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 기슭에는고즈넉한 천년고찰 삼천사(三千寺)가 자리하고 있다.삼천사에는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보물 657호)이 있는데 추운 날씨에도 신도들이 찾아와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마애여래입상은 삼천사 경내 대웅전의 위쪽으로 30m 지점 계곡의 병풍바위에 새겨져 있으며조성시기는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로 추정된다.전체 높이는 3.02m, 불상 높이는 2.6m에 달한다. 살짝 뜬 눈은 눈꼬리가 귀 가까이 닿아있으며, 두툼한 코와 연속된 양 눈썹 사이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뚫려있다.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1) 원효(元曉)대사가 개산(開山)한 절로 1482년(조선 성종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으며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1592년(조선 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였다. 그러나전쟁 중에 절이불타버리는 불운을 겪었다.훗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 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를 다시 복원하였다. 1970년대 들어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무릇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잘 알것이다. (뒷 줄임) 이는민영환 유서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 가운데 일부이다. 민영환은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을 강탈당하자이를 비분강개하여 11월 30일 45살의 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의 길을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나라이름을 변경하고 황제국을 내세웠으나, 새로 세운 나라의 앞길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힘없는 대한제국은 일본 청나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러시아에까지 일본에 항복하고 말았고, 대한제국은일본의 을사보호 강제조약으로 나라의 외교권마저 박탈당하자, 민영환은 을사조약파기와 그 앞잡이였던 오적처단을 주장하며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국 더 이상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민족과 국가에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며자결로써 나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화성 용주사(龍珠寺)는 신라 854년인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로 처음에는 갈양사(葛陽寺)였다고 한다. 그러나 952년 고려 광종 3년 병란으로 소실되어 옛 영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절이 오늘의 용주사가 된데는 조선 제 22대왕인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장현세자)의 능을 이곳에 옮긴 뒤, 1790년 갈양사 자리에 장현세자의 융릉을 돌볼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면서부터 다시금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정조는 이 절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금을 모금하여 팔만칠천냥의 돈을 모았고, 이로부터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절을 완성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 연유로 절의 이름을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주사가 중건되고 용주사는 팔도의 모든 사찰을 통제하는 총본부가 되었다. 유교를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이렇게 용주사를 중건한이유는살아서 효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죽은 뒤에라도 명복을 빌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정조는 용주사 건립을 통해 죽은 아버지가아미타극락정토에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이다 용주사는 그 중창주인 정조가 자신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사람과 관계된 동물 가운데 가장 친근한 동물은 개다. 개는 본래 야생으로 늑대와 같은 종류였으나, 사람에게 생포되어 야성을 잃고 대신 사람의 친구가 되고 사람을 지켜주는 호위병이 되었다. 이런 개는 친구일 뿐 아니라, 위급할 때에는 사람을 구하는 충직성을 보여주기도 하여, 각 지역마다 충직과 의리를 잘 지켜 죽은 뒤에 그 지역의 상징과도 같은 동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 우리나라에는천리길을 돌고돌아 진도로 찾아온 '진도 충견'과 술에 취해 죽게 된 주인을 구하고 자신은 결국 죽고만'오수 충견'이 있다. 올해는 무술년(戊戌年)으로 '황금개띠의 해'라고 한다. 황금은 동양의 오행사상으로 볼 때, 무(戊)기(己)가 중앙을 뜻하며 중앙의 색이황금색이기 때문에 올해를 황금개의 해라고 하는 것이다. 조상들은 이런 개에 대하여 개의 좋은 습성에, 좋은 의미를 부여하여 개에게도 오륜이 있다고 하였다. 탈춤의 가사 중에 개의 오륜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털의 색이 서로 비슷하니, 부자유친 둘째, 주인을 알아보고 짓지 않으니, 군신유의 셋째, 한마리 개가 짓으면 동네 개들이 모두 짓으니, 붕우유신 넷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기념으로 한국, 일본, 중국이 공동으로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한국·일본·중국” 특별전을 열고 있다. 호랑이는 맹수 중에 가장 무서운 동물로 사람들을 해치는 동물이지만, 한국의 호랑이 그림을 보면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친근하여 애완동물과도 같으며, 사람을 위협하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신과도 같은 동물의 왕으로 그려졌다. 