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우리나라는 검버섯과 곰팡이가 핀 늙은 나라일까? 아니면 초롱초롱한 눈망울, 뜨거운 갈망을 지닌 젊은 나라일까? 길거리에 나가 보면 서로 대적하는 두 물결이 부딪친다. 혼탁한 격류가 소용돌이친다. 같고도 다르고 다르고도 같은 100여 년 전의 시공간을 불러내 보자. “대한제국 소년들이여 너희는 배우고 또 배워 문명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려면 너희의 심장에는 용맹한 기상이 용솟음쳐야 하고, 너희의 머릿속에는 모험 정신이 가득해야 한다. 문명이라는 거센 파도를 헤치고 진군하라, 대한의 소년들이여!” - 이도영, 《대한민보》, 1910.2.27 “우리 한국은 4천여 년 늙은 나라로 정치도 늙고 인민도 늙어서, 이웃집 아이들이 그 주인이 늙고 기력이 없음을 업신여겨 서까래도 빼어가고, 결국에는 그 이웃집 건장한 소년이 그 집 주인의 수족을 묶는 한편 작은 방에 거처케 하니 어찌 가엽지 않으리오. 젊은 사람은 항상 장래를 생각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에 힘쓰며,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에 힘쓰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동포들은 진보에 힘써서 우리나라를 소년국으로 만들지니라." -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어떤 ‘구라’ 고수가 말하길, 황석영 앞에서는 자기도 한풀 꺾인다고 한다. 나는 20대 젊은 시절에 황석영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70대가 되어 그의 민담 시리즈를 네 살배기 손주에게 사준 것이 엊그제다. 손주에게 읽어 주었더니, 손주가 듣고 나서 “이것보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더 재밌어요” 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죽으면 못 보니까 둘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 아이가 찍은, 죽으면 다시 못 볼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개화기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황석영의 소설 《여울물 소리》에서 판소리 명인이 제자에게 이렇게 썰한다. “평조(平調)가 소리의 기본이니라. 한밤중에 달이 중천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것처럼, 또는 한들 바람이 잔잔한 수면을 스쳐 가듯이 맑고도 시원한 소리다. 우조(羽調)는 맑고 격하고 장하고 거세며 엄한 가락이니라. 사납게 들어올리기 때문에 맑고 장하고 격동하여 한 말이나 되는 옥이 부딪혀서 깨어질 때 옥 부스러기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과 같도다. 계면조(界面調)는 처절하고 슬픈 소리니 아득하게 멀고 숙연한 가락이다. (…) 그리고 여음이 있으니 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첫 서양의사 알렌(Horace N. Allen )은 자신의 일기에 1885년의 설 명절에 대해 적었다. 2월 10일(화) 오늘 음력 섣달 스무엿새날(12월 26일)인데 사실상 오늘부터 조선의 가장 큰 명절인 설날이 시작된다. 조선인은 설날 명절을 5일 동안 쉰다. 이 5일 동안 서울거리는 온통 잔치로 꾸며진다. 썩은 짚으로 된 거름더미 같은 것은 말끔하게 치워진다. 5일 동안에는 거리에 좌판을 벌여놓고 각종 물건을 물물교환한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무슨 물건이라도 팔고 산다. 그래서 서울거리는 시장 바닥이 되고 만다. 각종 물품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각종 놋그릇(유기-鍮器)더미를 산처럼 쌓아놓은 것인데, 햇빛을 받아 번쩍번쩍 눈부시게 빛난다. 놋그릇 종류에는 촛대, 숟가락, 젓가락, 사발, 대야, 타구(唾具, 침 뱉는 그릇) 등이 있다. 타구는 달걀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양끝이 연결되어 있다. 이들 유기는 정교하게 가공되어 있고 그 값도 대단히 비싸다. 나는 조그마한 타구 하나의 값이 현금으로 500냥(약 50센트)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선사람은 어떻게 그같이 비싼 값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 참으로 놀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몇 년 동안 연재한 적이 있다. 올해 책으로 펴내기 위하여 관련 자료를 재검토하는 중이다. 자료가 뜻밖에 많다. 첫째는 그가 고국의 가족에게 보낸 서신이다. 1884년 5월부터 1887년 7월까지 그는 우편선이 있을 때마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 전 상서를 썼다. 이 기간은 그가 조선살이를 한 기간이다. 그러니까 그는 개항초기 3년 동안의 조선 견문록을 사신으로 남긴 것이다. 