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걸견폐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자기 주인에게 충성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걸왕은 대표적인 폭군이고 요임금은 대표적인 성군입니다. 그런데 폭군인 걸왕이 기르는 개는 성군인 요임금을 보고 자지러지게 짖어댑니다. 그것은 개의 머리에 선악의 판단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편이냐 아니냐를 근거로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지요. 요즘 세태에 참 맞는 성어인 것 같아서요. 자기 편이 아니면, 곧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옳고 그름을 떠나 막무가내로 물어뜯습니다. 우리 겨레가 쓰는 말은 자신의 의견을 고급스럽고 품격있게 표현할 수 있는 기능이 훌륭한데도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품격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물론 총과 칼로 하는 정치보다 말로 하는 정치가 그래도 온건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린 특정 나라의 언어를 저급영어라고 폄훼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도층이 말하는 언어를 보면 그런 비판을 해 온 것이 부끄러워집니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함몰되어 있으면서도 말은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차라리 "우리 당과 나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아서요."라는 솔직함이 더 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이 있고, 못생긴 여인네를 호박꽃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이는 호박꽃을 제대로 관찰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내려온 고정화된 인식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호박꽃을 잘 들여다보면 그 황홀한 노랑에 깊이가 느껴져 예쁘지 않은 꽃이 없다는 말이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호박꽃의 꽃말은 '관대함, 포용'입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더라도 예쁨으로 향기로 열매로 보답하는 호박과 잘 어울리는 꽃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나이 어린 고참들 아래서 졸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해야 했지요. 군대 사회는 일반 사회와는 달라서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이가 한참 어린 00병장이 군 생활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물론 내가 원인 제공한 것도 있지만 밤에 조용히 불려 나가 각종 얼차려에 빠따를 맞는 것이 일상이었지요. 그 사건들로 인해 악연으로 굳어진 사이가 되었습니다. 사회에 나와서 우연한 기회에 만났는데 상대방은 반갑게 인사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용서하려는 생각과 관대함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때 내 마음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류의 역사상 사대 성인을 이야기하면 예수ㆍ석가ㆍ공자ㆍ소크라테스를 꼽습니다. 모두 인류의 사상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사람들이지요. 성(聖)은 성스러울 성자입니다. 그 글자를 파자하면 ‘耳 + 口 + 王’이 나오지요. 순서가 중요합니다. 귀가 먼저 나오고 입이 나중에 나옵니다. 곧 남의 이야기를 충분히 경청하고 난 이후에 말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聖)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말합니다. 음악의 으뜸 경지를 악성(樂聖)이라 하고 시인의 으뜸 경지에 오른 사람을 시성(詩聖)이라고 하며 바둑의 으뜸 경지에 오른 사람을 기성(棋聖)이라고 합니다. 또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주성(酒聖)이라고 하는데 이는 술과 함께 유유자적하며 성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술을 많이 먹어보기도 했지만 어지럽고 실수를 연발할 뿐, 성인의 경지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니 주성(酒聖)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하였습니다. 그 많은 시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경청(傾聽)이었지요. 경청 하나만 잘해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장자의 응제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해엔 제왕 숙(儵)이, 북해엔 제왕 홀(忽)이 있고 중앙에는 제왕 혼돈(混沌)이 있었다. 숙과 홀은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이때마다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이 베푼 은혜에 보답할 방법을 의론하였다. '모든 사람은 일곱 개의 구멍을 갖고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만 구멍이 없으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주었는데 혼돈은 이레 만에 죽고 말았다." 우린 단순히 혼돈에 구멍이 뚫린 것, 그래서 자연스러움을 잃고 죽음에 이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장자가 늘 하는 말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니 같은 맥락에서 그리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글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숙은 남쪽에 살고 홀은 북쪽에 삽니다. 그리고 때때로 중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지요. 이렇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대립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로 보면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사용자와 근로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많은 부분에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고 자신의 위치에서 조금도 양보하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물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겐 물은 저주의 대상입니다. 물은 같은 물이지만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고, 또 다른 상황,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린 상대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에 상대성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돈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돈에 대한 탐욕은 파멸로 이어질 수 있고 지식은 세상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지만, 잘못된 지식은 오히려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으며 사랑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질투와 소유욕은 고통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상대적인 값어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쁨을 단정적으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지요. 