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연합뉴스 3월 9일 기사에는 “교과서 한자 병기되나…‘朴정부 때 소용돌이’ 반발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국가교육위원회가 ‘학생들의 문해력 신장을 위해 교과서에 한자 병기를 포함한 한자 교육 강화를 검토한다.’라는 것입니다. 김경회 국교위 문해력 특별위원장은 "한자 교육 문제를 충분히 개방적으로 논의하되, 확정되기 전에 학생과 학부모에게 혼란을 주는 일은 없게 하겠다"라고 강조했지만 말입니다. 지난 2024년 578돌 한글날에는 언론에 “시발점'이라고 하니 학생들이 ‘왜 욕해요?’”라고 했다면서 학생들 문해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라는 기사들이 올라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578돌 한글날을 앞두고 전국 5천848명의 초ㆍ중ㆍ고 교원을 대상으로 벌인 '학생 문해력 실태 교원 인식 조사' 결과를 두고 보도한 것입니다. 과연 이런 현상을 무조건 ‘문해력’ 부족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예를 든 것들을 보면 위 시발점(始發點) 말고도 "두발 자유화 토론을 하는데, 두발이 두 다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했다고 하더라”,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수도라는 말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ᄂᆞᆫ거슨 샹하귀쳔이 다 보게 홈이라 ᄯᅩ 국문을 이러케 귀졀을 ᄯᅦ여 쓴즉 아모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잇ᄂᆞᆫ 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ᄒᆞᆷ이라" 이는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 창간한 우리나라 첫 민간 신문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입니다. 초기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 크기였습니다. 《독립신문》은 모두 4면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했는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만 3면을,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영문(The Independent)으로 1면을 구성했지요. 또한 한글 보급과 이해를 돕기 위해 처음으로 국문 띄어쓰기를 도입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민중에게 자주독립 정신과 근대적 민주주의 의식을 북돋웠습니다. 1898년 7월 이전에는 주 3회 격일로, 그 이후에는 일간으로 발행되다가 1899년 12월 4일 자로 폐간되었지요. 《독립신문》 한 부를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기도 했으며 양구군수가 장에 나와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을 읽어준 사례가 보도(1898.11.9. 제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근래 팔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경에 허덕이니 걱정스러운 마음 끝이 없다. 이는 나의 자수(自修, 스스로 학문을 닦음)가 미진한 탓이나 감사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전에 이미 명하여 농사일과 누에 치는 일에 힘쓰도록 하였는데도 오히려 힘쓰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화에 대하여도 아직 그 도리를 다하는 자를 못 보겠으니,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권하여 읽게 하라.“ 이는 《중종실록》 35권, 중종 14년(1519년) 4월 5일 기록으로 중종이 《여씨향약》을 모든 백성이 읽도록 하게 하라는 하교입니다.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한글로 풀이하여 펴낸 책이지요. 중국 남송의 주희가 주석을 단 《주자증손여씨향약》에 구결(토)을 달고 한글로 뒤쳐 향약을 보급하고 백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원전보다도 주석을 풍부하게 달았지요. 《여씨향약언해》는 1518년에 김안국이 펴냈으나, 이듬해인 1519년에 이를 중앙정부에서 교정한 중간본(重刊本)이 간행되었습니다. 중간본 말고도 여러 시기의 이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