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철학과 예언 머리 아닌 생명으로 터진 말 (심) 밝힘 밝게 배워 다시 밝힌 말 (돌) 궁리의 민낯 인과의 실타래 (초) 무지의 바다에 떠오른 말들 (달) ... 25.1.27. 불한시사 합작시 철학(哲學)이란 단순히 서양에서 말하는 개념적 체계나 사변적 사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지혜로 밝히는 학문이자 밝힌 것을 밝게 배움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성인과 선각자들이 드러내 놓은 삶과 세계의 이치를 배우고, 그것을 다시 자기의 사유 속에서 밝히며, 나아가 더욱 실천적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축적과 성찰, 그리고 궁리를 통해 점차 심화하는 후천적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 길에서 중요한 것은 묻는 일이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그러한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가운데 인과의 결이 드러나고, 복잡하게 얽힌 세계의 실타래가 서서히 풀린다.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학문이다. 이에 견줘 예언(豫言)은 다른 결을 지닌다. 예언은 배우고 쌓아 올린 결과라기보다, 생명 깊은 곳에서 문득 솟아나는 직관의 언어다. 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밤의 천안 주막은 크고 깨끗한 편이었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끼었다. 주막 주위에 거위들이 어슬렁거린다. 8시 17분 주막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다. 9시 8분에 휴식. 남쪽으로 작은 계곡이 흐른다. 주위는 구릉이 달리고 있는 첩첩산중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행인들이 꽤 많다. 짐꾼들이 동물과 쌀, 담뱃대 그리고 상자를 지고 가고 있다. 주막들에서 많은 양의 놋쇠 그릇이 보인다. 행인도 많고 마을도 많다. 10시 4분 주막 출발. 남쪽으로 향하다가 약간 서쪽으로 틀었는데 감탄할 만하게 경작이 잘 된 지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논이다. 배수로도 완벽하다. 버려진 땅은 한 뙈기도 없다. 길을 따라 연달아 고을과 마을이 나타난다. 덕평 주막이라는 곳은 주위엔 관목이 우거져 있고 산악지역의 분위기가 풍긴다. 11시 16분 마을 언저리에서 휴식을 취하다. 11시 45분 주막이 있는 원토 마을 서쪽 끝에서 쉬었다. 조선에서 다랑이논을 처음 보다. 어떤 곳은 180m~270m까지 올라갔다. 조선의 서쪽 지형은 토양이 쉬이 씻겨 내려가 경작하기 어려운데 이곳은 그와 달라 이처럼 계단식 경작이 가능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도올 김용옥은 선악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의 대립 개념으로서 악(不善)이란 그 나름대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여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 자체도 악에 대칭되는 선이 아니며 서양인들이 말하는 ‘good’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선은 우리말로 ‘착할 선’ ‘좋을 선’ ‘잘 선’으로 훈을 다는데, 선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우리말은 부사적, 형용사적으로 자주 쓰이는 ‘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미의 대립은 추가 아니고 오(惡)이듯이, 선의 대립은 악이 아니고 불선이며 선과 불선은 정도의 문제지 실체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말한 것은 지극히 서양적인 사고방식이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은 국정 연설에서 북한ㆍ이란ㆍ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선언하고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노자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이라크의 후세인은 악이 아니고 부시 대통령이 생각하는 선이 좀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라크의 후세인은 악의 축이기 때문에 때려 부숴야 한다”라는 것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이다. 노자의 관점에서는, 후세인도 개과천선하면 부시처럼 선한 사람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해마다 벚꽃이 피는 시기가 앞당겨진다는 사실이다. 벚꽃이 피는 시기는 곳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기상청은 기준을 정하여 한반도의 벚꽃 개화 시기 변화를 관측한다. 벚꽃이 꽃 피는 기준이 되는 나무는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 있는 기상관측소 안에 있는 왕벚나무다. 서울에서 벚꽃이 피었다는 판정은 이 왕벚나무를 기준으로 한다. 여의도처럼 지역별로 따로 보기도 하는데, 여의도 윤중로는 국회 맞은편 118~120번 벚나무 3그루를 기준으로 개화를 판단한다. 아래 그림은 서울의 벚꽃 개화일을 100년 동안 관측한 결과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6년에 벚꽃은 4월 23일에 피었다. 50년 전인 1976년에는 벚꽃이 4월 11일에 피었다. 최근 5년 동안의 벚꽃 개화일을 여의도 기준으로 조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표1> 최근 5년 동안의 서울 벚꽃 개화일 기상 자료를 살펴보면 과거에는 벚꽃이 4월 중ㆍ하순에 피었다. 그러나 이제는 벚꽃 피는 때가 3~4주 앞당겨졌다. 벚꽃은 3월 말부터 피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처럼 벚꽃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고려의 차가 국가 의례와 불교적 수행 속에서 하나의 완결된 형식을 이루었다면, 조선에 이르러 그 형식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왕조가 바뀌었을 뿐, 삶의 리듬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의 궁중과 절에서 이어지던 차는 조선 전기에도 여전히 국가 의례와 일상에 남아 있었다. 다만 그 위치는 이미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는 언제나 이전의 질서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혀지며 자리를 잡는다. 이때 차는 바로 그 경계에 놓여 있었다. 불교적 공양과 고려의 궁중 의례 속에서 사용되던 차는, 조선 전기에도 여전히 제례와 의식의 한 요소로 기능하였다. 그 흔적은 국가의 법전과 의례서 속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종묘와 사직, 그리고 왕실의 여러 의례에서 차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보인다. 비록 중심은 점차 술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차는 여전히 의식의 정결함을 상징하는 요소로 남아 있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제례에서는 차와 술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지난 2019년부터 2023년까지 <한방으로 알아보는 건강상식>를 연재했던 유용우 한의사가 이제 새롭게 <음식과 건강>이란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귀중한 의서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 하여 “음식과 약은 본질적으로 같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유용우 한의사는 이번 연재를 통해 음식으로 건강을 지키는 법을 가 가르쳐 줄 것입니다.