이번 전시는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 ‘수호랑’이 백호(白虎)의 상징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동아시아에서 호랑이 미술의 전통과 변용이라는 주제로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 중국의 국가박물관이 공동으로 열고 있다. 1월 26일부터 3월 1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국의 김홍도(1745~1806)의 <호랑이> 등 40건과, 일본 에도시대의 <용호도> 대형 병풍 3쌍 등 30건, 그리고 중국의 고대 호랑이 장식 꺾창과 십이지도용 등 35건이 출품되어 총 105건이 전시되어 있다. 고대 원시신앙과 이후 도교와 불교의 미술에 보이는 수호신으로서의 호랑이, 생활 속에서 벽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대관령에 있는 보현사는 설악산의 한 줄기인 보현산에 자리하고 있다. 보현사는 굴산사(堀山寺)와 더불어 10세기 이후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손꼽히는 선종 사찰이었다. 보현사를 중창한 낭원대사(835~930)는 신라 선종 굴산사파의 창건주인 범일국사의 제자로 보현사에는 낭원대사의 탑비와 부도가 있다. 낭원대사는 신라 흥덕왕 9년(834년)에 태어나 13살되던 해 화엄사 정행법사의 수제자 가 된 뒤 범일국사 아래서 수행을 했다. 법을 전수받은 뒤 이곳 보현사에 머물다가 930년(고려 태조13년)에 입적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 왕건은 그의 시호를 낭원으로 하고, 그의 승탑명을 '오진(悟眞)"으로 정하였다. 그의 승탑을 세운 뒤 10 뒤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를 세웠다. 낭원대사 탑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낭원대사의 중창불사 이전에 이미 보현사가 존재하였다. 913년에 낭원대사가 크게 중창하고, 지장선원을 열어 전국의 학승들을 가르치다가 930년에 96살로 보현사에서 입적하였다. 당시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면서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때, 낭원대사는 피폐한 민심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던 때, 많은 백성들의 의지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어 화제다.그 특별전은 다름아닌 <예르미타시박물관,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 전(展)으로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에 있는 프랑스 미술 300년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전시다.. 예르미타시박물관에는프랑스를 제외한, 전세계 나라 가운데 프랑스 미술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노프왕조의 예카테리나2세를 비롯한 러시아 귀족들이 열정적으로 사 모은 프랑스 미술작품들은 러시아 겨울궁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작품들이다.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여 자신들의 위상을 보이고자 하였으며, 이렇게 모은 작품들은 이제궁궐을 개조한 박물관, 곧 예르미타시박물관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인상 깊었던 작품 가운데 하나는 '로마의 노예 시장' 그림이다. '로마의 노예 시장'을 프랑스 화가가 그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노예라고 하면 흑인을 상상하지만 로마시대에는 '백인'들도 노예로 거래가 되었으며 노예상들은 백인 노예들의 몸을 검사하기 위해옷을 벌거벗기고 있음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발거벗은 노예를 그린 화가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양양에 오래되지 않은 암자가 있다. 이절의 이름은 휴휴암(休休庵)인데, 쉬고 또 쉰다는 의미의 절 이름이지만, 파도소리 그칠날이 없어 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휴휴암은 바닷가에 자연석 바위가 마치 누운 관세음보살과 같아보여 어떤 스님이 관세음보살의 기도처로 그 이름을 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기도하는 절이 되었다. 이후 스님은 바닷가에 백의관세음보살상과 그를 보좌하는 용왕 동자 그리고 용을 바위에 새겨 명소로 만들었다. 요즈음 추운 날씨에 바닷가 파도가 몰려와 바위 경계에 세워놓은 난간이 얼어붙어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려 멀리에서 보면 마치 고기를 말리는 듯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겨울 하얗게 부서지는 동해 바다의 파도가 예사롭지 않다. 1,300년 이상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양양 낙산사의 겨울풍경을 찍기 위해 동해로 내달렸다. 체감온도 20도를 넘는 추위에도 사진가들은 삼삼오오 낙산사로 몰려든다. 낙산사 관음보살이 거기서 손짓하기에 가능한 일인가? 낙산사에 내려오는 의상대사 관련 이야기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했을 때 마침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바닷가 절벽에 위태롭게 서있는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기도하던 곳이요,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건네받은 곳은 지금 원통보전이 들어선 자리이다. 의상대의 싸한 겨울바람을 쏘이며 홍련암 쪽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홍련암에 이르는 절벽 길 아래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가 장관을 이룬다. 추워도 파도는 쉬지 않고 하얀 포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도선사 포대화상으로 요즈음 많은 절들에 조성되고 있는 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의 역대인물 초상화> 설명에 보면 "중국 오대(五代)시대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으로 성씨와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없다. 단지 스스로 계차(契此)로 일컬었고, 호는 장정자(長汀子)다. 세간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알려졌다. 몸은 비만하고 긴 눈썹에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며 동냥을 하고,어떤 때에는 어려운 중생을 돌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도봉산 도선사에 포대화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쓰다듬고 있어배꼽에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그대로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