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요즘에는 더 이상 보지 않는 비디오테이프가 집에 아주 많이 있다. 대부분은 이태리 유학시절 여행가이드로 아르바이트를 나가게 되어 TV를 보지 못했기에 예약녹화를 해 둔 것들이다. 정리하며 보니 이태리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기도 한다.
최근 봄 날 비디오 하나를 틀었는데 이태리 대통령인 챰피(Ciampi)가 편안한 소파에 앉아 담화를 하고 있다. 아니! … 내가 분명히 클래식 방송을 녹화했을 것일 텐데 대통령이 왜 나오나? … 아마도 녹화시간 예약을 잘못하여 다른 프로까지 녹화된 것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더 보니 그게 아니었다.
▲ 기타와 함께 노래를 하는 주세페김
바로 이어서 금세기의 최고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as)를 위한 특집방송 ‘칼라스 데이(Calas Day)’가 시작되는데 여기에 대통령이 직접 나와 이태리 오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통령 할아버지는 이태리오페라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마음의 큰 위안과 자랑이 되어 왔는지를 얘기 했다.
또 최고의 예술경지에 올라야만 공연이 가능한 오페라가수의 숭고한 노력과 예술혼 앞에서 인간적으로 경외하게 되며,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그 음악을 들으면 모두가 나름대로 상상하고 감동하게 되며, 거기서 위로 받고 기쁨은 배가 되어 정신은 풍요로워진다는 그런 내용으로 이태리의 문화유산인 오페라와 그 예술가를 찬양하면서 ‘칼라스 데이(Calas Day)’ 프로가 시작된다.
되돌려서 다시 한 번 들어보니 그의 소박한 말소리에는 예술에 대한 경외심이 진정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태리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상은 종교적으로 하느님이나 성인을 제외하면 신부나 수도자들도 아닌 아마도 예술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서 신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의 경지가 아닐까. 그래서 종교마다 저 나름대로의 신을 위해 바쳤던 예물은 바로 최고의 예술작품(미술, 건축, 음악)이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사람이다. 이태리에도 당대의 세계적인 프리마돈나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가 있지만 서로의 우열을 비교하기 이전에 이태리 사람들에게는 국적도 예술 앞에서는 무의미한 듯하다. 그들은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듯하다. 그러니 대통령도 TV에서 오페라를 이야기한 것 아닐까?
먼 이태리까지 와서 오페라를 공부한다는 나의 말을 듣고 이태리 사람들은 외롭고 힘든 예술가의 길을 택한 나의 용기와 열정을 부러워하며 진심으로 격려해주어 참으로 고마웠었다. 그리고 그들의 격려와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은행장 덕분에 우리 부부는 학생 신분으로 이태리인들도 받기 힘든 시의 후원을 받아 부부가 공연을 할 수 있었고, 그날 시의 주요 인사들과 정치인들도 와 있었는데 자연스레 그들과 친분이 생겨 그리 외롭지 않은 유학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 듀오아임의 Fonte Nuova 지역신문기사
지금도 이태리에서의 음악회가 끝나고 관객으로 왔던 일반시민들과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보내준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다시 듣고 싶다. 그리 거창한 공연들도 아니었는데 관객들은 공연을 보는 것과 동시에 그날의 공연으로 인하여 앞으로 형성될 부부가수의 예술성에 대한 기대와 격려를 함께 담아 박수를 쳐주었다고 느껴진다. 우리의 미숙한 부분도 이해심 있게 보아준 관객들의 따뜻함을 잊지 않고자 지금도 무대에서의 겸손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뒤 음악여행을 하면서 유럽인들이 예술가를 최고로 존중하며, 정치인들 또한 국민이 사랑하는 예술과 예술인들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음악회를 이태리에서 했을 때 왔다가 얼굴도장만 찍고 가는 정치인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대부분 처음부터 경청하고 무대 뒤로 와서 소박한 격려의 악수를 청하곤 하였다.
오래된 비디오에 나오는 대통령 할아버지의 오페라 관심사 애기를 귀담아 들으면서 선거를 앞두고 여기저기 행사나 공연이 있는 곳마다 모인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한국 정치인들의 풍속도가 잠깐 그려진다. 실제로 부부가 기념식이나 공연에 출연을 하다 보면 인사만 하고 바쁜 척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공연이 끝난 뒤 로마 Palatinum 라이언스총재와 함께
예술은 시간이다. 어떤 정치인이 예술의 본질을 모르랴. 선거철이면 문화예술지원을 공약하는 정치인들은 많지만 자신의 공약을 떠나 한 일반인으로서 의원 배지도 떼어놓고 잠시 예술을 감상하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좋은 공연에는 사람이 너도 나도 모이게 마련이다.
이렇게 무작위로 좋아서 모인 관람객들에게 무슨 당파가 있겠는가? 문화예술공연장은 모든 사람이 정당과 파벌 없이, 신분의 귀천 없이, 마음의 부담 없이, 서로 공연을 매개로 하여 그저 공연을 함께 보면서 공감이라는 무언의 소통을 할 수 있기에 예술은 어쩌면 최고의 정치판이기도 한 것이다.
정성스런 어머니의 기도 앞에서는 어떠한 종교도 무의미하듯이 최상의 예술 앞에서는 어떠한 파벌이 무의미하다.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국민이 바라는 최상의 것을 추구해야 하기에 모든 진정
한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그저 예술적이었으면 좋겠다.
**김동규(예명 주세페김) :
팝페라테너와 지휘자로 아내 김구미(소프라노)와 함께
‘듀오아임’이라는 예명으로 공연활동을 하고 있다.
www.duoa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