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성창순 명창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신의(信義)있게 살거라”라는 말이었다는 이야기, 2016년 말,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응급적인 조치로 폐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하는 조치를 했는데, 그 상황에서 소리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성창순 명창이야말로 진정으로 판소리를 사랑했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전해준 어연경은 현재 단국대 국악과와 이화여대에서 후진들을 지도해 오고 있는 한편,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데, 논문의 방향은 성창순 명창의 소리세계, 다시 말해 선생의 소리에 나타나 있는 특징적인 창법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들을 만한 대목, 곧 눈 대목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현재 전해오는 소리 가운데 판소리 <심청가>는 순조 때의 김제철이나, 철종 때의 박유전이 잘 불렀다고 하는데, 그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와 정재근 등을 거쳐 오늘에 이어오고 있다. 그 한 축은 이날치를 통해 김채만-박동실-한애순에게 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34살이 된 제자, 어연경이 단국대학교 국악과에 편입학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성창순 명창이 본인보다도 더 기뻐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가 얼마나 제자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깊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는 이야기, 성창순은 <국립국악고등학교> 개교 초기에도 판소리 강사로 출강하였는데, 학생들이나 교사들 대부분이 그를 환영하였으며, 글쓴이가 1983년, 단국대 국악과의 창설 학과장으로 부임할 당시에도 그를 강사로 초빙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어연경은 생애 첫 판소리 완창발표회로 성창순 명창에게 배운 <심청가>를 2015년 12월,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가진 바 있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다듬고 암기하여 스승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나간 경험은 선생이 세상을 뜬 지금에 와서는 너무도 그립고 가슴 벅찼던 시간이었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성창순 명창의 구음(口音)을 꾸준히 갈고 닦아 왔다고 하는데,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악기 반주자들과 함께 무용 반주음악도 담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요, 구음이어서 구음에 관한 평가도 수준 이상이다. 훗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성창순 명창이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일시나 공연 일정, 그리고 공부의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고자 노력한 사범이었다는 점, 어연경은 선생의 병원 출입이 잦았던 관계로 선생의 주민번호를 아직도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다는 점, 병원을 다녀온 스승은 곧 제자들과 소리공부를 한다는 점, 이와 함께 제자들의 대학 진학이나 그들의 성장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말한 바 있지만, 어연경은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의 병원 출입이 잦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승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병원에 가게 되면, 환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 등을 확인하게 되는데, 어연경은 스승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암기하고 있었기에 각종 서류 작성이 쉬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본인의 번호는 기억한다고 해도 가족의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마련인데, 어연경이 스승 성창순 명창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관계가 보통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2003년,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이 뇌졸증 초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성창순(1934-2017년)은 광주 성원목 명창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재기를 보여 아버지는 딸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성창순은 각종 경연대회나 문화예술계 수상경력이 화려했고, 뒤에는 판소리<심청가>의 예능보유자에 올랐다는 이야기와 어린 어연경을 판소리 전수자로 받아들여 단가와 판소리를 지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성창순 명창은 안타깝게도 2003년, 그의 나이 69살에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 시간이라든가, 수업 시수는 엄격하게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알려졌다. 어연경 역시, 40일 된 큰딸, 지원이를 데리고, 구기동에 있는 성창순 명창 댁으로 날마다 출근했다고 하는데, 도착해서는 <심청가>와 <춘향가>, <흥보가>를 반복해서 배우고 닦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도움과 사랑을 듬뿍 쏟아주셨던 선생님이어서 제자들 모두는 늘 마음을 다해 받들고 있는 고마운 선생님으로 남아계시지요.” 성창순 명창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어연경에게 물었다. 하나, 선생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린 심청의 효심 어린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다. 1930년대에 출간된 《조선창극사》에도 방만춘이 심청가를 고쳐 짰다고 적고 있는 점을 참고해 본다면, 조선조 정조(正祖)나 영조(英祖)무렵에는 <심청가>가 불렸다는 점을 알게 한다.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는 지금, 대학 국악과에서 판소리를 지도하고 있는 젊은 소리꾼, 어연경의 심청가 발표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8~9살 되던 어린 시절, 우연히 판소리 한 토막을 테이프로 듣게 되면서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가사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저(高低)의 가락이 흥겹고 멋이 있어서 수없이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 모든 노래를 반복적으로 따라 부르게 되면, 비록 가사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곡조의 표현은 충분히 가능한 법이다. 