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태안사는 전남 곡성에 있는 고찰이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 세분의 스님에 의하여 개창되었으나, 이후 문성왕 9년(847) 혜철국사(적인선사)가 선종사찰로 새롭게 개산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형성하였다. 그뒤 고려초 광자대사가 머물면서 대규모 사찰을 이루었고, 동리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안사고 동리산문의 종찰로 송광사 화엄사도 태안사의 말사였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다. 창건당시부터 고려까지는 대안사(大安寺)였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태안사로 이름을 고쳐부르게 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대웅전도 불에타고 말았다. 현재의 대웅전 등 전각들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태안사 경내에는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국사(적인대사) 사리탑과탑비, 그리고광자대사탑과 비신이 없는 탑비가 있으며, 그 밖에도 대바라 등 보물이 3점 더 있다. 신록이 우거진 여름이면 절 입구에서부터 2.5km에 이르는 진입로가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져, 그야말로 속세를 떠난 피안의 세계를 찾아가는 듯 깊은 맛이 있으며, 새로 건립한 일주문을 지나면, 계곡을 가로질러 능파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괘불은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그린 큰 그림이다. 괘불은 평시에는 족자처럼 돌돌 말아서 대웅전 내부 또는 대웅전의 뒷편괘불함에 보관한다. 그러다가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이를 괘불대에 높이 걸어 놓고 쓰다가 행사를 마치면 다시괘불함에 보관해 놓는다. 괘불대는 대부분 대웅전이나 극릭전 등 절의 가장 큰 법당의 앞에 설치되어있다. 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리는데, 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그린다. 그때 그곳에 모였던 석가모니부처님의 10대제자와많은 보살들과 천신들 그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수호한다는 사방의 신(사천왕) 등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생을 살피는 약사여래와 다음 세상에 중싱들이 가고자 하는 아미타여래가 홀연히 나나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증명하고 함께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곧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과 보살과 신장 등이 그림 가득히 채워져있다.용흥사 괘불은 가운데는 설법하는 부처님 모습이고, 한쪽에는약사불 모습으로 약사불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는 뜻이며, 또 다른 한쪽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인 아미타불로, 세상에서 명을 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양 사람들이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식민지 개척을 한 곳은 인도였다. 그런데 인도를 가려면 이교도가 살고있는 중동지역 아라비아를 거치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먼 항해를 해야만 했다. 이는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새롭게 알게된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멀리 남쪽 끝까지 돌아가느니, 차라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그곳에 인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첫번째 성공한 사람은 콜럼버스였다. 콜럼버스는 포루투갈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여, 신대륙을 발견하면 그곳에서 금은 보화를바치겠다고 약속하고 후원금을 받고 바다를 횡단하였고, 결국 지금의 서인도제도에 도착하였다. 실제로 그곳은 인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신대륙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인도로, 이전에는 동쪽으로 가야 갈 수 있었던 인도가 아닌, 서쪽으로 가서 찾은 인도라 하여 서인도제도라고 이름붙였다. 그렇게 발견된 아메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진은 해남과 가까운 지역으로 백제시대에는 해상교통이 발달한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 까닭으로 백제시대부터 명당터에는 절들이 들어섰었는데, 무위사도 그런 절이었다. 사찰의 유래를 적은 '무위사지'에 따르면 무위사가 처음 창건된 때는 신라 진평왕 39년(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그 때 이름은 '관음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617년은 이곳이 백제의 땅이었고, 또한 617년은 원효대사가 태어난 해이기 때문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면 그 창건 연대가 적어도 650년은 지난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창건 뒤 무위사는 헌강왕 원년(875) 신라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라고 했다하며, 고려초기 정종 원년(945) 선각대사가 3창하여 그 이름을 '모옥사'로 고쳐불렀고, 이후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선사가 4번째 중창하고, 그 이름을 '무위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위사는 역사가 오래된 고찰임에는 분명하나, 그 창건유래와 중건의 인물들에 대하여는 아쉽게도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3차 중창주인 선각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보림사는 서울의 정 남쪽에 있다는 정남진 장흥의 고찰이다. 보림사는 759년 창건한 절로 창건당시에는 화엄종의 사찰이었다. 처음 창건한 스님은 원표스님으로절의 이름은 가지산에 있는 절이라하여'가지산사' 였다고 한다. 그런데 창건 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신라에 선종을 처음 도입했던 '도의선사'의 제자였던 '보조국사' 채징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제자를 가르치다880년 입적한 뒤, 신라 헌강왕이 절의 이름을 '보림사'로 내려주어 절의 이름도 바뀌고 선종의 대찰이 되었다. 