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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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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흉년에는 소를 잡지 못하게 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6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를 잡지 못하게 함은 올해 농정(農政)과 가장 큰 관계가 있는 일이다. 평년에는 혹 임시로 장패(藏牌)* 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는 풍년이 들어 흥청거리는 정사이지 결코 흉년에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의정부에서는 앞서 미리 각 행정구역에 알려 전보다 갑절 엄히 단속하게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도 미리 단속함과 아울러 도성의 안팎에 거듭 분명히 알아듣게 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좌ㆍ우 포도대장도 한결같이 두루 알도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2월 1일 기록으로 흉년을 맞아 소를 잡지 못하게 함을 온 나라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는 조선시대 농경 사회에서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등 농사의 핵심 일꾼으로 여기는데 흉년에는 곡식 생산이 더욱 어려워지므로, 소를 보호해 농업 기반을 지키는 것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근본으로 알았던 사회(조선시대) 전체의 생존에 직결되었지요. 또한 이 ‘우금’은 소 돌림병이 생겼을 때도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도살한 사람을 유배 보내는 등 엄히 다스렸어도 소고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를 읽는 종요로운 역사서 《고려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6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1452년) 11월 28일 기록에 보면 “춘추관에서 《고려사》를 인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란 내용이 보입니다. 《고려사》는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ㆍ정인지ㆍ이선제 등이 세종의 명으로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문종 원년에 펴낸 기전체의 역사서지요. 여기서 기전체란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태조에서 공양왕까지 32명 임금의 연대기인 세가 46권, 천문지에서 형법지까지 10조목의 지 39권, 연표 2권, 1,008명의 열전 50권, 목록 2권을 합해 모두 139권 75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려사》를 펴낸 목적은 조선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고려 말기의 부패와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반영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 서술 태도는 유지되었습니다. 특히 그 편찬 체재가 기전체였으므로 반복되는 기사도 모두 실을 수 있었으며,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빠뜨리지 않고 거의 모두 수록했는데 인물 평가에도 객관적인 서술로 고쳐서 썼으며, 한 개인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자료가 있을

흥화문과 궁터만 남은 한 많은 궁궐 ‘경희궁’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6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대로 네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900m쯤 가면 서울역사박물관을 막 지나 오른쪽에 한자로 ‘興化門(흥화문)’이라고 쓰인 경희궁의 문이 보입니다. 광해군은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습니다. 이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東闕)인 창덕궁에 견줘 서궐(西闕)이라고 불렀지요. 이 경희궁에는 여러 임금이 머물렀는데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승하했습니다. 또 경종이 태어난 곳도, 영조가 승하한 곳도, 정조가 즉위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때 정전ㆍ동궁ㆍ침전ㆍ제별당ㆍ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그 넓이가 자그마치 7만 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쓰이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7년 궁의 서쪽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5년엔 경성중학교까지 들어서게 됩니다. 심지어 광복 뒤에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쓰이면서

소나무가 자라는 땅에는 장사도 못 지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6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제급은 금표가 있는 땅에 장사를 지낸 죄가 있고, 백윤진은 점지(點指)해 준 죄가 있다.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고도 그 땅에 장사 지낸 것은 죽을죄고,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면서도 장사를 지내라 한 것도 죽을죄다. 똑같은 죽을죄로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나라에 법이 있는 바에 어찌 죽음을 면하겠는가? 다만 (가운데 줄임) 그 할아비의 공은 나라에서 잊지 못할 바가 있으니, 특별히 대대로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한 가닥 목숨만은 붙여주어 사형에서 감하고 원악도(遠惡島,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에 유배토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1월 24일 기록으로 나라가 소나무를 기르기에 금표를 세운 산에 몰래 장사를 지낸 사람을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토록 한다는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음은 물론 소나무는 임금의 관을 짜는 데도 쓰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인 배 만들 때도 쓴 귀한 나무였습니다. 특히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고 으뜸으로 쳤습니다. 또 나라에서는 '황장금표(黃腸禁標

내일은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절기 ‘소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6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22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인 소설입니다. 절기 이름이 작은 눈이 내린다는 뜻으로 소설(小雪)인데 추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겨울 채비를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추므로 작은 봄 곧 소춘(小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때는 평균 기온이 5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첫 추위가 옵니다. 그래서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전할 정도지요. 그런가 하면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으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소설 전에 김장하기 위해 서두르고,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일들에 분주합니다.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고,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하며,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두기도 하지요. 참고로 같은 동아시아권인 중국과 일본의 소설 풍습 가운데 재미난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영양 보충과 체온을 높이기 위해 만두, 고기 등을 먹습니다. “겨울엔 따뜻한 음식으로 기를 보한다(补冬)”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츠케모노(

과거시험, 글을 짓는 ‘거벽’이 함께 들어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6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에 낸 문제가 혹 다음 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것이 혹 지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역시 국시(國試)에서도 나올 수 있어서 혹 남의 작품을 외웠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고, (가운데 줄임) 또 과장이 엄격하지 못해 무뢰배가 요란하게 밟고 다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갖은 수단으로 엿보고, 책을 끼고 들어와 답안을 대신 써주므로 공부하는 자가 이 탓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자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8년(1794)에는 "손으로 붓 잡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분수없는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과거에 응시한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은 과거장에 여러 명의 조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 글씨를 써주는 '서수(書手)'가 따라 들어갑니다. 정작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닥 안고 대리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군(先接軍)'이 있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