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이후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동양은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경기도를 빼고서도 태종 4년(1404)에서 25년 뒤인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호수와 사람도 각기 27,607호, 319,339구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밭과 호수와 사람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것은 곧 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 ‧ 호구의 증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라의 수세지(收稅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완창회의 시작은 1960년대 말, 박동진이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약 5시간 남짓의 <흥보가>를 한 자리에서 부른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박동진의 완창 발표회는 처음과 끝을 갖춘 판소리의 완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는 점, 특히 완창 판소리가 관객들에게 재미있는 장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는 이야기, 이러한 맥락에서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완창회를 준비해 왔다는 점도 분명 의미가 깊은 그 만의 판소리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성경린 원장이 전해 준 말, “국립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도 받는 곳”'이라는 말에 매일 같이 새벽 출근을 하였다는 박동진의 이야기는 진정 명창의 길이 험난하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열심히 연습하는 과정을 당시 젊은 연구원으로 있던 글쓴이도 여러 차례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그 앞 동네인 원서동에서 내려와 국악원 문을 두드리고는 곧바로 북을 들고 국악원 콘센트로 지은 창고 옆방으로 들어가 소리공부를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흥보가> 완창 발표를 시작으로 해서 <춘향가>, <심청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수행기》는 1833년(순조33) 공청우도(公淸右道, 오늘날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황협(黃 , 1778~1856)이 남긴 보고서를 필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 초반 공청우도 관리들의 업적과 잘못을 비롯하여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수(繡)’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의(繡衣)’를 뜻합니다. 제목 옆 ‘경랍(庚臘)’이라는 글씨와 책 안의 “경자년 납월 초칠일(庚子臘月初七日)”이라는 기록으로 1840년(헌종6) 무렵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협, 55살에 암행어사가 되다 《수행기》를 남긴 황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황협은 1825년(순조25) 47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공충도사(公忠都事), 홍원현감(洪原縣監),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1832년(순조32) 11월에는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암행어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추천을 받습니다. 황협은 55살인 1833년 1월 7일 임금으로부터 공청우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봉서(封書) 1통,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책(事目冊) 1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