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나는 얼마 전에 광안역에서 하인에게 민참판(민영익)의 편지를 주면서 공주 감사에게 전하라고 일렀다. 그 하인이 길을 5마일이나 벗어나 허탕 치고 내게 되돌아왔다. 나는 무척 피곤하고 외롭다. 이들 이상야릇한 이방인들 속에서 나는 때때로 심연 같은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그 기이한 느낌을 마땅히 표현할 길이 없다. 어떤 외국인도 나처럼 이교도들 속에 완전히 자신을 내던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인간은 세상 어디에서나 인간임을, 이 절대고독이야말로 나의 의지처임을. 비장(Pijang)이 전양묵(조지 포크의 통역)을 찾아와서 내가 무슨 음식을 먹는지 등등을 묻는다. 감사의 명함도 가져왔다. 내가 보낸 명함에 대한 답례이다. 비장이 말하길, 음식을 여태 가져오지 않은 아전들이 몹시 나쁘다고 말한다. 감사에게 보낸 민영익의 편지를 비장이 가지고 있다. 그 편지에는 내가 원하면 감사가 돈을 빌려주라고 적혀 있다. 이곳엔 돈이 없어요, 비장이 전양묵에게 말한다. 그 문제는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9시 20분 무렵이 되어서야 밥상이 왔다. 수일(조지 포크의 집사)의 말에 의하면, 나의 전령(하인)이 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밤의 천안 주막은 크고 깨끗한 편이었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끼었다. 주막 주위에 거위들이 어슬렁거린다. 8시 17분 주막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다. 9시 8분에 휴식. 남쪽으로 작은 계곡이 흐른다. 주위는 구릉이 달리고 있는 첩첩산중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행인들이 꽤 많다. 짐꾼들이 동물과 쌀, 담뱃대 그리고 상자를 지고 가고 있다. 주막들에서 많은 양의 놋쇠 그릇이 보인다. 행인도 많고 마을도 많다. 10시 4분 주막 출발. 남쪽으로 향하다가 약간 서쪽으로 틀었는데 감탄할 만하게 경작이 잘 된 지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논이다. 배수로도 완벽하다. 버려진 땅은 한 뙈기도 없다. 길을 따라 연달아 고을과 마을이 나타난다. 덕평 주막이라는 곳은 주위엔 관목이 우거져 있고 산악지역의 분위기가 풍긴다. 11시 16분 마을 언저리에서 휴식을 취하다. 11시 45분 주막이 있는 원토 마을 서쪽 끝에서 쉬었다. 조선에서 다랑이논을 처음 보다. 어떤 곳은 180m~270m까지 올라갔다. 조선의 서쪽 지형은 토양이 쉬이 씻겨 내려가 경작하기 어려운데 이곳은 그와 달라 이처럼 계단식 경작이 가능하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젯밤 경기도 소사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엄청난 기러기 떼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낮게 날았다. 밤에 기러기 소리에 종종 잠을 깼다. 오늘은 꽤꽥거리는 기러기 소리가 더욱 잦다. 정말 많은 기러기가 주변을 날아다닌다. 조선인들은 기러기를 건드리거나 잡아먹지 않는다. 대신에 기러기를 잡아 집을 지키는 용도로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안성장에 갔다. 규모가 매우 컸다. 족히 4천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군중이 나를 보러 밀려든다. 북새통 속에서 한 소년이 넘어지며 감을 떨어뜨린다. 순식간에 등을 밟히고 진흙탕에 머리를 쳐박힌다. 사람들에 에워싸인 나는 앞을 볼 수 없다. 내게 적개심을 보이거나 쏘아보는 기색은 없지만 무례한 호기심은 놀랍다. ‘’쉿”, “제미”라고 외치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천태만상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보인다. 사진을 찍어두고 싶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무례하여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내 일꾼들이 몽둥이질을 해댄다. 소년을 후려치기도 하고 갓을 잡아채기도 한다. 나는 악당 같은 그들의 행동을 막느라고 힘들었다. 10시 42분 가까스로 장터를 벗어났다. 매우 신기한 경험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1월 1일 아침 8. 58 : 서울 갓전골 입동(수표교 근처)의 집에서 출발 ▶ 갓전골 : 조선 시대 수표교 부근 '갓전골'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과 관철동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갓(冠)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많아 갓전골(갓전골)이라 불리게 된 지역이다. 9. 