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신(文臣)을 선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흥시키시는 동시에, 문과는 어렵고 무과는 쉬운 때문으로, 자제(子弟)들이 많이 무과로 가니, 지금부터는 《사서(四書, 유교의 경전인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을 아울러 말함)》를 통달한 뒤에라야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는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년) 2월 16일 기록으로 좌의정 박은이 세종께 아뢴 말인데 세종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세종 때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고, 큰 학문적 성과도 이룩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과는 집현전(集賢殿)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집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문 연구기관인데 조선의 으뜸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책을 펴내는 등 활동을 했습니다. ‘집현전’이라는 이름은 고려 인종 때 처음 나왔고 조선 정종 때도 집현전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기구였지요.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 연구의 중심기구로 삼는 한편, 학문과 품성이 뛰어난 으뜸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집현전은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이(東夷)의 나라 이름으로 ‘조선(朝鮮)’이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위는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2월 15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1392년 7월 17일 임금에 오른 태조는 사신을 보내 새로운 왕조의 이름으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가운데서 골라달라고 하자 명나라는 새로운 왕조의 이름으로 ‘조선’을 선택해 보냈습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단군조선을 이어받았고 기자조선ㆍ위만조선처럼 이미 예전에 있었던 이름이었으며,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점입니다. 태조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조가 바뀐 사실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명나라 홍무제는 고려의 일은 고려인들이 알아서 하되 다만, 나라 이름을 바꾼다면 바로 알려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명나라 예부의 공문을 접수한 이성계는 그날로 교지를 반포해 새 왕조의 이름으로 조선을 선포했습니다. 이후부터 고려를 이은 새 왕조의 공식 나라 이름으로 조선이 쓰인 것이지요. 다만 이 이름은 단군조선ㆍ고구려ㆍ백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높이 7.9cm, 지름 18.8cm의 국보 <청자 상감 모란무늬 은테 대접>이 있습니다. 이는 아가리에 은(銀)으로 테두리를 두른 매우 희귀한 대접으로 이런 도자기를 ‘금구자기(金釦瓷器)’라고 부릅니다. 금속 테두리 덕분에 금속의 광택이 나 훨씬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또 도자기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입 부분을 보호하고, 이미 파손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금속 테두리를 두르기도 했습니다. 금구자기(金釦瓷器)는 고려와 중국에서 성행하였던 고급 자기로, 이러한 형태의 금구장식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금구자기가 유행하기 이전 고대에는 불로장생, 무병장수를 위해 ‘금은기(金銀器)’를 주로 상류층에서 즐겨 썼습니다. 이러한 금은기의 유행은 금속원료의 부족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그 탓에 금은기를 대신하여 금구자기를 빚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쪽에는 돋을새김, 바깥쪽에는 상감기법(象嵌技法, 금속·도자기 등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파서 그 속에 금은 등을 넣어 채우는 기술)을 사용하였고 또 안쪽 가운데에는 밑바닥에 둥그런 원을 새기고 그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