둘째는 조선 여행기다. 1882년 6월 조선 땅(부산)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관찰과 소감, 그리고 1884년 가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행한 내륙 여행에 대한 세밀한 여행록이다.셋째는 외교관으로 3년 동안 조선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외교부서와 주고받은 공문이다.넷째는 서울 근무하면서 본국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서다.다섯째는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상의 기록물은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전해 온다. 단지 서로 다른 나라의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내용이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소중하고 값진 자료와 정보가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 조지 포크에 대해서 뿐 아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5년 꽃들이 만발한 4월 3일, 한양의 사대문과 종각(보신각)에 이런 취지의 공고문이 붙어 있다. 정부에서 병원 하나를 설립했는데 북부 재동 외아문(외교부) 북쪽으로 두 번째 집이다. 미국 의사 알렌을 초빙하였고 아울러 의학도와 의약 및 여러 도구를 갖추고 있다. 오늘부터 매일 미시(오후 1-3시)에서 신시(오후 3-5시)까지 병원 문을 열어 약을 줄 것이다. 알렌의 의술은 정교하고 양호한데 특히 외과에 뛰어나서 한 번 진료를 받으면 신통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본 병원에는 남녀가 머물 병실이 있으니 무릇 질병에 걸린 자는 병원에 와서 치료받을 것이며 약값은 나라에서 대줄 것이다. 이를 숙지하여 하등 의심을 품지 말고 치료를 받으러 올지어다. 한편, 당국은 한성부에 지시해 모든 계(契, 동의 상위 조직인 계는 당시 한성에 300여 개가 있었다.)에 공고문을 게시토록 했으며, 지방에도 읍마다 공고하게 했다.(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이 첫 서양식 병원은 처음엔 광혜원으로 불리다가 곧 제중원으로 개명되었다. 오늘날의 헌법재판소 경내에 있었다고 한다. 의사 알렌의 일기(1885년 4월 10일 자)다. 병원은 어제 개원했는데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96년 강원도 양구군 우망리장을 구경하러 가 보자. 많은 장사치와 백성들이 장터에 모여 있다. 무얼 하는 사람들일까? 물건을 사고파는 게 아니다. 운집한 군중 가운데에 한 사람이 소리를 크게 질러 무언가를 읽고 있다. 《독립신문》이다. 사람들은 신문을 들으러 이 장터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은 양구군 군수였다. 군수는 일부러 시장을 열고 친히 장터에 와서 시국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한다. 이어서 부하로 하여금 신문을 낭독하게 하는 것이다. 양구군 원님만 훌륭했던 건 아니다. 장터 마을에 사는 백성 김기서, 조성룡, 김리선은 이런 글을 《독립신문》(1896년 4월 7일)에 보냈다. 요사이 군수가 장터를 열고 친히 장에 나와 장사치와 인민이 많이 모인 곳에서 시국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소리를 크게 질러 《독립신문》을 읽게 하니, 오는 사람과 가는 손님이며 장사하는 사람과 온 백성들이 어깨를 비비고 둘러서서 재미를 붙여 듣고 모두 찬탄하더라. 이후부터는 물건 매매하는 상인들뿐 아니라, 《독립신문》 들으러 오는 백성들이 멀고 가까운 곳을 헤아리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다투어 모여들어 서로 말하여 가로되,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과거는 살아 있는 현재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12월에 일어났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러한지 시공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전인권 등 공저, 《1898, 문명의 전환》 218쪽에는 1898년에 한양의 거리를 달군 만민공동회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만민공동회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하나의 ‘국민’임을 경험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장국밥을 먹으며, 기생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생각을 쏟아놓았고 직접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품과 돈을 제공함으로써 시위대에 동조를 표했다. 수많은 말이 넘쳐나는 현장을 각 신문들은 다투어 ‘중계’했고, 신문에 실린 뉴스는 때로는 소문으로 그리고 때로는 풍문으로 대한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은 1898년 11월 26일 자 <독립신문>이다. 