보림사란 이름은 중국에서 선종을 크게 퍼트린 육조 혜능대사가 주석하던 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가지산사의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의 고승 원표스님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한국 땅에도 서기가 어린 것을 참선 중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팔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아 헤메다가, 어느날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는 중, 신선이 나타나 자기가 살고있는 못에 용 9마리가 판을 치고 있어 살기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그말을 들은 원표스님은 부적을 그려 연못 속에 던지니, 못속에 살던 8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보성군 대원사 앞에는 티벳불교의 모습을 재현한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보성 대원사의 현장스님이 오랫동안 수집한 티벳의 불상 보살상탱화 등과 각종 불교용품과 민속품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밀교인 티벳불교의 특징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고 다양한 모습들을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 전시물들로 현실속에서 오로지 삶만을 생각하고 죽음을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전시품들이있다. 또 불교의 세계관에서 사후세계에대한 개념은 같다 하더라도한국의 불교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도 있어 꼭 한 번은 들려볼 만하다고 하겠다. 티벳불교에서는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는데, 이책의 저자는 8세기 인도의 밀교수행자였던 파드마삼바바로 인도의 탄트라 불교를 처음 티벳에 전한 인물이라고 한다. 《사자의 서》에는 살아있는 그 어떤 것도 개별적 실체는 없으며, 오직 마음만 실재한다고 한다. 세계는 마음의 결과이며, 마음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한다. 수행이 깊어져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면 현실속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실재가 아닌 변화무쌍한 환영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공주시에 있는 마곡사는 640년백제 무왕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당시는 백제땅이었을 것인데, 어찌 신라의 고승이 창건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마곡사지에는 그렇게기록되어있다. 신라말에는 도선국사도 중수에 힘을 보탰으며, 이후 고려 명종때인 1172년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 힘쓰며 정혜쌍수를 주창한 보조국사 지눌이 거하면서중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들러 영산전 편액을 써준 일도 있다. 신라 통일기 자장율사가 창건 당시에도 마곡사는 주존건물이 30여칸의 불전이 있는 큰절이었으며, 현재는 중심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이 있고, 경내에는 근세에 지어진 대웅보전,조선 중기에 지어진 영산전(보물 제 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과, 대광보전 앞에는 오층석탑(보물 제 799호)와 범종, 괘불, 세조가 탔던 가마, 청동향로 등 많은 문화재도 있다. 많은 보물 중 사찰 경내중심에 있는 오층석탑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식의 탑이기도 하다. 또 대광명전의 뒷편 언덕 위에는 중층으로된 대웅보전이 있는데, 한국의 절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명승에꽃지의 해넘이는 반드시 들어간다. 태안반도 꽃지에는 바위섬이 2개 있는데, 하나는 뾰족하고 하나는 넓적하다. 그 때문에 뾰족한 바위섬은 든든한 할아버지섬으로, 넓적한 바위섬은 후덕한 할머니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수만년 파도를 맞이하면서도오늘의 모습으로 다듬어져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어, 한국의 명승지로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절경은 두 바위섬 사이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두 바위섬 사이로 해넘이가 생길 때는 가을이 깊어진 10월 부터 다음해 2월까지로, 이 때가 되면 전국의 사진가들이 매일 수백명씩 몰려든다. 8월말은 아직 두 섬 사이로 해넘이는 안되지만, 그래도 두섬과 등대와 구름이 이루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을까 싶어, 지나는 길에 꽃지를 찾았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인지라 하늘의 구름도 좋을 것 같고, 태풍이 바다안개를 맑끔히 거두어줄 것 같기도 하고 . . . , 기대반 우려반 설레는 마음으로 찾은 꽃지였다. 그런데 그 기대가 헛되지 않아 오늘은 수평선에 바다안개[海霧]도 없어 아름다운 오메가(Ω)를 아낌없이 보여주어 잠시지만황홀한 일몰경에 빠져들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양평 용문사는 오래된 은행나무로 유명하다. 이 나무는 수령 1100년이 넘는 나무로, 그 높이가 42m 에 이르고, 둘레길이는 14m(반지름이 4.0m정도임) 에 이른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이전이란 800년대 후반으로 신라의 말기에 해당한다. 용문사 창건에 대하여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천년사직이 망하는슬픔에 전국을 떠돌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의상대사가 지팡이로 쓰던 것을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나 거목이 되었다고도 한다.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면 그 수령은 1300년이 넘는다. 이 나무가 살아오는 동안 이 땅에는여러 차례 큰전란이 있었다. 크게만 보아도 고려시대 거란족의 침략과몽골의 침략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임진왜란이 있었으며, 근세에는 일제강점기 의병투쟁과 1950년 한국전쟁이 있었다. 그런 전란에 용문사 내 전각들은 불타버려 여러 차례 전각들은 중건이 되었지만, 이 은행나무는 굳게 살아서 그 광경을 다 지켜보았다. 이 은행나무는 현재 사천왕문 바로 위에 있어, 천왕문이 없을 때에도 절을 지키는 천왕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남쪽 시흥시 관곡지는 광활한 논에 연농사를 짓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이곳은 벼농사를 짓던 논이었으나, 특용작물로 연농사를 짓게 되면서, 주변이 모두 연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주변이 모두 개발되고 있어 언제까지 이곳이 연꽃밭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연꽃밭일 때 많이들 가보시길 권해본다. 연은 농부의 손이 많이 안가면서도 소득은 벼농사에 못지 않아, 벼농사를 짓는 것보다 오히려낫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화사한 연꽃과 향긋한 연향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벼는 열매만 먹는 것이지만, 연은 뿌리, 잎, 꽃, 열매 모두를먹는 작물이다. 연꽃이 피기전에 딴 연봉오리는 잘 말려서차로 우려내 마시며, 넓은 연잎은 잘게 잘라 덕어서 차로 가공하거나, 가운데 쌀을 넣어 찌면 은은한 향기 밴연잎밥을 짓는데 쓴다. 연뿌리는 연근조림으로 먹기도 하고, 약재로도 쓰며, 연뿌리를 가루내어 김치를 담그면 김치가 쉽게 무르지 않고, 오랫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연밥은 옛부터정신적 안정에 필요한 약재로 연자(蓮子)라고 부르며 쓰고 있다. 진흙속에 뿌리를 두고 물위로피어난 연꽃은 세상을 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