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아침 일찍 일어나 4시 30분 새벽 예불에 참여했다. 도량석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 옷을 입고 방문을 나섰다. 스님이 두 명, 그리고 신도 3명이 법당 안에 앉아서 예불을 시작하였다. 큰 절에서는 예불을 시작하기 전에 경내에 있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이른바 불교 사물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데, 사물은 각자 의미가 있다.
범종은 지옥의 중생들을, 법고는 길짐승을, 목어는 물고기를, 그리고 운판은 새를 깨워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사물을 치는 순서는 법고가 처음이고 이어서 운판과 목어를 치고, 마지막으로 범종을 친다. 의식을 간략히 할 때에는 목어와 운판을 생략하는데 법고와 범종은 생략할 수 없다.
예불이 끝나고 각자 좌선하는 자세로 침묵 속에서 기도를 계속하였다. 나는 75억 명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지구에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손자들에게 핵발전소가 없는 안전한 지구를 물려주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거의 한 시간 정도 법당에 있다가 법당 문을 살며시 열고 나왔다. 법당 문 아래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현을 조금 지난 달이 보였다. 깜박이는 별들도 뚜렷히 보였다.
새벽 예불은 끝났지만 겨울밤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교교한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은 달빛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달빛과 어둠은 서로를 반반씩 섞어 묽은 안개가 자욱이 퍼진 것 같은 미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사람 소리는 물론 숲에 사는 짐승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절 마당의 나무들은 잠들어 있었다. 요사채의 방들은 대부분 컴컴했지만 불빛이 비치는 방도 두어 개 있었다. 절 마당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희미했다. 희미한 가운데서도 디딤돌을 깐 길이 보였다.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나는 방으로 가지 않고 천천히 길을 따라서 절 마당을 산책했다. 약간 쌀쌀한 느낌은 있었지만 기분은 매우 상쾌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희미한 절 마당을 한참 동안 산책했다. 나는 무엇인가? 나를 생각하고 인류를 생각하고 지구를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지구와의 관계 속에서 잠시 존재했다가 무(無)로 사라지지 것은 아닐까? 마치 구름이 무에서 태어나 잠시 보이다가 무로 사라지듯이... ‘나’라는 실체는 없고 단지 개념에 불과한 무적(無的) 존재가 아닐까?
아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5시 50분에 울려 퍼졌다. 방에서 나오는 병산이 오늘 하루는 각자 자유 시간을 갖는다고 알려 준다. 간단한 아침 공양을 마친 후에 혼자서 절문을 나가 주변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날씨는 한국과 견주면 초봄 정도의 춥지 않은 날씨다. 네팔은 위도가 낮아서 우리보다 봄이 일찍 오나 보다. 대성석가사 바로 앞에는 중국 절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중국 불교에서는 현장(수호지에 나오는 스님)을 높이 평가하는가 보다. 현장 스님의 큰 불상이 절 입구에 서 있다. 국제사원단지에는 태국, 프랑스, 호주 등 20여개 나라에서 건설한 갖가지 모양의 절들이 모여 있다.
숲에 있는 나무들을 살펴보니 풍토가 달라서 그런지 내가 이름을 아는 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길 따라서 동쪽으로 걸어가니 기다란 수로가 나타난다. 근사한 부지개 모양 다리가 두 개나 걸쳐져 있는 운하였다. 그러나 운하 주변은 아직 공사 중인 흔적이 여러 군데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2012년에 북쪽의 룸비니 박물관에서부터 남쪽의 마야데비 사원 연결로까지 2km 구간을 파서 인공 운하를 만들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B.C. 6세기에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하마야 데비(Mahamaya devi) 사이에서 태어나셨는데, 인도말로 데비란 부인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어머니를 그냥 마야 부인이라고도 말한다. 당시에는 보통 15, 6살에 혼인해서 18, 9살에 첫 아기를 낳았는데 마야 부인은 40살이 넘도록 애기가 없었다. 마야 부인은 아기를 낳기 위해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하였다. 어느 날 살포시 잠이 들었는데 하늘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서 나와 보니까 빛이 번쩍번쩍 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자세히 보니 상아 6개짜리 흰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어?’ 하는 사이에 코끼리가 마야 부인의 오른쪽 갈비뼈를 헤집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마야 부인은 코끼리 태몽을 꾸고 부처님을 가졌다고 한다. 노산인 때문인지 마야 부인은 부처님을 낳은 후 1주일 만에 죽고, 마야 부인의 시집 안 간 막내 동생 마하피자파티가 정반왕과 결혼하여 부처님을 기르게 된다. 아이가 자라자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짓는다.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이니 정식 이름은 싯다르타 고타마 (悉達多喬達摩)다.
