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에 낸 문제가 혹 다음 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것이 혹 지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역시 국시(國試)에서도 나올 수 있어서 혹 남의 작품을 외웠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고, (가운데 줄임) 또 과장이 엄격하지 못해 무뢰배가 요란하게 밟고 다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갖은 수단으로 엿보고, 책을 끼고 들어와 답안을 대신 써주므로 공부하는 자가 이 탓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자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8년(1794)에는 "손으로 붓 잡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분수없는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과거에 응시한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은 과거장에 여러 명의 조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 글씨를 써주는 '서수(書手)'가 따라 들어갑니다. 정작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닥 안고 대리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군(先接軍)'이 있었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시소(試所, 과거를 치르던 곳)의 말을 듣건대 책을 들고 따라왔다가 금란소(禁亂所)에 잡힌 된 사람이 퍽 많았다고 했다. (가운데 줄임) 또다시 범할 적에는 결단코 덮어줄 수가 없을 것이니, 성균관(成均館)이 여러 유생을 타일러서, 다음에는 과장 안에 책을 들고 따라 들어오는 난잡한 폐단들을 다시 더 거듭 못 하게 하라." 하였다. 위는 《정조실록》 정조 7년(1783년) 9월 9일 치 기록입니다. 조선 말기 과거시험은 심각한 부패로 물들었습니다. 특히 부유한 사대부들은 즐기며 한가롭게 노느라 평소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리고 있다가 과거시험이 있으면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 대신 글을 짓거나 쓰게 했습니다. 요즘의 대리시험과 같은 것이지요. 이때 글을 짓는 사람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글씨를 쓰는 사람은 베껴 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사수(寫手)라 했습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허경진 옮김, 서해문집)》에 보면 그들은 드러누워 조보(朝報) 곧 승정원의 발표사항을 필사해서 배포하는 관보를 들춰보다가 과거를 연다는 기사를 보면 “거벽과 사수는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