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국경을 통과하여 터키로 건너가는 날이다. 아침 이른 시각에 숙소를 출발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조지아까지 세 나라를 지나는 데 2주가 걸렸다. 남은 2주 동안은 터키를 동쪽의 에르주룸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의 이스탄불까지 횡단할 예정이다.
바투미에서 국경까지는 시외버스를 타지만 국경을 넘은 이후의 교통편은 아직 미정이다. 병산에게 물어보니 국경에서 가까운 호파(Hopa)까지는 버스로 가고, 호파에서 에르주룸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5시간 정도 타면 오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교통편과 일정은 병산이 알아서 결정하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므로 나는 병산을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커다란 건물에 들어가서 X레이로 짐을 검사하고, 여권을 제출하고, 얼굴 사진을 찍고, 입국비자 도장을 받고 등등 국경을 통과하는 데 1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국경 통과를 여러 번 경험한 병산 말에 의하면 다른 곳보다 훨씬 간편하고 시간이 덜 걸렸다고 한다. 한국 여권은 세계적으로 공신력이 높아서 국경 통과하기에는 매우 편리하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의 국력이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터키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으로, 한자어로 토이기(土耳其)라고도 한다.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면적은 78만㎢(남한의 약 8배)다, 2018년 기준으로 인구는 8,200만 명(남한의 1.6배)이다. 수도는 고원지대에 있는 앙카라(Ankara)다. 종족 구성은 터키인 80%, 쿠르드인 19%, 아랍인 1% 등이다. 언어는 터키어가 공용어이고, 쿠르드어와 아랍어 등도 사용된다. 종교는 인구의 98% 이상이 이슬람교(종파는 수니파)를 믿고 있다.
터키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0년간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기록했으나, 석유 수입을 위한 과중한 지출에서 오는 국제수지 적자가 산업 발전의 구조적인 결함과 연계되어 1977년에는 높은 재정 적자로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1978년 국제통화기금(IMF)이 엄격한 금융 규제를 가했으며, 1980년 정부에 의해 실시된 긴축 경제 계획이 주효한 데다 나라밖 근로자들의 송금액이 증가함으로써 터키는 고질적인 무역 적자를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는 많은 비숙련 노동자들이 서유럽(주로 서독)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중동 국가들로 나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출품은 농업 제품에서 산업 제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섬유 직물이 최대 수출품이다. 주요 수출 상대국은 독일, 이탈리아, 미국이다. 석유가 주요 수입품목이며, 독일은 기계와 장비의 주요공급국이다. 2018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1,100달러로서 유럽 국가들에 견주어 낮은 편이다. 터키는 NATO와 OECD의 회원국이지만 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터키의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터키 민족은 서기전 2000년 무렵부터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해 왔다. 1281년에 설립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354년에 유럽에 진출하고 16세기에는 헝가리, 루마니아, 이집트, 알제리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측에 가담하여 패전국이 되고 1920년에 연합국과 체결한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배후지와 아나토리아 고원만으로 영토가 축소하였다. 1923년에 터키공화국으로 독립하고 케말 파샤(Kemal Pasha)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케말 파샤가 1938년에 병사한 뒤, 잦은 정권 교체와 두 번의 군사혁명을 거쳐 1982년에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신헌법에서 대통령은 7년 임기의 간선제를 채택했으나 200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5년 직선제로 하되,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2003년부터 총리로 재임했던 에르도안이 새로운 헌법에 따라 2014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나라는 터키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터키는 1949년에 우리나라 정부를 승인하고, 이어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혈맹의 우방국으로서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우리나라는 1957년에 터키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71년에는 서울시와 앙카라시가 자매결연을 하기도 하였다.
터키(Turkey)는 영어식 명칭이고, 현지에서는 터키를 튀르크(Türk)라고 부른다. 튀르크는 국가 이름도 되고 민족 이름도 되는데, 원래 ‘용감한’이라는 뜻도 포함되었다. 터키 사람들은 터키라는 영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터키인들도 영어로 Turkey가 칠면조라는 뜻임을 잘 알고 있고, 또한 영어에서 turkey는 '겁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터키의 유래가 된 튀르크가 용감하다는 뜻이었는데, 영어에서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우연히 친절한 터키 형제를 만났다. 우리의 가방을 들어주고 통관 절차를 친절하게 도와준다. 국경을 넘자 다른 터키 사람이 승용차로 터키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호파까지 간다고 하니까 차를 태워 준다. 터키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게 출발하였다.
호파에서 35인승 버스를 타고 에르주룸으로 향했다. 에르주룸까지 거리는 245km인데, 험준한 산악 지대를 통과하므로 5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손말틀(휴대폰)에 앱으로 설치된 고도계로 고도를 재보니 해발 900m에서 1,100m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산악지형을 통과한다. 호수가 하나 보였는데 사람이 사는 마을은 매우 드물었다. 산골 마을이 나타나더라도 불과 몇 가구가 모여 있는 정도였다. 기후가 건조한 듯 바위산이 많고 키 작은 나무가 조금 보였다. 우거진 숲이나 경작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조그마한 마을에 30분 정도 쉴 때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였다. 터키 화폐 1리라는 우리 돈으로 200원에 해당한다. 두 사람이 30리라를 내고 괜찮은 점심을 먹었으니 터키의 물가가 우리보다 싸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참을 더 가자 넓은 평원이 나타나고 멀리에 도시가 보인다. 평원에는 목장도 있고 제법 큰 마을도 나타났다.
에르주룸은 에르주룸주의 주도인데, 로마 시대에 개척된 도시이다. 2017년 기준 인구는 41만 명이고 아르메니아 고원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해발 고도가 1,950m나 된다. 201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최지였던 에르주룸은 여름보다 겨울이 더 길며 눈이 많이 내려 겨울 스포츠가 발달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병산은 손말틀 가게를 찾아 유심칩을 사서 교환하였다. 나는 손말틀로 카톡과 데이터 검색만 가능하면 충분하지만, 병산은 현지에서 국제 전화를 주고받아야 하므로 유심칩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시내를 걸어서 이미 예약된 호텔에 도착하였다. ‘Hekimoglu’라는 이름의 허름한 호텔에 들어가자 남자 직원이 환영하면서 먼저 악수를 청한다. 그러더니 생수 한 병을 먹으라고 주고 또 차를 대접한다. 다시 한번 터키 사람은 매우 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은 터키에서는 어디서나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터키어를 전혀 모르고 터키 사람은 워터, 쌩규, 쏘리, 커피 같은 아주 간단한 영어만 알아들으니 대화는 손짓발짓을 동원하여 겨우겨우 어렵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답답함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따라다녔다.
짐을 풀어놓고 호텔을 나와 근처를 걸어서 둘러보았다. 호텔 가까이에 모스크(이슬람교 예배당)가 있고 멀리에도 모스크의 커다란 첨탑이 곳곳에 보인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라는 것이 실감 났다. 거리를 걸으면서 식생을 유심히 살펴보니 나무로는 장미, 전나무, 측백나무, 버드나무, 황금조팝나무, 마가목, 소나무 등이 보였다. 풀 종류로는 팬지, 붉은 크로바, 그리고 반갑게도 접시꽃이 보였다. 조금 걷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가 정한 호텔의 1층은 식당이어서 터키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