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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창제 배경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5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하늘이 낸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임금 때의 일을 기록한 《세종실록》의 분량은 전체 조선왕조실록의 10분의 1을 차지하며 현재 400쪽짜리 40권으로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세종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업적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는 다른 모든 일을 합한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해석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온갖 환난을 이기고 세계 유수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세종대왕이 닦아 놓은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글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이끌어갈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이 위대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전번 네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 조상들이 1만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살면서 우리 말을 가꾸고 이를 글자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을 들였는지를 엿보았습니다. 이 염원은 세종대왕으로 이어져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알지도 못하는 법을 어겨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세종대왕은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1418년 22살의 나이로 즉위한 세종은 즉위 첫해부터 전국의 의로운 남편과 부인, 효자를 찾아 표창하고 세종 10년에는 《효행록》을 증보해서 펴냈지만, 백성들은 한자로 된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4년에는 삼강행실도를 그림으로 그려 동네마다 붙여 놓았답니다. 또한 주요 법률을 이두로 번역시키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답니다. 아마 이두 역시 한자로 쓰기 때문에 백성들이 읽지 못함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박종국은 《훈민정음종합연구》(세종학연구원, 2007)에서 세종대왕은 이때부터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세종 18년, 40살이 되자 병(조갈증 지금의 당뇨)을 핑계로 정승들이 협의하여 보고하도록 정부구조를 의정부사서제로 바꾸고 그 이듬해에는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까지 넘겨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종 25년 창제할 때까지 7년 동안 훈민정음 연구에 몰두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백성을 가르치려는 세종대왕의 뜻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습니다. 11년에는 농사짓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농사직설》을 펴내고 천민의 자식도 공부시켜야 한다고 여겨 세종 14년에는 백정 자제도 향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혹자는 세종조에 노비의 숫자가 늘었음을 지적하며 세종이 노비를 늘렸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필시 적(籍)도 없이 홀대받던 노비들을 등록하도록 하여 그 기록상의 숫자가 늘었을 뿐 오히려 노비들의 신원이 확실해지고 대우가 안정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세종대왕은 책을 많이 만들어 내기 위해 금속활자를 만들고 인쇄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고려사》, 《경국대전》, 《동국정운》 등 대량의 출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최근 출간된 황태연 교수의 ‘책의 나라 조선’에 따르면 조선은 14,117종의 책을 출판한 당시 세계 으뜸 출판 선진국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종은 문자 만들기에 노심초사했지만, 신하들은 명나라를 하늘같이 떠받들고 있어 우리 고유의 글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속내를 드러낼 수조차 없었기에 그저 왕자와 공주 등 직계가족들의 도움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비밀리에 단편적인 임무를 주었지만, 그들도 상감이 왜 운학(韻學)에 관해 관심을 두는지 궁금해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1443년 12월 세종 25년 “임금이 친히 28글자를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실록에 나옵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만에 ‘최항 등에게 《운회》를 뒤치도록(번역) 명했다’라고 합니다. 운회는 오늘날의 대백과사전 같은 거대한 문서입니다. 이에 놀란 최만리 등이 상소를 냅니다. 최만리는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해 왔는데. 어찌하여 오랑캐 나라들처럼 한자를 버리고 자기 문자를 만들려 하냐?’라는 것이었고, 운회 뒤침에 대해 ‘어찌 옛사람이 만든 운서를 공론도 없이 섣불리 고치냐?’라고 따졌답니다.

 

정찬손은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뒤에도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된 것도 아니라고 하며 결국 훈민정음도 마찬가지로 별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세종을 압박했답니다. 이렇게 세종의 뜻을 이해해 주지 못한 것, 특히 백성은 가르쳐도 소용없다는 정찬손의 말에 대해 세종은 격분했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불러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를 따지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상소문 가운데 한두 가지 말을 묻고자 함이었는데 너희들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니 그 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며 정찬손은 학자의 본분을 어겼다 하여 파직하고 최만리 등은 하옥시켰습니다.

 

김문은 처음에는 글자를 만드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더니 말을 바꾸어 상소를 내는 것은 임금을 기만한 것이라 하여 곤장 100대를 속(贖)바치게 하였습니다. 이는 매 대신 공물을 바치도록 하는 것인데 벼가 몇 섬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옥시킨 신하들은 하루 만에 풀어줬고 정찬손도 4달 뒤 복직시켰다고 합니다. 세종은 인재를 아껴 버릇을 고치려 했을 뿐 더 이상의 감정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신하들은 진심으로 중국을 섬겼던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도 사대가 극진하여 황제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이는 중국을 안심시키는 것이 백성을 위해 득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자주정신은 대마도와 북방을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고 천문을 포함한 많은 제도와 문물을 조선 중심으로 바꾸는 데서 읽을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도 중국이 트집을 잡지 않을 것을 확신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봅니다.

 

 

그 뒤 1445년 <용비어천가>를 짓고, 46년에는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석가 일대기)》을 뒤치도록 하는 등 3년 동안의 시험 적용을 거쳐 46년 정음청을 만들고 9월 훈민정음해례를 펴내 훈민정음을 반포했습니다. 반포 뒤 즉시 정무에 실제로 사용토록 하였으며 과거에도 훈민정음을 포함해 양반들도 공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제 때부터 문종과 수양대군에게 임무를 주어 훈민정음이 후대에도 지속되도록 포석을 깔아 놓았습니다. 염원대로 훈민정음은 단시일 내에 궁전뿐 아니라, 온 나라에 퍼져 즐겨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훈민정음이 어떤 수난을 겪어 한글로 변신하는지는 앞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훈민정음 해례 서문 첫머리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못한다’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