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응칠 역사>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혹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씀드린다면,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에 쓴 자신의 자서전입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라면서 ‘안응칠 역사’는 또 뭐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응칠’은 안 의사의 자(字)입니다. 안 의사의 배와 가슴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응칠 역사>는 안응칠(중근) 개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직접 썼으니까 자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안 의사는 이 자서전을 1909. 12. 13. 쓰기 시작하여 사형집행 11일 전인 1910. 3. 15. 집필을 마쳤습니다. 안 의사는 자서전 집필을 끝낼 무렵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일제가 사형을 빨리 집행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서론만 쓰고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지요. <안응칠 역사> 끝부분에 가면 안 의사가 평석(平石)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사형집행일을 예정보다 한 달 남짓 늦추어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평석 고등법원장은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은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합니다. 안 의사는 항소해봐야 결과가 뻔하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항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는 시간만은 확보하고 싶었는데, 고등법원장이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항소할 생각을 안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안 의사는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감사하기를 마지못하고 돌아와 공소권 청구할 것을 포기했다. 설사 공소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 뻔할 뿐더러, 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이라고 하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였다.”
안중근 의사가 워낙 민족의 영웅이니까, 안 의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안응칠 역사>에는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재미있는 사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안 의사는 <안응칠 역사>에서 먼저 자신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의 젊었을 때 이야기부터 합니다. 안 진사는 이미 8~9세 때에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통감을 읽을 때에는 훈장선생이 책을 펴고 한 글자를 가리키며 “이 글자에서부터 열 장 아래 있는 글자가 무슨 글자이냐?”고 물으면 척하니 알아맞혔답니다. 선생이 이리 저리로 머리를 굴려가며 물어보아도 틀림이 없이 척척 맞히니, 선동(仙童) - 신동을 뜻하는 듯 - 이란 소리를 들었다는군요.
▲ 안중근 의사 아버지 안태훈,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들어가 살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렇게 천재 소리를 들으니 안 진사는 1884년 박영효가 70명의 청년을 선정하여 유학 보내려 할 때 거기에도 뽑혔습니다. 그런데 안 의사의 표현에 의하면 정부의 간신배들이 박씨를 모함하여 반역한다고 잡으려 하자, 박씨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동지들과 학생들은 혹 살육도 당하고, 혹은 붙잡혀 귀양가기도 했는데, 이때 안 진사는 몸을 피하여 고향집으로 돌아와 숨어 살았답니다.
1884년이면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동이 되어 갑신정변을 일으킨 해이군요.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난 개화당의 중요인사들은 피살당하거나 도주하였는데, 이 때 박영효도 일본으로 도주하였지요. 아마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얼마 전에 박영효가 유학을 희망하는 청년들을 모집하였는데, 그 때 안 진사도 뽑혔었나 보군요.
안 진사는 이때의 실망스런 경험으로 국사가 날로 틀려져가니 부귀공명은 바랄 것이 못 되고, 그렇기에 산에 들어가 살면서 구름 아래 밭이나 갈고 달밤에 고기나 낚으며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집안 살림을 모두 팔아 재산을 정리하여 70~80명의 가솔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들어갑니다. 청계동은 지형은 험준하나 논밭이 갖추어 있고 산수경치가 아름다워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라고 할 만 하였답니다. 이 때 안 의사의 나이는 6~7살 정도였지요.
원래 <안응칠 역사>를 읽고 재미있어서 독후감 한 편을 쓰려고 하였는데, 쓸거리가 많아 오늘은 서론격으로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