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남자 옷을 입은 채 금강산에 오른 열네 살 소녀 김금원. 그의 눈으로 본 1830년 봄 금강산을 구경해 본다. 자유 왕래할 그날을 그리면서. 드디어 금강산으로 향한다.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바라본다. 옥이 서 있고 흰 눈이 쌓인 것 같다. 중국 서산에 쌓인 눈도 필경 이보다 못하리라. 서산은 연경(燕京)의 가장 뛰어난 명산으로 만수산 뒤로 첩첩한 산과 층층의 절벽을 보면 마치 선경과 같다 한다. 눈 내린 뒤의 봉우리는 더욱 기이해서 연경의 8대 경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금강산은 층층이 겹친 산과 첩첩한 봉우리가 구름까지 솟아올라 있다. 사철 내내 눈빛을 띠고 있으니, 봉우리마다 빼어나다. 산길에 봄이 깊었다. 초록 이파리는 살찌고 붉은 꽃은 시든다. 두견새가 소리마다 ‘불여귀(不如歸: 돌아감만 못 하다, 돌아가라)’라 지저귀며 여행객의 쓸쓸한 마음을 돋운다. 장안사로 향한다. 금모래, 잔잔한 풀이 몇 리에 걸쳐 깔려 있고 키 큰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삼사 층의 웅장한 법당이 온 골짜기를 누르듯 서 있다. 예스러운 분위기의 연로한 주지승이 법당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있다. 노승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시대 우리 남자들은 여성을 평생 집안에 가두어 두었다. 공자님, 주자님을 끌어들여 여성을 속박하는 데에 잘도 써먹었다. 위선적인 도학군자들의 죄가 가장 무겁다. 지금 여성들에게 남자들이 꼼짝 못 하고 눌려 사는 것은 어쩜 인과응보인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관광 명승지나 고급 식당, 멋진 카페, 일류 백화점을 들여다보면 거의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도대체 이 시각 남정네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당구나 탁구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사업장이나 사무실에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을까?” 어찌하여 우리 남아 대장부들의 처지가 이처럼 꽁지 빠진 수탉, 혹은 서리맞은 약병아리 행색이 되고 말았는가. 탄식이 나오다가도, 그래 이게 다 우리가 수수 백 년 쌓아 올린 업보 아니겠는가, 달게 받자. 마음을 달래곤 한다. 지난번에 여성 김삿갓 김금원이 14살 때 남장하고 집을 나가 제천의 의림지를 구경하는 모습을 우리는 들여다 보았다. 김금원의 의림지 여행기는 그녀의 기행문 <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의 한 부분이다. 제목이 난해하다. 호 (湖: 제천의 호수). 동(東: 동쪽의 금강산), 낙(洛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바깥 여행을 할수 없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시대에 14살 소녀의 몸으로 모험 여행은 떠난 김금원은 누구였을까? 어떻게 그게 가능했으며 그 기분은 어떠했을까? 첫걸음의 행색과 여정은? 그녀의 육성을 직접 들어 보자 .“마음에 계획을 정하고 부모님께 여러 번 간절히 청하니 한참 뒤에야 겨우 허락하셨다. 그러자 가슴이 트이며 마치 새가 새장을 나와 저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고, 천리마가 재갈을 벗어 던지고 천리를 내닫는 듯한 기분이다. 그날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꾸려 먼저 네 고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때는 경인년(1830년) 봄 삼월 내 나이 바야흐로 열네 살을 넘겼을 무렵이었다.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땋은 뒤 가마에 앉아 푸른 실 휘장을 두르되 앞은 보이게 하고 제천의 의림지를 찾았다. 예쁜 꽃들이 웃음을 터뜨릴 듯하고, 아지랑이같이 피어난 향기로운 풀에서는 초록빛 이파리가 막 펼쳐지고 있다. 푸른 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 마치 수가 놓인 비단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가슴 속이 시원해지니 폐부를 씻어내고 때와 먼지를 닦아내는 듯 하다. 의림지(義林池: 충북 제천의 못) 에 도착했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같은 시기 여성 김삿갓이 있었고 그녀가 여행기를 남겼다는 사실은 왜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는지. 14살 때 길을 나선 남장 소녀의 이름은 김금원(金錦園, 1817~?). 조선 후기를 살았던 두 사람은 꼭 열 살 터울이다. 김삿갓은 스무 살 때 집을 나왔다고 하니 1827년 무렵이다. 금원이 집을 나선 것은 1831년이라 하니, 김삿갓 보다 4년 늦게 집을 나선 셈이다. 이 두 남녀의 여정이 교차했을 수도 있을지, 혹 어딘가에서 같은 주막에 묵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일 두 사람이 같은 주막의 마루 위에서나 어떤 마을의 정자에서 서로 시를 겨루었다면 어떤 작품들이 나왔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금원의 여로를 한 번 짚어 본다. 