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아무리 겨울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나이가 들어 눈 앞에서 날아갈 듯이 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고는 하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로 맞는 마음에는 늘 비장함이 파고든다. 새해를 맞으며 지난해 가졌던 찬란한 꿈과 희망이 결국에는 또 후회의 반복이라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밤의 어둠을 깨고 나오는 새벽, 새해의 첫 해를 정성껏 맞이했다. 예전에는 첫 해에 자신에 관한 소망을 담았다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우리 자식 손주들, 우리 사회와 국가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이 달라진 것이긴 하지만.
한 해를 바꾸는 때를 세(歲)라고 한다. 세모(歲暮)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해가 바뀌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다. 중국 고대의 역사에서 교훈을 알려주는 경전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 부분을 보면 "임금은 해(歲)를 살펴야 하고, 귀족과 관리들은 달(月)을, 낮은 관리들은 날(日)을 살펴야 한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라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못 하고는 일 년을 단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임금은 크게 전체를 보아야 하고 그다음 신하들은 달이 바뀌고 변화하는 것을 보아 천하가 밝고 편안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해와 달과 날이 질서를 벗어나면(歲月日時旣易) 백곡도 잘 자라지 않고 다스림도 어둡고 백성도 미미하며 집안도 편치 못하다고 하였다.
나는 새해의 첫 해가 뜨면 오동나무에 봉황이 날아오는 꿈을 꾼다. 아침의 해는 희망이요, 시작이다. 밝음의 시작이니 사람 모두에게도 새로운 시작이고 나라에도 새로운 시작이다. 밝음은 곧 어둠을 가시게 하는 것이니, 아침의 해는 곧 새롭고 태평한 천하를 의미한다. 일찍이 공자는 자신이 편찬한 《시경(詩經)》의 대아(大雅)편에 이런 시를 올렸다.
鳳凰鳴矣 于彼高岡 봉황새가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梧桐生矣 于彼朝陽 오동나무 자라네, 해 뜨는 저 동산에서.
菶菶萋萋 雝雝喈喈 무성한 오동나무 숲과 봉황새 소리 어울리네
봉황(鳳凰)은 고대 중국의 전설로부터 전해오는 상서로운 상상의 새로 태평성대를 이룰 성군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현자이다.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인데 늘 같이 다닌다. 봉황, 곧 현자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 대나무 열매의 씨)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어진 선비들이 훌륭한 임금의 밑으로 와서 현자들의 도를 실현하는 모습이 바로 이 시가 그리는 정경이라면, 그러한 정치가 되도록 좋은 인재를 등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인 ‘권아(卷阿)’는 ‘굽은 언덕’이란 뜻으로서 전체적으로 이처럼 군신이 어울려 훌륭한 정치를 편다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청나라의 건륭제는 북경 동쪽 열하에 세운 피서산장 안에 연못을 파고 언덕에 정자를 세운 ‘권아승경(卷阿勝景)’이란 구역을 만들어 놓고 여기서 신하들과 천하를 편안하게 이끄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그러한 지도자의 희망과 뜻은 그것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나라나 개인의 소망은 물거품이 된 것이 더 많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가수 김도향이 불렀듯이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한 조각 달만 빈 가지에 걸려 있다”라는 시조로 탄식을 하였다.
새해를 맞는 나의 소원은 고려 말의 명신인 이색(李穡,1328-1396)의 소원과 같다.
“평생소원이 무엇인지 누가 아시는가?
해 뜨는 동산에서 봉황 소리 듣고 싶은 걸"
平生志願誰能識 欲向朝陽聞鳳鳴
며칠 전 새해 밝은 아침을 맞아 나는 집 옆의 북한산 봉우리를 동산이라고 생각하고 태양이 비치는 동산에 지혜와 신령의 새들인 봉황이 와서 어우러지는 그런 세상, 어진 신하가 밝은 임금을 만나 태평 시대를 만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천자문에 나온 이른바 명봉재수( 鳴鳳在樹)의 세상을 꿈꾼 것이다.
그런 세상은 어떻게 올 수 있을까? 임금이 밝아야 하고 신하들도 어질어야 한다. 욕심으로 눈앞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밝은 광명의 시대에 아집과 욕심, 독선이라는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밝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정치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 지도자는 꼭 새로 만난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지도자들도 그렇게 변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런 지도자를 또 찾아야 한다. 또는 그런 지도자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엔 우리 모두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될 터. 봉황의 울음이 우리 모두의 가슴과 머리를 일깨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세상을 다시 기대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