우린 각자의 상황과 관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고, 그에 따라 값어치 판단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창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은 마치 렌즈에 먼지가 낀 것처럼 세상을 왜곡하여 보여줍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면 현실의 문제점을 간과할 수 있고 지나치게 비관적이면 희망을 잃게 될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겨울 산행의 백미는 상고대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꽃이 소복이 내려앉은 풍경 아주 작은 나뭇가지 하나하나에도 속속들이 들러붙은 순백의 결정(結晶)은 한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멋진 조각품입니다. 상고대는 영하의 기온에서 공기 중의 수증기가 나뭇가지 등에 부딪혀 얼어붙어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입니다. 마치 겨울잠에 든 나무들이 꿈속에서 피워낸 순백의 꽃송이 같기도 하고, 은빛 눈송이가 만들어낸 조각 작품 같기도 합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상고대는 보는 이의 마음을 순수하게 정화하고, 겨울의 삭막함을 잊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고대는 영하의 기온과 높은 습도, 그리고 바람이 빚어놓은 예술품입니다. 힘든 겨울 산행에서 어느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상고대는 신비로움 그 자체입니다. 밤새 내린 서리가 나무를 하얗게 물들여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고 햇살에 빛나는 상고대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상고대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고된 인내가 필요합니다. 새벽녘,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산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옛날엔 종다리(대오리나 싸리 따위로 엮어 만든 작은 바구니) 들고 앞 개울만 나가도 가재가 지천으로 있었습니다. 요즘엔 전기의 영향인지 아니면 1급수가 적어서 그런지 가재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엊그제 두륜산 중턱에서 가재를 보았으니 유년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긴 것이 비슷하니 같은 편이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게걸음과 가재걸음은 차이가 큽니다. 게는 오직 옆으로만 걸어 다닙니다. 어미 게가 나처럼 똑바로 걸으라고 시범을 보일지라도 그 똑바름이라는 것이 옆으로 걷는 것이지요. 그에 비하여 가재는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닙니다. 그러다가 위험에 직면하면 꼬리를 이용하여 쏜살같이 뒤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합니다. 가재가 뒤로 가는 모습은 역행하고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최적의 선택입니다. 어쩌면 가재걸음이 아니라 가재의 회피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서핑이나 사진 자료를 통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재의 생활상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재도 아가미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방총(龐蔥)이라는 고위 관리가 태자와 함께 조나라 서울 한단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하루 전 방총이 임금을 찾아가서 묻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시장 한복판에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니요. 믿을 수 없소" "그러면 두 사람이 호랑이를 보았다고 이야기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믿을 수는 없을 것 같소." "그럼 세 사람이 호랑이를 보았다고 이야기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지 않을 수 없소." 방총은 시장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세 사람이 말하면 이처럼 그럴듯해 보인다고 임금에게 말하지요. 그리고 자신이 조나라에 가면 세 명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험담하게 될 것이지만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임금은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방총이 조나라로 간 다음 날부터 임금에게 방총을 험담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훗날 태자는 인질에서 풀려나 위나라로 돌아왔지만, 방총은 결국 임금의 의심을 받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방총의 위처럼 비유로 말했음에도 자신을 스스로 구해내지 못한 것이지요. ‘증삼살인(曾參殺人)’이라는 고사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중국 전한의 회남왕 유안이 지은 회남자에는 '천하유삼위(天下有三危)'가 나옵니다. 곧 천하에는 세 가지 위험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소덕이다총 일위야(少德而多寵 一危也) 재하이위고 이위야(才下而位高 二危也) 신무대공이유후록 삼위야(身無大功而有厚祿 三危也) "덕이 적은데도 총애를 많이 받는 것이 첫 번째 위험이고 재능이 없으면서도 지위가 높은 것이 두 번째 위험이고 자신에게 큰 공적이 없는 데도 높은 자리와 봉록을 받는 것이 세 번째 위험이다." 덕이 부족한 사람이 권력을 쥐면, 그 권력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남용되기 쉽습니다. 역사적으로 덕이 부족한 군주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능력보다는 인맥이나 배경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능이 없으면서도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자리에 걸맞은 소임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조직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조직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도력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면, 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지형의 특징은 동고서저(東高西低)입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큰 강은 서쪽인 서해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중국은 우리와 반대여서 서고동저(西高東低) 지형입니다. 황하나 양자강이 모두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지요.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충북 괴산군 화양구곡에 새겨져 있기도 하고 가평 조종천의 만동묘에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라는 의미의 글은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중국과 관련된 글귀이지요. 어쩌면 ‘사필귀정(事必歸正)’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의 의미가 큽니다. 우리나라의 서쪽에서 물이 동류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형상 사행천으로 굽이굽이 흐르다 보면 잠시 동쪽으로 흐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이 중국과 닮았다고 여겨서 중국 황제를 기리는 만동묘를 세웠습니다. 만동묘는 중국의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그런데 만동묘를 오르는 마지막 계단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9층으로 만들어졌고 경사를 70도 안팎으로 가파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는 조선의 백성이 천자를 뵈러 올라가면서 똑바로 서서 올라갈 수 없도록 만든 의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