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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석의 차와 시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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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과 체징의 공경차ㆍ영접차

임금은 차를 보내고 선사는 산문을 열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30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신라 말,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고 지방의 새로운 세력들이 일어나던 시대에 산문(山門)은 단순히 불법을 닦는 수행처에 머물지 않았다. 혼란한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세우고 새로운 정신적 질서를 열어 가는 또 하나의 중심이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낭혜화상 무염(無染)과 헌안왕의 인연도 그러하였다. 임금은 무염에게 차와 향을 보내며 군왕의 자리에서 스승을 받드는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그 차는 권력자가 고승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니라, 임금이 스스로 몸과 마음을 낮추어 도를 구한 '존사차(尊師茶)'였다. 헌안왕의 차에 담긴 공경은 무염 한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임금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남쪽 산중에서 수행하던 보조선사 체징(體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왕경으로 맞아들이고자 하였다. 이때 임금이 보낸 차는 스승을 높이는 '공경차(恭敬茶)'였으며, 먼 산중의 선사를 나라의 정신적 스승으로 맞이하려는 '영접차(迎接茶)'이기도 하였다. 보조선사 체징은 804년 웅진, 오늘날 공주 지역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이다. 어려서 출가한 그는 경전과 계율을 익히는 데 머물지 않고 마음의 근원을 직접 밝히는 선법을 구하였다. 당시 신

낭혜화상 무염과 헌안왕

임금이 제자의 예로 올린 존사차(尊師茶) [라석의 차와 시서화] 29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그때 헌안대왕은 멀리서 제자의 예를 표하고, 차와 향을 예물로 보내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時憲安大王 遙展攝齋禮 贄以茗馞 使無虛月)"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신라 말, 왕궁에서 성주산의 깊은 절까지 달마다 차와 향이 전해졌다. 그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니었다. 장차 왕위에 오를 사람이 산중의 선사를 스승으로 받들어, 제자의 예로 올린 공경의 예물이었다. 보내는 사람은 왕자였으나 마음은 제자였고, 받는 사람은 아무런 세속의 권세도 없는 수행자였으나 여섯 임금이 법을 묻던 큰 스승이었다. 차 한 봉과 향 한 자루에는 왕관보다 높고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동방의 대보살, 무염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00~888)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왕실의 혈통을 이었으나 세속의 영화를 쫓지 않고 열두 살에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출가하였다.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한 뒤, 821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선종의 새로운 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무염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마곡산의 보철선사에게서 법맥을 이어받았다. 당나라에 머문 이십

하늘이 차를 올린 수행자

오대산 정신(淨神)과 감응차(感應茶)의 세계 [라석의 차와 시서화] 28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차는 사람이 달여 하늘에 올리는 공양으로 시작되었다. 맑은 샘물을 길어 불을 지피고, 어린 찻잎을 달여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 일은 곧 자신의 마음을 부처와 하늘에 바치는 수행이었다. 한국 차문화는 이러한 공양차(供養茶)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신라 차문화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이 하늘에 차를 올린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에게 차를 올렸다는 이야기. 그 주인공이 바로 오대산의 수행자 정신(淨神)이다.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에는 정신이 오대산 신성굴에 머물며 오십 년 동안 한결같이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세상을 떠돌지도 않았다. 다만 깊은 산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닦으며 오직 도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오십 년. 한 사람의 일생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계절은 수없이 바뀌고, 나무는 자라 숲이 되었으며, 함께 수행하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났지만, 정신은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했을까. 《삼국유사》는 놀라운 장면을 기록한다. 정거천(淨居天)의 하늘 무리가 차를 달여 정신에게 공양하였다. 이 한 줄은 한국 차문화사에서 가장 신비롭

문무왕(文武王)과 김유신(金庾信)

삼국을 하나로 잇고 차향으로 조상을 기리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27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차 한 잔에도 역사가 흐른다. 차는 산사의 선방이나 문인의 서재에서만 향기를 피운 것이 아니다. 전쟁으로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묶고, 잊힐 뻔한 조상을 다시 불러들이는 제단 위에서도 말 없는 역사가 되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넘어 삼국을 통합해 가던 격동의 시대, 그 중심에 김유신과 문무왕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군신(君臣)이면서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가 문무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 그 혈맥은 모두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닿는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세손이었고, 문무왕은 어머니 문명왕후를 통하여 수로왕을 자신의 15대 시조로 받들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통일은 신라가 가야ㆍ백제ㆍ고구려를 정복한 승자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가야의 혈맥이 신라 안에서 다시 살아나 통일을 이루고, 마침내 그 조상을 차향으로 기린 생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595년 신라에 귀속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의 장군이 되었다. 그의 집안에는 가야의 멸망과 신라로의 귀속, 차별과 수용, 전쟁과 화