그 위에 가사의 전개 과정이나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더더욱 적극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 어린 어연경이 처음으로 익힌 노래는 바로 춘향가 가운데 <사랑가> 대목이었는데, 춘향 역할을 맡아 멋진 창을 불러 준 소리꾼이 바로 성창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경서도 소리와 함께 전통무용과 타악기 연주력도 겸비한 김단아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춤을 배우면서 반주 음악에 마음을 움직여 노래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경험에서 춤과 반주음악과의 관계가 절대적이라는 사실도 이야기하였다. 그는 <전국안비취경창대회> 대상, <전주대사습놀이>민요부 장원, 등으로 명창의 반열에 올랐는데, 최근까지도 가(歌), 무(舞), 악(樂)으로 나라 안팎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왔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어서 2023년 10월 7(토)일 낮 3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발표한 어연경의 판소리 <심청가(歌)> 이야기로 이어간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심청가>는 현전 판소리 5마당 가운데 하나로 극(劇)적인 전개가 일품인 소리 줄거리는 어린 심청이가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려 바다의 제물이 된다. 그러나 바다에 투신한 심청은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되살아나게 되고, 세상에 나와서는 임금의 부인인 황후가 된다. 그는 맹인잔치를 열어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도좌창 중, 공명가(孔明歌)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서도의 좌창은 물론이고, 송서나 시창과 같은 느리고 긴소리들 모두는 수심가조의 가락이나 표현법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이 노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명재상, 제갈 양의 자(字)가 공명이기에 연유된 이름이란 점, 오(吳)나라의 주유와 함께 공명이 화공(火攻)에 대한 전략을 논의하며 공명이 동남풍을 비는 광경을 그린 내용이란 점을 말했다. 이와 더불어 ‘초한가’와 더불어 서도창의 정수로 알려진 이 곡은 부분 부분의 진행이 힘찬 고음에서 저음으로 연결되는 하행(下行)선율형, 곧 강하게 뻗는 대목에서는 살짝 떨어주며 내는 요성(搖聲)과 졸음목을 구사하는 대목이 일품이란 점, 또한 극(劇)적인 구성이나 내지르는 목청이 격렬하고 강(强)과 약(弱)의 대비가 뚜렷한 점으로 엮음수심가의 창법을 활용, 서도창의 멋을 지키고 있는 소리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경서도 소리와 함께 전통무용, 그 위에 북이며 장고와 같은 타악기 연주도 겸비한 김단아(구-김영순) 명창을 만나 보기로 한다. 서도소리 발표회가 있던 날, 한국문화의 집(Kous)공연장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앞에서 부산의 소리꾼, 하인철은 <향수>를 비롯하여 <배뱅이굿과 함께하는 고향길>, <8도강산 소리여행>, <창세무가-創世舞歌>, <하인철의 전통 소리를 담다>, <산염불>과 <각설이 타령> 등, 공연무대를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소리세계를 만들어왔다고 이야기하였다. 각 소리제에는 지역 토착민들의 독특한 표현이 녹아 나온다는 이야기, 수심가조는 목을 조여서 위로 치켜 떠는 듯한, 격렬한 요성(搖聲)법이 특징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서도좌창 가운데서도 널리 알진 공명가(孔明歌)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용어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서도좌창’이란 말에서 서도(西道)는 관서지방, 곧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방을 가리키는 지역 이름이고, 좌창(坐唱)이란 앉아서 부르는, 연행형태가 단정하면서도 비교적 가사가 길고, 느린 형태의 노래를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므로 앉아서 부르는 관서지방의 긴소리를 일컫는 말이 곧 서도좌창이다. 과거에는 좌창이라는 이름보다는 <잡가-雜歌>, 또는 <긴 잡가>라는 말도 사용해 왔지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부산의 경서도 소리꾼, 하인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상주(尙州) <전국민요경창대회>에 출전, 대상(대통령상)에 올랐다는 이야기, 여러 사람 앞에서 소리를 하거나, 발표회, 경연대회를 치를 때에는 누구나 긴장하게 마련이어서 실력 발휘가 어려운 법인데, 연습과정이 탄탄하여 무난히 목표점에 도달했으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가 부른 곡명들은 수심가 토리인 <공명가-孔明歌>, <초한가-楚漢歌>, 그리고 <산(山)염불>이었다. <경 토리>를 비롯하여 <수심가>, <육자배기>, <메나리> 등등, 각각의 소리제에는 오랜 세월을 그 지역에서 살아 온 토착민들의 감정이 녹아 있기에 기쁨과 슬픔의 대조적인 표현 등이 노래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서도지방의 수심가토리가 어떻게 남쪽에서 확산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궁굼하다. 서도소리의 특징적인 선율형이나 창법, 또는 다양한 표현법 등이 독특하여 명창들의 소리를 통해, 또는 음반을 통해 호감이 가게 되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도소리 대부분은 수심가(愁心歌)의 창법이나 표현법을 기본으로 하기에 <수심가조>라고 한다는 점, 하인철은 10년 이상 부산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소리 공부를 하러 다녔다는 점, 이동시간 동안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경서도 소리를 익혔다고 하였다. 제2의 고향, 부산에서의 생활은 노래만으로는 살기 힘든 상황이어서 수리기술도 익혔고, 풀빵 장사도 했으나, 무슨 일을 해도 서도소리 부르기와 명창의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연습을 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근처의 민요학원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곳이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이수자 강숙희 명창이 운영하는 소리 학원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당시 민요 부르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였어요. 트로트의 맛을 내야 하는데, 꺾기의 발성이 잘되지 않아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법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우리 소리는 참 묘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트로트보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정작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하게 되는 발표회 무대나 경연대회에 출전할 때는 정말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