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나라는 남자들이 집에서 술 마시는 습관이 발달하지 않고 술집(옛날 같으면 기생집)에서 술을 먹기 때문에 술 시중을 드는 직업여성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술집 여성과 남자 손님 사이에 여러 가지 형태의 남녀관계가 가능하지만 가정 파탄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의 외도를 ‘바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남자의 바람은 일시적인 객기 정도로 취급하여 가정 파탄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바람이란 잠시 불다가 시간이 지나면 멈추는 것이니까.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남자의 바람을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독특한 술 문화가 오랫동안 전통으로서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나 유럽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이다. 기독교의 10계명에서는 남자의 바람을 죄라고 간주한다. 기독교 윤리에서는 남자의 바람을 용인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파티 문화가 발달해 우리나라의 룸살롱이나 단란주점 같은 형태의 술집이 나타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남자들이 퇴근한 뒤에 직장 동료와 함께 여자 있는 술집에 가서 한잔 한다는 그런 풍습이 없다. 특히 미국 남자들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앞부분에 ‘대화장’이 나온다. 봉평 장에서 허생원은 물건이 안 팔려서 재미를 못 보았다. 그래서 일찍 거두고 밤새 걸어서 대화장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허생원이 조선달에게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걸.” “달이 뜨렷다.” 윗글을 읽어보면 아마도 대화장은 봉평장보다 크고 장사가 잘되는 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사실이다. 대화면은 평창군의 중간 지점에 있다. 조선 시대에 대화면은 강릉에서 한양 가는 간선 도로가 통과하기 때문에 봉평보다 컸다. 봉평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난 외진 동네였다. 대화면은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영월, 평창, 정선의 곡물과 잡곡이 대화로 유통되었다. 대화의 특산물로서 산채와 고추가 유명했다. 특히 대화초는 껍질이 두꺼워서 가루가 많이 나오고 매운 것이 특징으로 서울 경동시장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통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몽골에 왜 가려고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별 보러 간다는 것이리라. 우리나라가 산업화한 이후 밤하늘에도 매연이건 연무건 완전히 걷히지 않아 도시에서는 영 별을 제대로 보기 어렵고 그러기에 몽골의 사막 한 가운데에 가면 별이 잘 보일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다녀오신 분들의 증언도 많이 떠돌고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 사실 여름이 우리나라가 무덥기에 습도가 낮은 시원한 사막의 밤을 즐기자는 것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몽골의 밤하늘은 어디에서 보면 좋은가? 수도인 울란바토르 일대도 이미 상당히 매연이 번지고 있어 도시 안에서는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수도 옆 30분을 나가면 교외에 테레지라고 하는 멋진 풍경구가 있긴 한데 별을 보는 최적지는 아니란다. 그래서 우리가 간 것은 고비사막의 한가운데다. 수도에서 포장도로로 7시간, 다시 비포장도로로 1시간, 보이는 것은 누런 모래와 자갈과 말라죽은 이끼류뿐. 길도 없는 길을 타이어 바퀴 자국만 따라 잘도 찾아 달려 마침내 천막촌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곧 석양이 진다. 밤이 오는 것이다. 아 드디어 밤이구나. 사막의 밤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