58:- Pa-chon-kori 도착 10. 40: 동작 나루를 건너 관악으로 향함 11. 9 : 승방돌 도착. 승방돌은 서울에서 20리, 과천까지는 10리 12. 29 : 과천의 끝 도착 낮 1.25 : 갈뫼(갈산)에서 휴식 2.10 : 사근내Sakunae(沙斤乃) 도착 ▶ 경기도 ‘사근내(沙斤乃)'는 오늘날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사근내' 또는 '사그내'는 오전동, 왕곡동 등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개울을 뜻하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자 표기로는 사근내(沙斤乃) 또는 사근천(沙斤川)이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평사천(平沙川), 고정동(古亭洞), 고고리(古古里), 내곡동(內谷洞) 등이 합쳐지면서 '고천리(현재의 고천동)'가 되었다. ‘사근내(沙斤乃)'의 역사적 역할 (사근내원-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1884년 11월 1일부터 44일 동안 한강 이남의 조선 남부를 탐사했다. 대학노트 약 350쪽을 여행기로 가득 채웠다. 삽화도 다수 그려 넣었다. 수많은 주막에 들렀다.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사람도 당시 그처럼 많은 주막을 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여행기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도 ‘주막’인 것 같다. 그가 숙박한 주막을 중심으로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먼저. 그가 여행기 첫 쪽에 적어 놓은 여행단 내역을 보겠다. (뒤침) 우리 여행단은 다음과 같다: 조지 C. 포크 미국 해군 소위 전양묵, 양반 정수일, 조지 포크의 수행원 가마꾼 12명 말몰이 소년 2명(11월 5일 공주에서 한 명이 추가되어 3명이 된다) 하인 1명 총계: 18명의 인원에 2필의 말, 3대의 가마 5 상자의 트렁크, 3개의 손가방, 사진기, 삼각대, 총기 상자, 돈 바구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5살의 조지 포크를 만나 보자. 해군사관학교에 막 들어간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자기 동생(포크의 삼촌)에게 거침없이 자랑하는 편지다. 매우 긴 편지의 손글씨 판독이 썩 어렵다. 오래 뚫어본 결과 거의 완파하였다. 번역문을 여기에 올린다. 1872년 6월 20일 마리에타에서 친애하는 조지 사관생도 조지 클레이턴 포크를 소개하려네. 나는 방금 아나폴리스에서 돌아왔네. 거기에서 녀석이 학교용 군함 산텍호(US S School Ship Santec)에 승선하는 것을 보았네. 이제 그 자초지종의 역사를 기술하려 하네. 5월 초 우리 지역 의회의 의원인 디키(Dickey)가 카운티 신문을 통해 밝혔다네. 곧 랑카스터 지역에서 14살에서 18살 사이의 모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선발시험을 열어 가장 우수한 인재를 한 명 뽑아 해군사관학교 생도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디키 의원은 브룩스 교수, 에반스 교수 그리고 헤이스 판사를 심사 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체검사는 블랙우드 박사에게 위촉했다네. 이 소식을 나는 아들 녀석에게 알려주면서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 “아빠, 딱 제게 맞군요, 도전해 보고 싶어요.” 하더라구. 나는 녀석를 데리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2월 중순 조지 포크가 사경을 헤매던 중 고종이 보낸 관리를 만난 것은 12월 13일이었다. 그 날짜 일기다. 12월 13일 8시 19분 주막(경기도 이천)을 나섰다.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날씨가 카랑하다.(쇳소리처럼 높고 맑다) 4리 정도를 간다. 언덕을 넘는다. 가마꾼들이 흔연하다. 그들이 견뎌내는 게 내겐 경이롭다. 길 위에 농부 몇 명이 보인다. 10시 2분에 5분 동안 휴식을 취하다. 좁은 골짜기를 내려간다. 나무가 많다. 가마꾼 턱수염 위에 얼음이 맺혀 있다. 11시 48분 어떤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다. 가마꾼들이 술을 마신다. 길이 양호하고 평탄했다. 하지만 인적은 드물다. 12시 38분 길가에서 휴식. 이곳까지는 길이 내내 좋았다. 우리는 지금 북서쪽으로 뻗은 골짜기 안에 있다. 금릉위 박영효가 그저께 인천의 일본인 거류지에서 서울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길에서 들었노라고 수일이 말한다. 1시 36분 출발한다. 