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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정치를 다시 바라본다

국민은 바다고 지도자는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선장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8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려 할 때에 중국의 고사성어나 서양의 속담을 인용하면 더 근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너무 빤해서 금방 실력이 들통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러다 보니 꼭 어디 어디 무슨 고사를 인용해야만 된다고 하는 강박관념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있다.

 

‘목종승정(木從繩正)’이란 말이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원래의 뜻은 “나무(木)는 승(繩)에 따라가면 바르게 된다"라는 것인데 승(繩)은 먹줄(나무를 곧게 자르기 위해 먹으로 곧게 치는 줄)이니까 “굽은 나무라 할지라도 먹줄을 친 대로 켜면 곧바른 재목을 얻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곧 “임금이 신하의 곧은 말을 잘 들으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라는 의미다.​

 

이 말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599~649)에게서 나왔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신하들이 간하는 것을 적극 수용할 뿐 아니라 신하들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한 현군이었다. 태종은 "내가 비록 밝지가 못하지만, 여러분이 바로 잡아 주어야 좋은 정치를 행할 수 있다. 바라건대 직언(直言)과 기개 있는 의론에 의해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간의대부(諫議大夫) 왕규(王珪)가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군주는 간언에 따르면 밝아진다(木從繩則正 君從諫則聖)고 합니다."

 

라고 회답했다. 태종은 왕규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조칙(詔勅, 황제의 명령)을 발하여 국가의 정책을 논의할 때 반드시 간관(諫官)이 배석하여 의견을 개진하도록 제도화했다. 간관이 배석하도록 한 것은 정책의 비평, 비판가를 함께 두어 정책의 타당성을 검토시킨다는 뜻이며, 그것은 곧 언론을 활성화이다. 그것이 당나라 최고의 태평성대인 ‘정관(貞觀)의 치(治)’를 연 비결이었다. 목종 승정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실제로 간하다가 임금에게 죽임을 당한 간관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죽음을 면한다고 해도 온갖 수난을 당한다. 조선조 중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임금으로 올라서자 젊은 청년들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과거 시험에 문제를 이렇게 낸다.​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시급하게 인재를 불러 모아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과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다. 필시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뜻을 품고 있었을 테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다 표현해 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이에 대해 글을 잘하는 임숙영(任叔英, 1576~ 1623)이 답안을 냈는데 ​

 

“오직 어진 신하만이 바르게 간언할 수 있고, 현명한 임금만이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도리를 지켜야만 군주와 신하가 허심탄회하게 정치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나라에서 언관을 둔 것은 충심으로 간언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몇몇 언관이 간언한 일로 벌 받았으니, 이는 결국 전하께서 언관을 둔 까닭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고자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죄를 짓게 하려고 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임금에게 벌을 받았으니, 이 때문에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초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당시 정부의 사람을 쓰는 인사가 왕비, 곧 임금의 처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데 이를 비판한 언관들이 벌을 받은 일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이 답안을 본 모든 시험관이 일등으로 뽑아 올렸다. 그런데 마지막 결재자인 광해군은 수석이 아니라 합격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며 합격을 취소하라고 명령한다.

 

“과거시험에서의 응제문(應製文, 답안지)은 정해진 법식이 있으니, 옛날 사람들은 아무리 과격하고 곧은 말이라도 모두 질문한 제목에 나아가서 도리와 욕심, 공과 사를 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인심이 극악하여 오직 임금을 헐뜯고 욕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으니, 너무나 무리하다. 내가 응시자 임숙영의 응제문을 보니, 그 답이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별도로 제목에서 벗어나 방자하고 거리낌 없이 패악한 말을 하였다. ... 만약 이 글을 합격시킨다면 말세의 경박한 무리가 반드시 앞을 다투어 임금을 욕하는 글을 미리 지어서 시관의 눈을 현혹하여 합격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이니, 그 폐단은 앞으로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다. 임숙영을 방목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 《광해군일기》 3년 신해(1611) 3월 17일

 

이에 대해서 대신들이 간곡한 만류를 하는 바람에 무려 넉 달이나 지난 뒤에 겨우 꼴찌로 합격 허가를 받기는 받는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다행한 경우라 하겠고 목숨을 잃은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조선시대 정치권력은 일차적으로 왕권과 신하 사이 권력의 견제로 이해된다. 신하는 왕권을 견제하려 했고 임금은 신권을 견제했다. 왕권이 막강하기에 이를 견제할 장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권력의 상호 견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대간, 곧 사헌부의 대관(臺官)과 사간원의 간관(諫官) 이었다. 대관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간관은 임금의 잘잘못을 논박함으로써 임금의 전제를 앞장서서 저지하는 노릇을 했다.

