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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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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노역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3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십오 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 하루 놀려다가 뚜드려 맞았네 / 몽두리 맞고서 굴 안에 끌려와서 /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 죽은 아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 감독놈들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석탄 담아내라 했네.” 이 노래는 <강제연행된 조선인 석탄광부의 노래> 가운데 일부입니다. 지난 2010년 8월 6일부터 17일까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주관으로 갔던 '경술국치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나가사키,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등지의 조선인 강제노동현장과 여러 추도시설 그리고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 강제로 합동 제사 되는 조선인 2만 1천 명의 영혼을 유족이 원하는 곳에서 제사 지낼 수 있도록 요구하는 답사 일정이었습니다. 그때 답사단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끌려가서 강제노역하다가 죽은 조선인 얘기를 듣고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요. 최근 언론에는 “사도광산 뇌관이 끝내 터져 군함도에 이어 일본에 또 '뒤통수'를 맞았다.”라고 성토하는 기사가 줄을 잇고

조선말의 무진장한 노다지 〈임꺽정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2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96년 전인 1928년 오늘(11월 21일)은 홍명희 장편 소설 〈임꺽정전(林巨正傳)〉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임꺽정전〉은 1939년 3월까지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강제 폐간 조처로 다시 《조광(朝光)》으로 옮겨 연재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이 작품의 이름은 처음에 <임꺽정전(林巨正傳)>이었으나 1937년 연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면서 <임꺽정>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가장 큰 화적패였던 임꺽정 부대의 활동상을 그린 역사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에 이르는 16세기 중반 조선 중기의 역사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특히 봉건적 질곡을 뚫고 일어선 평민 이하 일반 백성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근대 역사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그동안 역사소설이 철저히 왕조 중심이거나 야사에 의지한 데 견주어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 주었음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 '살아 있는 으뜸 우리말사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일본어 번역 투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입말의 전통을 고스

석주명, 우리 나비에 우리말 이름 지어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2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역사 교사들이 한 컷의 사진으로 풀어낸 《한 컷 한국사(해냄에듀)》에 보면 “석주명, 우리 나비에 우리말 이름을 지어 주다”란 글이 있습니다. 석주명은 일본에서 농생물학을 배우고 돌아와 1913년부터 모교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면서 나비 연구에 전념한 분입니다. 선생은 방학 때 고향에 가는 학생들에게 나비 200마리씩 잡아 오라는 방학숙제를 냈고, 이래도 부족한 것은 직접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채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채집하고 관찰한 다음 서양과 일본학자들이 잘못 분류한 844종을 정리했으며, 선생의 연구는 영국왕립학회의 요청으로 1940년에 펴낸 《조선산 나비 총목록》이라는 책에 담겨, 전 세계에 팔렸다고 하지요, 이 책에는 일본 학자들이 붙인 한국산 나비의 이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새로 지어 붙였습니다. 이때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했는데 이에 안재홍, 정인보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조선학 운동’을 펼쳤고, 석주명 선생은 나비학 연구도 조선학의 일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생은 연구 대상을 철저하게 ‘조선 나비’로 한정하였고, 논문 대부분은 “조선산~”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고

조선시대, ‘달거리’를 어떻게 처리했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2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인 여성들 대부분은 한 달에 한 번, 그들만의 피를 보는 작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흔히 성숙한 여성의 자궁에서 약 28일을 주기로 출혈하는 생리 현상 곧 월경(月經)이라고 하는 것인데 월사(月事), 월객(月客)으로도 부르고, 우리말로는 ‘달거리’라고 하며, 빗대어 ‘이슬’, ‘몸엣것’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이야 다양한 크기를 갖춘 생리대를 쉽게 살 수 있음은 물론, 각종 모양의 날개가 달린 최첨단 생리대에 음이온이나 한방 처리된 특수 생리대까지 개발돼 그 불편은 많이 줄었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엔 여성들에게 생리는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것은 물론, 꽁꽁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때는 생리대를 ‘개짐’ 또는 ‘서답’이라 하여 하여 주로 광목 옷감을 빨아서 재활용하는 것었습니다. 딸이 생리를 시작하면 어머니가 마련해 둔 광목천을 내어주며, 달거리 때 이것을 쓰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지요. 때로는 개짐에 베를 쓰기도 했는데 핏물이 잘 지워지는 대신 뻣뻣할 수 있기에 오래 입은 삼베옷을 뜯어서 재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지금과 달리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여, 비밀스럽게 밤에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든 갓난아이 두렁치마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2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갓난아이에게 입히던 옷으로 배냇저고리와 두렁치마가 있었습니다. 웃옷으로 입히던 배냇저고리는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 옷으로 배내옷, 깃저고리라고도 합니다. 희고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로 만드는데, 등에 솔기를 하지 않고 배와 손을 덮을 정도로 길게 만들었지요. 그런가 하면 아랫도리로 입히던 두렁치마는 조선시대 어린아이의 배부터 아랫도리를 둘러주는 기능적인 치마로서 '두렁이', 또는 '배두렁이'라고도 하지요. 두렁치마는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워있는 아기에게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기저귀 갈기에도 편리하게 했습니다. 요즘처럼 옷감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아기 속옷도 없던 옛날에 몸이 여린 갓난아이에게 보온용으로 입혔던 것이지요. 흔히 무명이나 명주, 융 따위를 겹으로 하거나 솜을 두어 만들었으며 누비로 만든 것이 많았습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 보면 두 이레쯤(14일) 될 때 이 두렁치마를 입히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기들이 기어다니기 전까지는 남아나 여아같이 입었지만, 자라면서 주로 여아들만 입었습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두렁치마는 1900년대 여아용 누비 두

입동, 사람 아닌 것들의 안부 궁금할 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2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입 동 - 이덕규 곡식 한 톨이라도 축내면 그만큼 사람이 굶는다 가을걷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빈손으로 떠난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 절기 입동(立冬)으로 이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섭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10월부터 정월까지의 풍속으로 궁궐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임금에게 우유를 만들어 바치고,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임금이나 나이 많은 벼슬아치들에게 우유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제 임금이 아니어도 우유를 맘껏 마실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처지일 것입니다. 이런 궁궐의 풍습처럼 민간에서도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아름다운 풍속도 있는데 이는 입동 등에 나이 든 노인들을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데 이때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운 집이라도 치계미를 위해 곡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도랑탕 잔치로 대신했지요. 입동 무렵 도랑을 파면 누렇게 살이 찐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는데 이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하고는 이를 ‘도랑탕 잔치’라고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