조선조임진왜란 전란으로 모든 전각들이 불에 타고, 전각들을다시 지은 절이기에 영주 부석사에 견주면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라는 절의 이름의 유래는 영주 부석사나 서산 부석사나 거의 같은 유래가 전해진다. 부석사의 유래에 대한 것은 부석사내 안내판의 글로 대신하고 부석사내 전각들의 이모저모와 의상대사의 공부하는 모습과 선묘낭자 그리고 부석사를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