곧 저쪽에서 큰 외침 소리가 들린다. ‘어명이다. 멈춰라!’. 나의 가마가 내려진다. 겁에 질린 가마꾼들이 얼어붙은 듯 서 있다. 저쪽에선 전양묵이 가마 속의 관리와 무언가 말을 나누고 있다. 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이 지도는 1872년에 만들어진 경기도 광주 지도 일부다. 방향은 왼쪽이 남쪽이고 위쪽이 서쪽이다. 이 지도에서 오른쪽 맨 위에 남한산성의 동대문이 보인다. 보다시피 산수화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지리 정보를 잘 갖추고 있다. 유심히 보면 주막(酒幕) 정보가 많이 보인다. 위에서만도 4개의 주막을 찾아볼 수 있다. 조지 포크는 1884년 12월 13일 이천의 주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여행기에 세밀화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그 여정이 지도상에서 어디일까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여기 1872년도 지도를 보니 감이 어느 정도 잡힌다. 사경을 헤매던 그가 기적처럼 임금이 보낸 관리(선전관-宣傳官)를 만났던 길, 그리고 그들의 안내로 묵었던 주막을 이 지도에서 가늠해 보았다. 어명을 들고 나타난 관리를 만나는 이적이 일어난 곳은 보라색 네모 친 구간의 길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또한 그들이 만난 뒤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묵었던 주막은 보라색 물방울 모양을 친 곳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한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조선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조선인의 마음속 깊은 곳을 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정부가 잘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여기 와 있는 외국인들이 비행을 저질러도 그들을 손님으로 여겨 모른 척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서양인들은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겁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조선민족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침략이라도 당한다면 그들은 끝장을 보고 말 겁니다. (1885.5.4 부모님 앞 편지)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우리의 의병과 독립군은, 포크의 말대로 끝장을 보고 말 것이었다. 지난해 2025년(민기-民紀 원년)엔 내란세력에 의하여 또 침략을 당했다. 그리고 끝장을 보고 말았다. 포크는 그것을 ‘미리 보기’ 한 게 아닌가?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제물포에 입항하기 일주일 전인 1884년 5월 21일 나가사키에서 조지 포크는 난생처음으로 조선 음식을 먹어본다. 그 소감을 고국의 가족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리운 부모님, (…) 오늘 저는 조선 친구들을 보러 갔습니다.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unboundedly glad to see me). ……그들이 제게 코리아 음식(Korean meal)을 대접했답니다. 매우 맛있었어요. 일반 외국인의 입에는 그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저는 매우 좋았습니다. 일본 음식보다 유럽인의 구미에 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의 여느 외국인과 달리 조선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극동지역의 모든 생활 방식에 이상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죠. 코리아 음식이 그렇게 좋다는 걸 발견하고 저는 무척 기뻤답니다. 걱정했거든요. 조선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걱정은 이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곳 나가사키를 떠나면 저는 정말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이후로는 모든 편지가 생소한 장소에서 발송될 겁니다. 이 편지가 트렌턴호의 해군 소위로서 보내는 마지막 소식이 되겠군요. (…) 이제 우리는 조지 포크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