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천안하면 누구나 호두과자를 떠올린다. 그만큼 천안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어, 고속도로로 근처를 지날 때면 누구나 휴게소에서 호두과자 한봉지는 사먹고 오르내리지만, 그 호두나무가 처음 자리한 곳이 광덕사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호두나무는 한국 토종나무가 아니고, 외국에서 전래된 나무이다. 호도(胡桃)라는 나무의 이름속에 이미 이 나무가 토착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나무의 이름이 호두나무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는 호두가 표준어지만 원래호도(胡桃)란 말 그대로 '북방 오랑캐 나라의 복숭아'라는 뜻이다. 호두와 복숭아씨를 비교해서 살펴보면, 호두는 주름진 열매가 공처럼 둥글고, 복숭아씨는 타원형에 납작하다. 그러나 그 형태가 비슷하여, 비슷한 나무의 일종이기에사람들은 본래 이땅에 없던 복숭아종류의 나무로오랑캐 나라에서 왔다고 호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호두나무가 한국땅에 전래된 시기는 몽골 징기스칸이 세계를 휩쓸던고려 후기로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원나라로부터 많은 문물이 들어올 때였다. 그 때 류청신이란 사람이 충렬왕 16년 (1290)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김룡사는 문경지역에 있는 꽤 큰 사찰이다. 문경지역은 주변에 산이 많아 옛날에는 교통이 무척이나 불편했던 곳이나, 그럼에도 불편한 교통은 장애요인이 아니라 수행처로는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되어왔고, 그런 이유로 문경에는 이름있는 절들이 여럿있다. 김룡사도 그런 사찰이다. 김룡사의 유래를 보면, 창건은 신라 진평왕 10년으로 서기 588년에 운달(雲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며, 처음의 절이름은 운봉사(雲峰寺)였다고 한다. 산이 높아 구름이 봉우리에 늘 서려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운봉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는 바가 없다. 이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운봉사에 대한 많은 기록과 전각들이 모두 불타버림으로써 차츰 잊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빈터였던 이곳에는 인조2년(1624), 김룡사가 다시 중건 되었고, 이후 여러 스님들이 피땀으로 중창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김룡사의 절 이름에 대하여는 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옛날 문경의 부사로 김(金)씨 성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그가 모함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이 산에 숨어 살게 되었는데, 혼자 숨어 사는 도중 운달산 속에서 선녀처럼 예쁜 처녀를 만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는 300여년을 자랐다는 소나무가 있다. 그 모습이 일반 소나무들과는 너무도 달라, 처음에는 쓸데가 없어서 살아 남았고, 세월이 많이흐르고보니, 이제는 다른 나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오묘한 품격을 갖추어 이제는 마을의 보물이 되었다. 그 나무의 가지가 갈라져 자라면서구부러지고 펼쳐져그 형상이춤추는 듯 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춤추는 소나무(舞松)라 부르게 되었고, 그 아래는 그늘이 드리워져마을 사람들의 정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소나무에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한특별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 문경은 예로부터 풍수적으로명당터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높은데, 그 많은 명당 중에서도이 근처에는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는 명당터가 있었다고 한다. 연주패옥(連珠佩玉)이란 명당에 무덤을 쓰게되면 그명당 음덕에 후손들이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와,옥관자 서말, 금관자 서말에 해당하는 관직을 얻어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대대로 누린다는큰 명당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으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思忠)이살기좋은 이곳 조선에 살고자 귀화하였다. 그는당시 조선의 문신인 '정탁'으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있어 농업을 주 산업으로 생활했던 옛날에는 논농사지을 수 있는 평야지역이야말로 누구나 살고 싶은 곳이었다. 조선의 평야지역은 서남해안으로 펼쳐진 전라도였고, 그 전라도가 조선사람들을 먹여살렸다. 그런데 이곳 무주는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동쪽으로 흘러 금강산 설악산으로등줄기처럼 뻗어내려 태백산 소백산을 지나 지리산까지 흘러가는 도중 덕유산자락에 솟아났다.지역적으로 이곳은전라도와 경상도가 경계가 되는 산간지역으로 한국에서는 그 어느지역에 못지않게 두메산골로 유명하다. 이곳 무주가 속한 곳을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를 줄임말로 임산자원이 풍부하다는 뜻도 있음)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이처럼두메산골이기에 조선왕조시대 왕조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왕들의 재임동안 모든 통치기록을 자세하게 기록한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장소로 선택되어, 이곳에 적상산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왕조실록의 제작과 보관에 대한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후 기록하기 시작한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에 한양도성에는 춘추관사고를 시작으로,충주에 개천사사고, 전주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원주 치악산 구룡사는 1350년의 창건역사를 간직한 절이다. 구룡사는 의상대사가 668년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본래 이곳은 9마리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절을 지으려 하자, 이곳에 살던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하여 천둥과 함께 폭우를 내리게 하여 산을 온통 물로 다 채웠다. 그러자 의상대사는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연못속에 던져넣었는데순식간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리고, 이곳에 있던 9마리 용 가운데한마리가 갑자기 눈이멀어버렸다고 한다. 나머지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9마리의 용이 살던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하여, 절이름을 구룡사(九龍寺)로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구룡사에는 많은 고승들이 거쳐갔다. 신라말 도선국사, 고려말 무학대사, 조선중기 서산대사 등이 잠시나마 머물다 갔기에, 한때는 강원도 영서지방의 고찰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원주 지역의 큰 절이었던 법천사, 홍법사 등과 같이 구룡사도 사세가 기울었다. 