부처님이 태어난 장소에 지은 사원이 마야데비 사원인데, 불교의 8대 성지 중 하나이다. 불교 순례자들이 버스를 타고 룸비니로 오면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옆에 있는 룸비니 박물관을 구경한다. 그 다음에 유람선을 타고서 마야데비 사원으로 간다. 운하 주변은 아직 공사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16인승 모터보트가 여러 척 운항한다. 운하를 따라 걸어가는데 50여 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일렬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옆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 분들은 태국에서부터 걸어온 순례자들이란다. 어제 국제사원단지에 있는 태국 절에서 자고 지금 마야데비 사원으로 걸어가는 중이란다.
복장은 매우 낡았지만 표정들은 경건하고 엄숙했다. 나이든 스님들이 많았지만 젊은 스님도 끼어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맨발인 사람이 슬리퍼를 신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성지 순례는 이슬람교도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독실한 불교도들도 걸어서 순례를 하는가 보다.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모든 인류가 돈만을 추구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룸비니에서 맨발의 순례자들을 만나자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종교의 힘이 돈의 힘 못지않게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대성석가사로 돌아와 점심 공양을 한 후 오후에는 병산과 함께 걸었다. 우리는 운하를 따라서 북쪽으로 걸어가면서 구경을 하였다. 운하의 북쪽 끝에 버스 터미널이 있고 룸비니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수위가 막으면서 200m 쯤 떨어진 매표소에 가서 표를 사오라고 한다. 표를 사려면 왕복 400m를 걸어야 한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입구에서 표를 팔지 않고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할까?
병산의 대답은 박물관의 관리 주체와 매표소의 관리 주체가 한 기관에 속해 있지 않고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조리한 현상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럴 듯하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병산은 룸비니 박물관을 관람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나는 순례단장 병산의 결정을 따랐다.
우리는 운하의 끝에서 모터보트를 타고서 2km 남쪽으로 갔다. 운하가 끝나는 지점에서 300m 쯤 더 남쪽으로 걸어가면 마야데비 사원이 나온다. 사원 입구에 있는 디지털 전광판에서 영어로 글씨가 계속해서 움직인다. 전광판에 “Birthplace of Lord Buddha”가 나타난다. 부처님을 Lord Buddha라고 부른다는 것이 새로웠다. 지금까지 Lord는 기독교 하느님의 호칭인 줄 알았는데, 부처님도 Lord 반열이다. 전광판에 “Sakyamuni Buddha”가 나타난다. 석가모니를 영어로 Sakyamuni 라고 표기한다는 것도 알았다.
석가모니의 뜻은 무엇인가 궁금하여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았다. ‘석가’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Sakya)라 불리는 부족의 이름이며, ‘모니’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역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진리를 깨달아 성자가 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의미로 ‘세존’이라고도 부른다. 석가모니와 관련된 다른 이름도 있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Buddha)는 ‘꺠달은 자’를 상징하며 우리말로는 ‘부처’라고 하다. 중국에서는 붓다를 음역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줄여서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마야데비 사원에서는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보관하고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흙길을 맨발로 걸으니 발이 매우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부처님은 가부좌를 하고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절의 대웅전에 가서 보면 부처님은 항상 좌선을 하고 있다. 화순의 운주사에는 와불이라고 해서 누워 있는 부처님이 있고 또 몇몇 절에도 와불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부처님은 좌선하는 모습이다.
병산은 좌선하는 부처님이 아니고 걸어가는 모습의 부처님 동상을 태국에서 여러 번 보았다고 한다. 부처님이 인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진리를 꺠달은 다음에 무엇을 하였을까? 부처님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지 않았을까? 좌선하는 모습의 부처님은 달마선사가 중국에 와서 시작한 선종에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도 탁발순례를 하셨으니, 부처님은 분명히 걸어 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아래 사진은 태국에서 병산이 찍은 부처님 사진인데, 부처님은 우산과 지팡이를 들고서 맨발로 걷고 있는 모습이다.
룸비니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에 살았던 카필라 성에서는 25km 떨어져 있다. 석가모니를 임신한 마야 부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아이를 낳기 위하여 카필라 성을 떠나 친정으로 가고 있었다. 마침 룸비니 동산에 도착하여 산기를 느끼고 석가모니를 낳게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마리아가 호적신고를 하러 길을 떠났다가 베틀레헴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석가모니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나는 작은 언덕을 연상했는데, 룸비니는 평평하고 반듯했다. 룸비니 동산이 한자로 남비니원(藍毗尼園)이니 언덕을 상기시키는 ‘룸비니 동산’보다는 ‘룸비니 정원’이 더 정확한 번역이지 않을까? 그러나 ‘동산’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큰 집의 정원에 만들어 놓은 숲’의 의미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룸비니 동산이 틀린 표현은 아니다.
