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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 때 ‘지부상소’가 있었더라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8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라를 위해 끝내 목숨을 바친 조선의 마지막 선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삶과 정신이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충청남도 청양군은 지난해 11월 창작 뮤지컬 <마지막 선비 – 면암 최익현>을 선보였는데 이 작품은 의병정신의 뿌리를 조명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익현 선생에게 돋보이는 것 가운데는 ‘지부상소’가 있습니다. ‘지부상소(持斧上疏)’는 지닐 ‘지(持)’ 자에 도끼 ‘부(斧)’ 자를 쓰는데 곧 도끼를 옆에 놓고, 상소를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하로서 내가 올리는 상소가 부당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도끼로 나의 목을 치라는 것이어서 폭군이라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부상소는 고려시대 충선왕의 실정을 지적하는 우탁 선생의 상소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뒤 조선 중기 수렴청정을 하며 실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낱 과부로 깎아내린 남명 조식의 상소, 조선 말기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해 올린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상소까지 목숨을 건 상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에게 가장 격렬한 그리고 용기 있는 상소문을 올린 이는 헌종 때 겨우 열다섯 살이었던 기생 초월

107년 전 오늘은 고종황제가 독살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8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7년 전인 1919년 오늘(1월 21일) 고종황제는 묘시(卯時, 아침 5시부터 7시까지)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일제는 고종의 죽음이 뇌일혈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우 건강한 상태였던 황제는 죽은 뒤 혀와 이빨이 타 없어지고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주검으로 발견되어 수의로 갈아입히기 위해서 입은 옷을 찢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독살당한 주검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하지요. 고종이 ‘강제 양위식’을 당한 뒤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은 일본과 병합되었습니다. 고종은 그 뒤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특사를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자주와 독립’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종이 일제로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고 이 때문에 독살했을 것이라는 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후 고종의 장례식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명백한 황제 독살 정황을 전해 들은 백성들은 태극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황제가 만든 탑골공원에서, 황제의 궁궐이었던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그들은 식민지 백성이 아닌 이미 망해버린

내일 ‘대한(大寒)’, 어려운 이들 돌아보는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8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 20일은 24절기의 맨 마지막 날 ‘대한(大寒)’입니다. 이름만 보면 가장 추운 날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작은 추위라는 소한에 가장 추운 날의 지위를 빼앗겼습니다. 이날은 세끼 가운데 꼭 한 끼는 꼭 죽을 먹었지요. 그것은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일하지 않고 쉬는 때이므로 삼시 세끼 밥 먹기가 죄스러워 그랬다고 합니다. 또 겨울에 양식이 있다고 하여 아끼지 않으면 보릿고개 때 굶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뜻도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등 집안 손질은 언제나 ‘신구간(新舊間)’에 하는 것이 풍습입니다. 이때 신구간이란 대한(大寒) 뒤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2010년은 1월 25일∼2월 1일)로 보통 1주일 정도를 말합니다. 이 기간에는 인간들의 일상에 관여하는 신들이 모두 옥황상제에게 가 있는 날이라 무엇을 해도 탈이 없다는 재미난 속설이 있습니다. 추운 엄동설한입니다. 주변엔 연탄불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여 냉골인 방에서 혹한을 견뎌야 하는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서울 강남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에 큰불이 나서 갈 곳 없는 마지막 판자촌 사람

오구라가 약탈해 간 ‘계룡산 분청사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8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일본 도쿄에 있는 ‘국립도쿄박물관’에 가면 1,100여 점의 ‘오구라컬렉션’ 전시품이 있습니다. '오구라컬렉션'은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에서 남선합동전기라는 회사를 차려 막대한 부를 이루고 그 축척한 재산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총독부의 묵인 아래 닥치는 대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고분을 도굴하는 등 부당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3천여 점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내 갔지요. 그 가운데 1981년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아들이 국립도쿄박물관에 1,100여 점을 기증했습니다. 1958년 제4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은 약탈돼 일본에 있는 것이 확실한 문화재를 열거하면서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을 명시했는데 개인 소장 품이라 할지라도 그 값어치와 중요성으로 볼 때 본래 있던 자리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오구라컬렉션 등은 개인 소유이므로 나라가 반환에 개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본 정부는 기증받은 오구라컬렉션을 한국과 그 어떤 혐의도 없이 도쿄박물관으로 모든 소유권을 양도해 버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출토

사관이 임금의 곁에서 기록한 일기 시정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8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사초에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닌 것으로 단지 사람을 투박하게 만들 뿐입니다. 의논하는 사람 가운데 만약 이름을 쓴다면 직필(直筆)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는 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옛적에 사필(史筆)을 잡은 자는 도끼가 앞에 있더라도 이를 피하지 않고 썼습니다. 만약 강개(慷慨)한 선비라면 임금의 허물에 대하여 면전에서 옳지 않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하게 말하는 법인데 유독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사초에 대해서만 두려워하여 꺼리겠습니까? 이미 올린 것은 추서(追書)할 필요가 없거니와 아직 올리지 않은 것은 옛 제도대로 이름을 쓸 것을 영원한 법식으로 만드소서.“ 이는 《명종실록》 9권, 명종 4년(1549년) 1월 13일에 있는 기록입니다. ‘사관(史官)’이 임금의 곁에서 날마다 기록한 일기를 ‘시정기(時政記)’라고 하는데, 시정기는 매달 책으로 묶어서 춘추관에 보관하고, 시정기에 쓸 수 없는 긴밀한 이야기는 사관이 따로 적어 자기 집에 보관했지요. 사관이 집에 간직한 글과 시정기가 훗날 실록을 만드는 기초 자료인 ‘사초(史草)’가 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호랑이’는 범과 이리를 아울러 말하는 것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8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라는 말이 무려 877차례나 등장합니다. 《태조실록》 1년 윤12월 20일 “성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흥국리 사람이 쏘아 죽였다.”로 시작하여 《태종실록》 5년 7월 25일 “밤에 호랑이가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 《세종실록》 7년 8월 7일 “삼군 진무와 호랑이 잡는 갑사(甲士) 10명을 보내어 잡게 하였다.” 등의 기록이 있습니다. 또 《단종실록》 2년 8월 17일에는 “영산현의 박연수는 나이가 열 살인데, 그 아비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므로 낫을 휘두르며 쫓아가서 호랑이가 마침내 버리고 갔습니다.”라는 믿지 못할 기록도 있습니다. 이 예문의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모두 한자 ‘호(虎)’로 표기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국역하면서 호랑이와 범을 섞어 썼습니다. 그러면 이 “범”과 호랑이는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먼저 국어사전에서 ‘범’을 찾아보면 “같은 말=호랑이”라면서 “‘범’과 ‘호랑이’는 모두 널리 쓰이므로 둘 다 표준어로 삼는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1459년에 펴낸 《월인석보》에 보면 ‘호(虎)’와 ‘랑(狼)’은 각각 범과 이리(늑대보다 큰 갯과 동물)를 말한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