 

이들은 양반 지배층의 여론을 대변하는 언관, 곧 오늘날의 감사원과 언론이었다. 임금은 싫든 좋든 이 대간이란 언론을 통해 관료와 스스로 직분을 점검했기에 이들은 군주의 눈과 귀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이들은 직책은 낮았지만, 권위와 위신이 다른 어느 관리보다 높았고 또 임금 앞에서 목숨을 걸고 직언해야 했기 때문에, 학식이 높고 청렴하며 강직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기에 대간들이 임금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다가 견제를 당하게 되면 신하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적극 변호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대간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지게 됐다. 조선조 중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임금이나 벼슬아치에 대한 반대와 탄핵이 너무 잦아지고 상대 당파를 공격해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이처럼 대간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영조는 대간 임명권을 쥔 이조전랑(吏曹銓郞, 요즈음으로 말하면 총무처 인사국장)의 권한을 유명무실화시키고 대간의 언론권을 무력화했다. 그러나 이 조처는 정조 이후 세도정치를 낳고 급기야는 망국의 길로 치달았음을 우리들은 안다. 신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문제지만 또 목소리가 너무 크고 자주 나오는 것도 문제다.

 

흔히 조선왕조의 역사는 임금의 권력과 신하의 권력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운 역사라는 관점이 많은데, 그런 면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사는 임금과 간관들의 대립과 합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의 여론정치가 죽 계속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하의 목소리를 바로 듣는 방법, 지나친 목소리에 대처하는 방법과 지혜, 이런 것들이 지도자에게는 필수적이다.

 

광해군의 경우 그의 처가 문제가 내내 지속되었다. 그걸 지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대함으로써 그것이 정치의 불신과 불만을 누적시킨다. 광해군은 외치, 곧 국방과 외교면에서는 평가받는데 국내 정치에서는 신하들의 언로를 막고 인륜과 상도에 어긋나게 권력을 남발함으로써 패망으로 접어들었다고 하겠다. 그보다 앞서 중종 이후 인종과 명종 때에는 왕대비와 외척들이 어진 신하들을 몰아내고 죽임으로써 정치가 어지러웠고 사회 기풍이 흐려졌다.

 

 

현대에 내려와도 정치의 원리는 더욱 중요하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처가나 친인척, 동창이나 학벌 등에 좌우되면 안 된다. 잘못이 지적되면 당태종처럼 빨리 시정해야 한다. 언론이나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느닷없는 발상으로 장관들이 다 반대하는데도 계엄령을 밀어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만용이다. 국민의 여론을 이끌지 못하고 이를 무시하고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다가는 정권이 순항할 수가 없다.

 

그러면 국가가 들뜨고 사회가 불안하다. 국가의 지도자를 모시는 사람들은 역대 정권이 실패한 사례를 더 철저히 연구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몸으로라도 막아야 한다. 이렇게 나무의 먹줄을 먹줄대로 잘 켜야 재목이 되고 국태민안이라는 건물이 완성된다. 광해군이 싫어했던 임숙영의 과거답안이 《광해군일기》에 그대로 실려져 있다.

 

“후비의 친척이나 후궁의 족속은 은택을 희망하고 녹리를 열심히 구하느라 밖으로는 임금의 외척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그 위세를 떨치고 안으로는 궁궐의 세력을 끼고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가 하면, 벼슬자리에 임명할 사람을 물색하는 사이에 어느새 일을 꾸미고 먼저 임명하는 등 분주하게 해서 세상 사람들이 구실 거리를 삼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명 단자가 내려지기도 전에 먼저 물색하여 임명대상을 하나하나 세면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전의 친척이고 아무개는 후궁의 족속이다. 지금 아무 관직이 비었으니, 반드시 아무개가 될 것이고, 아무 읍에 수령이 비었으니 반드시 아무개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데, 임명 단자가 내려짐에 이르러서는 그 말과 부합되지 않는 적이 드뭅니다. 그럼에도 인사담당부서(銓曹)가 금하지 못하며 대간이 논쟁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실록을 쓴 사관들은 그리고는 엄중하게 임금의 길을 밝힌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망함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충직하고 곧은 말을 비방이라고 하여 도리어 엄중히 책망하고 삭제의 벌을 내렸으니, 위태롭고 망하는 화란(禍亂)이 조석(朝夕)에 닥치더라도 누가 말을 하여 자기 몸을 위태롭게 하겠는가. 이와 같이 하고서 망하지 않는 자는 드무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신해(1611) 3월17일

 

흔히들 국민은 바다고 지도자는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선장이라 비유하는데, 비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키를 잘못 잡으면 배가 뒤집히고 있는 그런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