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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는 안돼, 인공지능에 가르쳐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7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시인이 시에 자기 시에 ‘동해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동해의 ‘해(海)’라는 한자말과 우리말 ‘바다’를 겹쳐서 쓰는 분명한 동의어 중복입니다. ‘역전앞’, ‘너른광장’, ‘처갓집’, ‘해변가’처럼 말입니다. 이를 보고 인공지능 <제미나이>에 ‘동해바다’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미나이’는 “동해 바다는 한반도 동쪽에 위치하며, 맑고 푸른 물과 깊은 수심, 아름다운 일출로 유명합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등지의 해변은 넓은 백사장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많은 여행객이 찾는 대표적인 치유와 휴식의 공간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동해바다는 '동해'에 '바다'를 쓸데없이 덧붙여 쓰는 잘못된 말이다.”라고 지적했더니 “국어학적으로 '동해바다'는 틀린 말이 아닌 표준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동해바다'가 '동해'를 강조하여 이르는 단어로 정식 등록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렇게 돼 있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다. 많은 사람이 쓴다고 하더라도 12년 이상 국어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는 할 말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은 입추, 가을은 이미 잉태했으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7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 여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까스로 마련되는 가을의 거점. 위는 정연복 시인의 <한여름의 입추>라는 시 일부입니다. 시인은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3번째 입추(立秋)로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날입니다. 해가 지나가는 길인 황경(黃經)이 135°에 도달하는 때지요.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종요로운 때이므로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입추가 지난 뒤 비가 5일 이상 계속되면 비가 멎기를 바라는 기청제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는 비가 오기는커녕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위 시 <한여름의 입추> 뒷부분에는 “여름의 끝 아직 저만치 있어도, 가을 또한 첫발을 내디뎠으니. 익을 대로 푹 익어버린 한여름 속에, 머잖아 아기같이 가을은 생겨나리.”라고 언어의 농축을 합니다. 지금 불볕더위기 기승을 부려 열대야로 몸살을 앓고 온열환자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지만, 입

한의학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동의보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7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펴내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이리저리 떠도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펴내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길이 잘 든 말 1필을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책을 내의원이 국(局)을 설치해 속히 찍게 한 다음 안팎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광해군일기[정초본]》 32권, 광해 2년(1610년) 8월 6일 기록으로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고, 임금이 속히 펴내라고 했다는 기록입니다. 《동의보감》은 허준(1539∼1615)이 16년 동안의 연구 끝에 완성한 책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했는데 총 25권 25책으로 나무활자로 발행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은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ㆍ곽란(토하고 설사를 하는 급성 위장병)ㆍ부인병ㆍ소아병 관계의 『자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

서얼 신분도 의사(醫司) 과거를 보게 하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7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길동이 절을 하고 엎드려 아뢰었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입어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고, 육축(가축)도 부모의 은혜를 아는데, 소인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옵니까?’” 이는 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호부호형(呼父呼兄) 못 하는 서얼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대목입니다. 서얼(庶孼)은 조선 시대 양반 가문에서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를 통칭하는 신분 계급인데 그 가운데서도 양인(일반 평민) 신분의 첩이 낳은 자식은 서자(庶子)고, 천인(노비 등) 신분의 첩이 낳은 자식 얼자(孽子)라고 했지요. 서얼은 태종 때 도입된 서얼금고법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문과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연산군일기》 26권, 연산 3년(1497년) 8월 5일의 기록처럼 서얼이라도 의료 업무를 맡은 관청에 들어가려는 과거는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의공(醫工)은 천해서 오랫동안 선비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어찌 문ㆍ·무 양과(兩科)와 견줘서 흠이 있는 자를 모두 취택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신 등의 생각엔 신묘년 《대전(大典

조선시대 서빙고의 얼음, 죄수에게도 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7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조선시대에 나라에서는 겨울에 한강 물이 4치 곧 약 12cm 이상 두껍게 얼면 예조의 지휘 아래 군인과 노비들을 동원해 얼음을 깼습니다(채빙). 얼음 한 덩이는 가로 4척(1척=약 30.3cm), 세로 6척, 두께 1척 이상의 규격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얼음을 뜰 때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아 사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지요. 그렇게 만든 얼음덩어리는 한강 가 두뭇개, 곧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의 동빙고와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용산 미군기지 안) 기슭에 있었던 서빙고에 보관하였지요.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나라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임금의 친척과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주었는데 활인서의 병자, 그리고 의금부 죄수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서빙고의 얼음을 정당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 관리들에게 '빙표(氷票)'라는 얼음 교환권을 지급했습니다.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받을 수

날마다 국정을 반성하고자 쓴 《일성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6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여러 규장각의 벼슬아치ㆍ승지(承旨)ㆍ홍문관의 벼슬아치 등에게 명하여 《일성록(日省錄)》을 엮게 하였다. 임금이 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날마다 쓰는 기록이 있어 말과 한 일을 기록하여 반성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다.(가운데 줄임) 증자(曾子)가 하루 세 번 자기 몸을 살핀 뜻을 따와서 그 책을 《일성록(日省錄)》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정조 24년에까지 이르렀으니 무릇 6백 75책이었다.” 이는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년) 7월 30일 자 《일성록(日省錄)》에 관한 기록입니다. "옛날을 보는 것은 지금을 살피는 것만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반추하는 것만 못하다."라는 서문에 따라 《일성록》은 국정의 주요 현안들을 표제와 세부 사실로 나누어 기록하여 국정 운영에 참고할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체재로 엮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성록》은 정조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을 인용하여 ‘존현각일기’였던 것을 ‘일성록(日省錄)’으로 했지요. 이 책은 1760년(영조 36)에서 1910년

여름, 비 올 때 입던 도롱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26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蓑笠橫鋤細雨中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石田耨罷松陰裏 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童驅牛羊驚我睡 목동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와다. 위는 조선 전기 문신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삿갓에 도롱이 입고>란 한시(漢詩)입니다. ‘도롱이’는 농촌에서 여름날 비 오면 입던 재래식 비옷입니다. 도롱이는 지방에 따라 도랭이, 두랭이, 둥구리, 느역, 도롱옷, 드렁이, 도링이, 되렝이, 되롱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한자말로는 녹사의(綠蓑衣), 사의(蓑衣)라고도 합니다. 도롱이는 띠나 그와 비슷한 풀, 볏짚, 보릿짚, 밀짚 따위로 만듭니다. 안쪽은 재료를 촘촘하게 고루 잇달아 엮고, 거죽은 풀의 줄거리를 아래로 드리워서 빗물이 겉으로만 흘러내리고 안으로는 스미지 않게 한 것입니다. 농촌에서는 비 오는 날 나들이를 하거나 들일할 때 어깨, 허리에 걸쳤는데 비가 올 때 도롱이를 입고 머리에 모자처럼 대나무를 엮어 만든 대패랭이나 삿갓을 쓰는데 더운 여름날에 쓰면 시원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이 도롱이를 비옷만이 아닌 추위를 막는 방한구로도 썼습니다. 한편, 짚을 거적처럼 촘촘히 엮어 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