그녀의 여행은 14살 소녀 때부터 시작하여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시간 간격을 무시하고 여정을 모두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천-단양-영춘-청풍-(아래 내금강) 단발령-장안사-표훈사-만폭동-수미탑-중향성-불지암-묘길상-지장암-사자암-(아래 외금강) 유점사-구룡소-은선대-십이폭포-(아래 관동팔경) 통천 총석정-해금강-고성 삼일포-간성 청간정=강릉 경포대-울진 망양정-평해 월송정-삼척 죽서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한 명의 궁녀와 김옥균이 비밀리에 밀통하기 시작한 것은 1874년 김옥균의 나이 23살 때였다. 궁녀의 나이는 훨씬 많았으니 31살. 그 때부터 궁녀는 김옥균에게 구중심처 궁중의 동정을 전해 준다. 김옥균은 자신의 일기(1884년 12월 1일 자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궁녀 모씨는 나이는 42살이고, 신체가 건대하며 남자 이상의 힘을 가져 보통 남자 5, 6인을 당할 수 있다. 평상시에 고대수(顧大嫂)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곤전(중전)의 근시(近侍, 웃어른을 가까이 모심)로 뽑혀 있는 분인데, 벌써 10년 전부터 우리 당에 밀사(密事)를 통고해 주는 사람이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대수로 통하는 이 궁녀가 기골이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민비의 측근에서 시중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김옥균을 위해 간첩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기에서 김옥균이 ‘우리 당’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개화당’ 또는 ‘독립당’을 말한다. ‘당(黨)’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말하는 정당과는 거리가 멀고 일종의 비밀 동아리 같은 것이었을 터다. 오늘날의 언어 감각으로는 ‘파(派)’라 하는 것이 보다 맞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전번에 소개한 일본인 스나가(須永)는 김옥균의 진정한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은 절해 고도 오가사와라 섬에서 인편으로 스나가에게 붓글씨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곁들였다. 「小笠原島夏日、為試病腕、寄贈知我者」(오가사와라 섬에서 여름날, 병든 팔을 시험해보기 위해 ‘나를 아는 이’에게 보낸다.) 김옥균은 스나가를 ‘나를 아는 이’이라는 뜻의 ‘知我者’(아지자)라 불렀다. 이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시경(詩経)》에 나오는 것인데 시경에는 이 단어에 이어서 「謂我心憂」(위아심우: 내 마음을 걱정하다)가 나온다. 스나가의 일기에는 오가사와라 고도에서 보낸 김옥균의 고통이 담겨 있다. 김옥균을 방문하고 돌아온 유혁로가 전해준 김옥균의 실황이다. “위장병과 류마티즘은 아직 낫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배앓이까지 앓고 있답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개미와 독충, 뱀의 습격을 받습니다. 극히 쇠약하여 안색이 초쵀하고 몸은 말랐습니다… ” 스나가는 1888년 10월 13일 치 일기에 츠지 카쿠자부로(辻覚三郎)의 사망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누구길래? 바로 김옥균이 혁명에 실패한 뒤 제물포에서 일본배 치토세 마루호(千歳丸)를 탔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운영의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이 불거져 세상이 한바탕 떠들썩했다. 1886년 7월 13일 김옥균은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모토로부터 통지문을 받는다. 15일 안으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 추방명령이었다. 당시 김옥균은 치외법권 지역인 요코하마 프랑스 조계에 묵고 있었다. 그곳의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구명운동을 꾀할 생각이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쓰이 여관으로 퇴거시킨다. 연금조치다. 김옥균은 미국행을 서둔다. 여비마련을 위해 애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2주일만 더 연기해 줄 것을 외무성에 요청한다. 김옥균은 일본 측에 “다음번 미국 우편선의 출범일”에 출국하겠노라고 통보한다. 막상 그가 미국으로 떠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정부가 방침을 돌연 바꾼다. 오가사와라 고도로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유배를 보낸다는 게 아닌가. 