(편집자 말씀) 봄이 되면 괜히 몸이 무겁고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충분히 쉬었는데도 개운하지 않고, 오후가 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흔히 ‘춘곤증’이라 부르지만, 이때의 피로는 단순한 나른함과는 다르다. 겨울 동안 안으로 모였던 기운이 위로 올라오면서, 몸이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때 생기는 피로다. 이럴 때 예로부터 찾던 음식이 있다. 다슬기국이다. 맑은 국물에 쌉싸름한 맛이 도는 다슬기국을 한 숟갈 떠먹으면, 묘하게 속이 풀리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 경험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식생활의 감각이 만들어낸 결과다. 한의학 고전에서는 다슬기를 ‘석라(石螺)’ 또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謨 운거영웅부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爲國丹心誰有知 위국단심수유지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 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구나! 백성과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 허물은 없었다오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누가 알아주리 한 영웅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운이 다함에 슬퍼하는군요. 누구일까요? 바로 전봉준(1855~ 1955)입니다.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체포된 전봉준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읊은 절명시(絶命詩)입니다.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이런 절명시를 썼다는 것에 다소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전라 고부군의 향교에서 장의(掌議)를 지낸, 성리학에 소양이 있는 몰락양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전봉준은 5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서당 훈장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몰락한 양반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당연히 이런 절명시를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봉준의 위대한 점은 그래도 양반의 끝자락에서 아등바등하지 않고, 당시 도탄에 빠진 농민들과 아픔을 함께한 것입니다. 전봉준의 별명이 녹두장군이지요? 키가 5척(약 152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젯밤 경기도 소사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엄청난 기러기 떼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낮게 날았다. 밤에 기러기 소리에 종종 잠을 깼다. 오늘은 꽤꽥거리는 기러기 소리가 더욱 잦다. 정말 많은 기러기가 주변을 날아다닌다. 조선인들은 기러기를 건드리거나 잡아먹지 않는다. 대신에 기러기를 잡아 집을 지키는 용도로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안성장에 갔다. 규모가 매우 컸다. 족히 4천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군중이 나를 보러 밀려든다. 북새통 속에서 한 소년이 넘어지며 감을 떨어뜨린다. 순식간에 등을 밟히고 진흙탕에 머리를 쳐박힌다. 사람들에 에워싸인 나는 앞을 볼 수 없다. 내게 적개심을 보이거나 쏘아보는 기색은 없지만 무례한 호기심은 놀랍다. ‘’쉿”, “제미”라고 외치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천태만상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보인다. 사진을 찍어두고 싶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무례하여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내 일꾼들이 몽둥이질을 해댄다. 소년을 후려치기도 하고 갓을 잡아채기도 한다. 나는 악당 같은 그들의 행동을 막느라고 힘들었다. 10시 42분 가까스로 장터를 벗어났다. 매우 신기한 경험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겨울의 묵직한 외투를 벗어 던진 대지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지표면 어디쯤에선가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대지가 겨우내 품어온 뜨거운 생동감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봄의 지문(指紋)이자, 잠든 생명을 깨우는 고요한 합창입니다. 아지랑이는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지만, 세상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흔들어 놓습니다. 메마른 논둑길 위로, 혹은 보리밭 사잇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딱딱했던 세상의 경계는 이내 부드러워집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지만,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그 움직임은 마치 대지가 추는 느릿한 춤사위와 같습니다. 아지랑이 너머로 보이는 원경(遠景)은 마치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져 나가고, 그 일렁임 속에서 세상은 잠시 현실의 무게를 잊은 채 몽환적인 꿈을 꿉니다. 아지랑이는 단순히 공기의 밀도 차이가 만들어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가운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려 애쓰는 씨앗들의 거친 호흡이며, 얼어붙었던 강물이 풀리며 숨 쉬는 안도감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이미 봄의 맥박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햇살이 지면을 애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道)와 길 도가 진리면 길은 삶의 방향 (돌) 도가 추상이면 길은 구체 삶 (심) 로고스와 통하니 길 넓어져 (달) 넓은 길엔 드나들 문 없다네 (빛) ... 25.2.3. 불한시사 합작시 “도(道)”를 단순히 “길”로 번역하는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이해의 문제이다. 길은 분명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방향이며, 실천의 방식이고, 선택의 궤적이다. 그러나 도(道)는 그러한 길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질서이자, 모든 길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리와 법칙에 가깝다. 이 점에서 “길”은 경험적이고 구상적이며, “도(道)”는 초경험적이며 근원적이다. 길은 걸어가야 비로소 생겨나지만, 도는 걷기 이전에도 이미 그러한 길이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도를 길이라 옮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을 지상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이해하게 되며, 그 본래의 심연적 의미는 일정 부분 가려지게 된다. 이는 곧 노자의 도덕경 제1장의 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의 문제와 직결된다. 도를 말할 수 있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고정된 개념이 되어버리고, 그러한 개념화된 도는 더 이상 “상도(常道)”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