어느날 풍수를 볼줄 아는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운이 쇠해졌으니, 그 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괴산에는 꼭 가보아야할 천년고찰 공림사가 있다. 공림사는 낙영산에 의지한 사찰로 그 연원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낙영산은 산전체가 기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골짜기에는 공림사를 감싸안고 있다. 낙영산의 바위틈에는 자생하는 나무와 들풀들이 뛰어난 생명력으로 산전체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되었다. 공림사의 사적비에 따르면 공림사는 신라 48대 경문왕때 자정선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자정스님명성이경주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져 신라왕실은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입궐초빙과 국태민안 법문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정선사는 세속을 떠난 납자(출가한 스님을 뜻하는 말)로 다시 세간에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왕은 이런 선사의 겸양과 덕에 더 감동하여 이곳에 왕명으로 특별히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공림사(公林寺)라 하였다. 그 뒤 공림사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자세하게전하지 않고, 조선 2대 정종 2년(1400년) 금강경에 훌륭한 주석서를 낸 함허당 득통화상이 이곳에서 수도정진하였다고 한다. 이처럼공림사의 역사는 계속되었고, 조선의 최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고려시대 융성했던 청룡사터 보각국사 승탑, 석비, 석등을 찾아보았다. 보각국사는 고려말부터 조선초 격동기에 불교를 이끌었던 고승이다. 보각국사는 고려말 공민왕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으며 타락한 권승들이 판치던 시대에 청정행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던 스님이다. 그는한때많은 국사를 배출했던 순천 송광사의 주지를 지냈으나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들어서자, 충주 두메산골인 이곳 청룡사에 들어가 더 이상 속세로 나가지 않고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 보각국사의 행적은 기록이 소실되어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으나, 그 행적을 기록한 대리석 탑비가 이곳 승탑 뒤에 세워져 있고, 비석의 앞뒤로 삶의 내용이 가득 새겨진 것으로 보아 당대 고승으로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던 스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격동기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그분의 구체적인 행적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보각국사 이후 조선조에 들어 융성했던 청룡사는 폐사되고, 웅장했던 건물들도 모두 사라졌다. 주춧돌마저 땅속에 묻혀 이곳이 청룡사였다는 증거는 오로지 보각국사의 승탑과 석등 그리고 탑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최근 문화재당국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주호가 내려다 보이는 제천 금수산에는 작은 절 정방사가 있다. 정방사 사적에 따르면, 본래는 이곳에는상 중 하 3개의 암자가 있었는데 정방사는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암자라고 한다. 정방사의 창건은 통일신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무왕 2년(662) 의상대사의 제자인 정원스님이 창건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흔적은 찾을 수 없고, 그 설화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있다. 정원스님은 십여년을 수도처를 정하지 못하고 전국을 두루 만행하다 제행무상을 깨닫고, 스승인 의상대사에게 자신의 수행처로 어디가 좋을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의상대사는 "내 지팡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암자를 짓고 불법을 널리 펴라."는 말과 함께, 그 산아래마을에 윤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을 것이니 그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면 될 것이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정원스님은 의상대사가 던진 지팡이를 따라서 여러날 산넘고 물을 건너 지금의 금수산 정방사에 이르렸는데 이때의상대사가 던진 지방이가 땅에 내려 앉았다. 이에 사방을 살펴보니 주변이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있고, 앞으로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으며, 뒤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한국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인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천태종은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 불교경전 중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단이다. 대승불교란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목표로 깨달음과 중생교화를 목표로 한다는 뜻이며큰수레를 뜻하는 대승이라하고 반면에자기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종파를 소승이라 한다. 천태종은 위진남북조의 큰 혼란기를 지나 통일중국을 이끌었던 수나라시절 천태산(天台山) 지자대사(智者大師)라 불리던지의 (智義)스님이 500년대 후기에 세운 대승불교의 한 종파였다. 천태종은 지자대사가 천태산에 머물면서 가르침을 폈기에 그가 머물던 산의 이름을 종단의 이름으로 붙여 천태종이라 하였다. 천태종과 같은 묘법연화경을 수행과 교학의 목표로 한 한민족에 전래를 살펴보면,백제시대 현광스님이 법화경을 들여와 법화삼매를 깨달아 법화경교를 전하였다고 하며, 신라의 연광스님은 수나라 천태산 지자대사로부터 천태교학을 배우고 돌아와 법화경을 강의하고 신앙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시대 스님들의 천태계 법맥은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청곡사는 879년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국사는 신라말 풍수지리사상을 연구하여 이 땅의 좋은 명당터를 잡아 많은 절을 세웠는데, 진주 청곡사도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창건 후 500여 년이 지난 1380년에 이르러고려 우왕 6년에 남원 실상사의 상종스님이 크게 중창하였으나 조선의 숭유억불 시대를 거치면서사세가 기울어져 갔다.특히조선 중기 전국토가 병화의 전란으로 빠져들던 임진왜란을 당해 1592년청곡사는 완전 불에 탔다가, 정유재란이 끝난 뒤1602년에야 다시 명맥을 이어갔다. 그뒤 10년이 지난광해군4(1612년)때에 이르러현재 모습의 대웅전을 중건하여오늘에 이른다. 청곡사 대웅전은 비록 전각이 크지는 않지만, 1612년 중건하여 400여 년을 이어온 역사를 지녔고현재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값진문화재이다. 그러나청곡사의 최고보물을 꼽는다면 뭐니뭐니해도 대웅전 안의 국보 제302호 괘불이다. 또 청곡사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목조 범천과 제석천상이 있는데, 이 들 또한 그 희귀성과 작품성이 뛰어나 보물 제1232호로 지정되어있다. 대웅전도 곧 보물급으로 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