불교는 한동안 번성하다가 인도에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룸비니도 잊히고 밀림 속에서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1896년 12월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는 룸비니에서 아소카 왕이 세운 돌기둥을 발굴하였다. 돌기둥은 길이가 9.41m인데 그 중 4.7m는 땅에 묻혀 있었다. 아소카 왕이 룸비니에 온 것은 부처님이 태어나고 300년이 지난 B.C. 249년으로 추정된다.
돌기둥의 글씨들을 해독해 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삐야다시 왕 아소카는 즉위 20년에 친히 이곳에 와 참배하였다. 여기가 사캬족의 성자 붓다께서 탄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존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돌기둥과 기둥머리를 만들어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하고 수확물의 1/8만 거두도록 한다.”
마야데비 사원은 네모로 만들어지고 지붕이 있고 외벽은 모두 흰색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없고 외양이 소박한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에는 돌무더기가 있을 뿐 방도 없고 유물도 없고 조형물도 없었다. 이곳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장소의 발굴 현장을 그대로 사원으로 만든 것으로 원래 11세기에 세워졌고 현재의 사원은 1943년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통로를 따라 줄지어 이동하고 돌무더기 앞에서 잠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서는 다시 줄지어서 출구로 나온다.
뭔가 근사한 볼거리를 기대했던 나에게는 적이 실망스러운 사원이었다. 출구로 나오면 석탑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탑과는 달리 네팔의 석탑은 돌덩이를 둥그렇게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사원 앞에는 넓은 정원이 있고 마야 부인이 출산 후 목욕을 했다고 알려진 작은 연못도 있었다. 운치 있는 큰 나무들이 있고, 돌로 된 의자에 앉아 쉬는 사람들도 보였다. 룸비니의 마야데비 사원은 외관으로는 매우 평범한 성지였다.
불교를 믿는 순례자들이 먼 길을 걸어와 룸비니 동산에 도착하여 마야데비 사원을 방문한 후에 그의 생활에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면, 부처님이 6년 동안 고행한 후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불교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緣起法)이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은 무엇인가? 연기법의 설명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다시 말하면 유형 또는 무형의 모든 실체, 사상, 제도, 개념 등은 스스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은 내가 전공했던 환경학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먼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다. 생각해 보자. 내가 아침에 먹은 쌀밥이 상에 오르기까지 몇 사람이 수고했을까? 장에 가서 쌀을 사온 아내, 쌀을 판 상인, 쌀을 생산한 농부, 쌀을 운반한 트럭 운전사, 그밖에도 트럭의 부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한 수많은 나라안팎 노동자 등등. 지구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간접으로 내가 먹는 쌀밥을 만드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들이 없으면 내가 밥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농부가 뿌린 볍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햇살이 비쳐야 하고 물과 공기가 필요하다. 또한 논흙 속에서 유기물을 분해시켜 벼에 양분을 제공하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우리가 먹는 쌀을 만들기 위해서 모두 필요한 존재들이다. 우리에게 우유를 제공하는 젖소가 먹는 풀이 자라기 위해서도 이러한 물리적인 요소와 미생물들이 필요하다. 이처럼 모든 생물과 미생물들은 이 지구에 함께 살면서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것은 농약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벌과 나비가 농약 때문에 모두 죽으면 꽃은 수정을 할 수가 없고 과일이 열릴 수가 없게 된다. 벌이 멸하면 과일나무도 멸하게 된다.
사회학적으로도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겠다. 서양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서 상류층의 의무와 책임을 말하는데, 만일 권력과 부를 가진 상류층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고 지나치게 부를 축적하게 되면 그 사회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불만이 쌓이고 결국은 사회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 사회가 멸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즘 재벌 자녀들의 갑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재벌과 부자들은 연기법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영어 수학만 가르치지 말고 연기법도 가르쳐야 한다.
연기법을 시간을 따라서 적용할 수도 있다. 불기로 계산해서 2562년 전에 룸비니에서 탄생한 석가모니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존재했기에 나는 한국을 떠나 룸비니의 마하데비 사원에 와서 지금 이 순간 그를 생각하며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 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와 나는 연기법으로 해석하면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