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주렴개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원관이불가설완(可遠觀而不可褻玩)” 이는 연꽃이 연못 한가운데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가까이서 함부로 만지고 감상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린 예쁜 것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꺾어서 화병에 꽂아두기도 하지요. 짧은 시간 감상을 위하여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꽃은 곧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래를 손바닥에 올려두면 적은 양이어도 오래 간직할 수 있지만 욕심껏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맙니다. 아름다움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텔레비전을 너무 선명하게 만들어 땀구멍까지 보이고 코털의 세밀함까지 보여준다면 결코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산에 피는 야생화가 그리 아름다운 이유는 적당한 거리에서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색 찬란한 무지개도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습니다. 지나치게 친밀하여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단점이나 갈등을 보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치 고슴도치 사랑처럼 말이지요. 그림도 그러합니다. 멀리서 보면 세부적인 결함이나 불균형, 균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애련설(愛蓮說) - 주돈이 연꽃은 진흙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愛蓮之出淤於泥而不染)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니(濯淸漣而不妖) 속은 비었으되 겉은 곧으며,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니(中通外直不蔓不枝)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맑고 우뚝하게 서 있네(亭亭靜植) 이제 연꽃이 곳곳에 아름답게 피어 있다. 그런데 유학자나 문인들에 앞서 우리는 오히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꽃의 의미를 먼저 가르쳐 주었다. 군자로서 이웃에 맑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는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점을 불경은 가르쳐 주는 것이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 불교 호법신의 하나)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고 대중들이 어리둥절할 때 제자 가섭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는데 그것이 ‘염화시중’ 곧 ‘염화미소’라 하며 이후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진흙탕은 욕심과 음모, 번뇌와 괴로움으로 점철된 우리 사바세계를 뜻하고, 연꽃은 그런 유혹과 괴로움에 물들지 않고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