수하동 소학교 학도 태억석, 장용남 두 아이는 나이가 십이삼인데 만민공동회에 다니면서 충애 의리로 연설하였는 고로, 옳은 목적 가진 이들은 그 두 아이를 칭찬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는지라. 지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오늘날의 인간 군상을 1898년 12월 24일 <제국신문>에 열거된 족속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정말 그러한지, 126년 전 “한탄스러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음미해 보자. “일전에 친구끼리 서로 수작하는 말씀을 들은즉 몹시 이상하기로 여기 옮기노라. 한 사람이 가로되, 우리나라 사람은 평생에 견문이 고루하여 새로운 일을 아무것도 못 하나니, 옛글에 이른바 우물 밑에 개구리라. 항상 말하기를, 하늘이 적다면서 제 본 것만 올타하더라. 다른 한 사람이 가로되, 우리나라 사람은 새와 같아 눈은 반들반들하고 말은 재작재작 지꺼리기는 잘도 하고 떼를 지어서 모이기도 잘 하나 실상은 꾀도 없고 겁도 많아 아무 일도 못하나니, 옛글에 일렀으되, 연작(燕雀:제비와 참새)이 처마에서 구구구구 서로 즐겨할 새 부엌 고래에서 불꽃이 올라 집이 장차 탈건마는 연작은 화가 몸에 미칠 줄 모르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한다 하더라. …누구는 꼭 여우 같아. 옛말에 이르기를, 여우가 범을 보고 죽을까 무서워하여 간사한 말로 범을 속이되 나는 짐승 중에 왕이라 일백 짐승이 나를 보면 두려워 피하나니 그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번 우리는 1898년 어느날 백정 박성춘(1862-?)이 종로에서 열린 대규모 민중 대회에서 개막연설을 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박성춘은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요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는 박성춘 말고도 상인 등의 하층계급이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정 출신(해방된 백정)으로서는 박성춘이 거의 유일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당시 활동을 주도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서재필ㆍ윤치호ㆍ이상재ㆍ지석영ㆍ주시경ㆍ오세창ㆍ이승만ㆍ안창호ㆍ이승훈ㆍ남궁억ㆍ정교ㆍ이준ㆍ장지연ㆍ박은식ㆍ이동녕ㆍ신채호ㆍ한규설ㆍ이동휘 등이다. 당시 제도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지만, 실제에 있어선 백정이 교육받거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박성춘은 어떻게 쟁쟁한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아들 박서양의 효성이 촉매가 되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박성춘은 아들에게만큼은 저주스러운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천지 어떤 학교가 백정의 자식을 받아 줄 것인가?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다. 정규 학교는 보낼 수 없으므로 당시 천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98년 10월 29일 가을빛이 완연한 종로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양반과 천민, 선생과 학생, 양가 부인과 기생, 선비와 승려, 갓바치, 백정 등등 금방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다. 앞에 단상이 놓여있다. 행사 사회를 보는 독립협회 인사가 연설자를 소개한다. 그 순간 군중들 사이에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내 ‘우와…’ 함성이 터진다. 첫 연설자로 소개된 사람, 그는 뜻밖에도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아닌가. 박성춘이 뚜벅뚜벅 단상으로 걸어가 열변을 토한다.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라와 인민을 이롭게 하는 길은 관과 민이 합심하여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 차일(遮日: 햇볕가리개)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하여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과 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 년 이어지도록 합시다.” 청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고 박수가 터진다. 사회 저명인사가 아닌 천민 중의 천민인 백정이 만민 앞에 우뚝 선 것 자체가 뇌성벽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