최치원(崔致遠)과 진감국사(眞鑑國師 慧昭)

동방의 붓끝에 차향을 담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26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김대렴이 지리산에 심은 차씨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차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해서 곧 문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차는 수행을 만나야 도(道)가 되고, 시를 만나야 향기가 되며, 글을 만나야 역사가 된다. 그 위대한 만남을 이루어 낸 두 사람이 바로 진감국사 혜소와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한 사람은 선(禪)의 향기를 몸으로 실천한 수행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향기를 천년의 문자로 남긴 문장가였다. 차를 마신 이는 진감국사였고, 차의 정신을 역사로 승화시킨 이는 최치원이었다. 진감국사 혜소(774~850)는 젊은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스물일곱 해 동안 선을 배우고 수행하였다. 그는 차가 이미 선종 수행과 하나가 된 중국 선림의 문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귀국한 뒤 하동 옥천사, 곧 오늘날의 쌍계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며, 지리산 차를 수행 속에 녹여 냈다. 그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이 바로 최치원이 지은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그 비문에는 진감국사가 산중에서 차를 달여 마시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차를 즐기기 위해 마신 것이 아니라 목마름을 적시고 마음을 맑히기 위해 마셨으

김대렴(金大廉)과 흥덕왕(興德王)

지리산에 차씨를 심어 천년의 차밭을 열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25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충담사의 차공양으로 향기를 얻었고, 월명사의 향가로 정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 향기와 정신을 천년의 차밭으로 키운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김대렴과 흥덕왕이다. 한 사람은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왔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나라의 땅에 심게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알의 씨앗을 심은 일을 넘어, 한국 차문화사의 새로운 문명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흥덕왕조에는 짧지만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 이르러 크게 성행하였다.” 불과 몇 구절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록은 한국 차문화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바다를 건너온 작은 차씨가 임금의 뜻을 만나 지리산에 심어지고, 마침내 천년을 이어 갈 차문화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은 김대렴을 우리나라에 차를 처음 들여온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료는 분명히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다”라고 기록한다. 김대렴 이전에도 신라에는 차가 알려져 있었으며, 왕실이나 절을 중심으로

월명사(月明師)와 경덕왕(景德王)

향가와 차향으로 나라를 깨우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24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산중의 수행에서만 꽃핀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도 차향이 스며 있었고, 불전에도 차연이 올랐으며, 향가의 선율 속에도 차 한 잔의 맑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경덕왕(景德王)과 월명사(月明師)가 있다. 경덕왕은 신라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성숙한 시대를 이끈 군주였다. 황룡사 구층목탑이 나라를 상징하고, 불교예술과 향가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왕실은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예(禮)와 공양, 그리고 덕을 나누는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 월명사의 도솔가 (月明師兜率歌)에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은 월명사의 향가를 듣고 크게 감동하여 '품다(品茶) 일습(一襲)'을 내렸다고 하였다. '품다'는 문자 그대로는 차를 음미한다는 뜻이며, '일습'은 한 벌의 의복이나 예물을 가리킨다. 학자들 사이에는 차와 다구를 함께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차를 마시는 예를 베풀었다는 해석이 함께 존재한다.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임금이 차를 으뜸 예물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차가 이미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월명사는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께 차를 올린 형제 수행자 한국차인열전(10) [라석의 차와 시서화] 23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한국 차문화사에서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가장 오래된 차 수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단순히 차를 즐긴 차인이 아니라, 차를 수행과 공양의 길로 승화시킨 신라의 왕자들이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두 사람을 신문왕계 왕자일 가능성이 높은 역사적 인물로 보고 있으며, 왕위 계승 과정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세속의 권력을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신앙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던 인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들이 남긴 삶은 은둔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더 깊은 기도였다. 《삼국유사》에는 두 왕자가 오대산에 각각 암자를 짓고 새벽마다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 올리며(煎茶供養)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전차(煎茶)'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 가운데 하나며, 한국 불교 차문화의 출발을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된다. 오대산의 새벽은 언제나 맑은 안개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문수봉을 감싸는 운무 사이로 샘물을 길어 와 조용히 불을 지피고, 맑은 물이 끓어오르면 정성껏 차를 달여 문수보살께 올렸을 것이다. 그 차는 갈증을 풀기 위한 음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