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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미국과 이승만이 구원해준 친일파들

우린 너무 몰랐다 3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2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도올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단이 되고, 아직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는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이 소련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3.8선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미국은 일본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별로 생각이 없던 소련을 끌어들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서부전선의 병력을 빼서 동쪽으로 돌릴 만큼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소련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관동군과 대결을 벌이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아마 러일전쟁 때 만만하게 보던 일본에 참패한 쓰라린 기억이 있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일본이 원자탄 한 방으로 비틀거리자, 소련은 미국이 차려준 밥상을 걷어갈까 봐 부랴부랴 만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정세 판단을 잘하여 소련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분단의 비극도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우리의 역사나 문화, 우리민족의 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였습니다. 그러니 한반도에 진주한 하지 중장은 약소국의 서러움을 씻어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그저 패전국의 한 영토에 진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지의 머리에는 이 점령지에서 어떻게 말썽없이 효율적으로 군정(軍政)을 잘 이끌어가느냐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그런 하지의 눈에 일제에 부역하던 관리들과 경찰관은 당장 효율적인 군정을 위해서는 아주 요긴하게 부릴 수 있는 개들이었지요. 광복으로 주눅이 들어있던 이들도 자신들이 살길을 찾았다며, 하지의 부름에 충성을 다하였을 거고요. 도올은 8.15 해방에 모든 민족이 다 소리높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제에 빌붙어 평안을 누리던 이들은 예상치 못한 일본의 항복에 당혹해하고, 일본의 패망에 땅을 쳤을 거라는 거지요.​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이들을 구원해준 사람이 이승만입니다.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외교 활동만 벌였던 이승만은 귀국하였을 때 국내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이들을 활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더 살아날 수 있고 기고만장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미국이 만들어 준 분단이라는 상황입니다. 북한에 공산국가가 들어선 것은 이승만에게는 정적 탄압의 좋은 구실이 되었고, 이들은 없는 빨갱이도 만들어가며 그런 탄압에 더욱 앞장선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반민특위 만드는 것을 승인하였지만, 곧이어 반민특위를 탄압하고 해산시켰습니다.

 

해방 정국과 6.25 정국에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한 사례가 많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잘 모르는 최능진이란 사람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저도 최능진에 대해 잘 모르다가 이번에 도올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였던 최능진은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뒤 경무국 수사과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런데 친일경찰이 다시 전면에 등용되는 것에 항의하다가 밀려납니다. 그리고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서 이승만에 맞서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합니다. 그런데 막상 선거운동에 나서니 최능진의 인기가 높아 자칫 이승만이 낙선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동대문경찰서장 윤기병은 최능진에게 추천서를 써주었던 사람들을 협박하여 추천인 200명 중 27인의 날인이 본인 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능진의 입후보등록을 취소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맞선 최능진이 괘씸하여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혁명의용군 사건을 날조하여 최능진을 구속합니다. 최능진은 그 뒤 1951. 2. 11.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처형됩니다.

 

우리가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한반도의 허리는 그대로 잘려져 있고, 지금 남쪽은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공산주의 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근원은 미국이 소련을 끌어들인 것이고, 친일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한 것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국은 자기네 계산과 이익하에서 행동한 것이므로 왜 미국이 식민치하에서 고생하던 대한민국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았냐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런 사태를 일으킨 일제를 원망할 것이며, 그보다 더욱 책망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열강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넘겨볼 때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친일파니, 친러파니, 친청파니 하면서 자기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다가 나라를 넘겨준 우리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즘 우리 주위를 돌아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구한말처럼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모리배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