분기탱천한 김옥균은 항의함과 동시에 외국 공사들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보낸다. “원래 본인은 15일 이내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받고 미국행을 준비중이었지만, 여비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갑자기 오가사와라로 추방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통보했습니다. 놀라움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6년 초 일본이다. 지운영이 고종의 위임장과 단도를 소지하고 일본에 와 있다. 김옥균을 암살하려 함이다. 김옥균의 심복 유혁로 등 세 사람은 지운영에 접근하여 위임장과 단도를 손에 넣는다. 그런 다음 경시청으로 가서 위임장과 단도를 증거로 제시하며 지운영을 고발한다. 경시청은 아연 긴장한다. 우선 김옥균에게 동경을 떠나도록 조치한다. 김옥균은 요코하마의 영국 조계지에 있는 그랜드호텔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을 사로잡을 방안을 알려준다.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찾아간다. 지운영에게 김옥균이 동경 체류를 금지당하여 요코하마로 이동했다는 것, 요코하마에는 치외법권이 있어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김옥균을 암살하기 편리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꼬임에 빠진 지운영은 요코하마로 들어간다. 그의 동정을 유혁로가 일본 경시청에 밀고한다. 거리를 두리번거리는 자운영을 일본 경찰이 체포한다. 구속된 지운영은 암살 밀명을 받고 도일한 사실을 자백하고 만다. 1886년 4월 29일 김옥균이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온다. 편지에서 김옥균은 지운영의 거동을 알리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운영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이다. 1851년 생으로 김옥균보다는 한 살 아래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고 개화 선각자 강위(姜瑋)에게서 시문을 배웠다고 한다. 한때 외무부서의 주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옥균은 그의 상사였다. 그러니까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개화에 눈을 뜬 지운영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술을 배워 돌아온 뒤 서울에서 사진관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가 갑신정변 뒤 섬뜩한 글 한 편을 쓴다. 이름하여 ‘지씨필검(池氏筆劍)’. ‘필검’이란 문자 그대로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검(殺人劍)을 뜻한다. 개화파의 ‘죄상’을 험하게 고발한 이 글이 조정에 알려지자, 지운영은 천하에 둘도 없는 관직명을 받는다.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 ‘바다건너 역적을 잡아 오는 사신’이라는 뜻이겠다. 이 희한한 직명과 함께 고종의 위임장과 함께 5만 원의 공작금까지 받는다. 그뿐이 아니다. 날이 퍼런 단도까지. 지운영이 일본에 잠입한 것은 1886년 초. 그는 고베로 가서 장갑복이라는 사람을 여러 차례 만나 김옥균의 동정을 파악한다. 그해 3월 지운영은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만남을 청한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2월 초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몸을 피한 뒤 김옥균은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조선은 자객을 밀파하여 김옥균을 제거하려 한다. 이때 장은규와 송병준이라는 자가 자청하고 나선다. 이 자들은 누구일까? 장은규는 의화군을 낳은 장 상궁의 오라비. 장 상궁이 민비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쫒겨나면서 곤경에 빠진 집안을 일으킬 목적으로 김옥균 암살을 자원한 것이다. 한편, 송병준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민씨 집안의 식객 노릇을 하던 중 개화파와 인연을 맺었다. 1882년 9월 김옥균과 박영효가 방일할 때 안내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김옥균과 아는 사이다. 1885년 9월 강은규와 송병준은 고종의 위임장과 자금을 받아 일본에 잠입한다. 김옥균에게 접근한 송병준이 넌지시 귀국을 종용한다. 국내에 들어가 동지들과 함께 병사를 모집하여 도성을 공격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김옥균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는 다른 길을 찾는다. 갑신정변 때 주동자들에 의해 영의정에 추대된 바 있는 이재원이 강화도 수령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김옥균은 편지를 쓴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내용이다. 곧 일본내 급진세력과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