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자> 2021년 5월 25일(화)
<답사 참가자> 이상훈 박인기 우명길 이규석 원영환 최돈형 모두 6명
<답사기 작성일> 2021년 6월 3일(목)
이날 걷는 제7구간은 평창군의 마지막 구간이 된다. 그다음 구간부터 영월군이다. 이날 평창읍 응암리 응암굴 앞 펜션에서 11시 30분에 5명이 출발하였다. 중간에 시인마뇽이 참가하여 모두 6명이 평창읍 대하리 연화사 입구까지 12km를 걸었다.
응암리는 평창읍에서 남쪽 5k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평창강에 둘러싸인 외진 마을이다. 마을을 통과하는 도로는 없고, 1.5km 정도 산길로 들어가야 마을에 갈 수 있다. 마을의 지형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고 하여 매화라는 속명을 붙여 매화마을이라고 불렀다. 응암리 동쪽으로 절개산(876m)이 우뚝 솟아 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 맞은편 절벽을 바라보면 2개의 굴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 노산고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평창군수 권두문이 남은 병력 그리고 가족과 피난민들을 이끌고 이 굴로 피신하였다. 《평창군 지명지》> 134~135쪽에는 “위쪽에 있는 관굴(官窟)은 백여 명의 사람이 들어가 웅거할 수 있고, 아래쪽에 있는 민굴(民窟)은 약 2천 명이 들어갈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호구록》 18쪽에는 “위쪽 굴에는 10여 명, 아래쪽 굴에는 10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굴의 규모에 대해서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데, 평창군에서는 굴을 답사하여 크기를 조사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평소 매를 길렀던 권 군수가 매의 발목에 서신을 매달아 피신해 있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불행히도 매가 왜군에게 발각되고 왜군은 굴을 공격하였다. 격렬한 싸움 끝에 남은 병력과 첩은 죽고 군수는 포로가 되었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이 굴을 응암굴, 이 마을을 매화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화가 있어서 매화마을이 아니고, 매가 화(禍)를 불러들였다는 의미라고 하니 오해하기 쉬운 이름이다. 나는 응암리에 여러 번 왔었다. 평창강가에 있던 이전 안내판에는 ‘매가 화를 불렀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번 답사에서 보니 안내판이 새로 바뀌었고, 그 내용은 빠져있다.
펜션 바로 앞에 강을 가로질러 기다란 줄이 걸쳐있다. 펜션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건너편 계곡에서 샘이 흘러나오고, 그 샘물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물관이라고 한다. 이 물을 펜션에서 사용하고 일부는 펜션 밖으로 돌려 길손들을 위한 약수터를 만들어 놓았다. 펜션 주인장의 지혜와 친절이 돋보였다.
절벽 아래 강가에 서 있는 안내판에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평창의 향토사학자 정원대 시인이 쓴 <강소사>라는 시다.
<강소사(康召史)>
정원대
임진년 봄날에
독한 짐승 떼들이
동해를 건너 동촌(東村)에서
흙먼지를 불태우고
응암굴
매 한 마리
힘찬 날개짓 세상을 일으켰다
절의(節義)를 꽃피운
외대(外臺) 월대(越臺)
전설처럼 흐르는 평창강
꽃 같은 몸을 날려
옥(玉)처럼 부서져
만고(萬高)의 정절(貞節)을 이루었도다
아! 아름답도다 강소사
타오르는 불꽃이여
강소사는 평창군수의 부실(副室, 첩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군수를 따라 응암굴로 피신하였다. 전투가 벌어져 군수는 다치고 왜군의 포로가 된다. 그러자 강소사는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굴에서 꽃 같은 몸을 강물로 날려 옥(玉)처럼 부서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항전 기록은 임진년 1592년 3월에 평창군수로 부임한 권두문 군수가 기록한 《호구록(虎口錄)》과 지씨 문중에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 《응암지(鷹岩志)》가 있다. 《호구록》은 왜군이 평창에 진입한 8월 7일부터 권두문 군수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는 9월 13일까지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며, 그 이전의 기록은 《응암지》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문헌은 응암리의 전투 중 같은 상황에서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된 내용인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응암지》>는 아군의 전과를 과장한 것 같고 《호구록》의 기록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사가들은 보고 있다.
《호구록》을 읽어보면 당시 전투의 치열함, 강소사가 뛰어내리는 장면, 왜장이 강소사의 절개를 높이 여겨 화장(火葬)해 주는 일, 고통스러운 포로 생활과 아슬아슬한 탈출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호구록》>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아래 주소에서 전문을 읽어볼 수 있다.
《호구록》 읽기 https://cafe.daum.net/suwonprofessor/RJe1/964
평창군청에서 절개암 봉우리 위에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쉼터에 가려면 강을 건너서 갈 수는 없고, 절개암 뒤편 천동리로 멀리 돌아가야 한다. 쉼터에서 내려다보면 평창강 물이 응암리를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한반도 지형 못지않은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 나는 쉼터에 여러 번 올라가 보았다. 평창군에서는 이곳을 관광지로 잘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응암굴이 있는 절벽은 절개산의 일부다. 절개산 정상은 남동쪽으로 보이는 876m 높이의 봉우리를 말한다. 나는 몇 년 전 여름에, 둘째 아들과 함께 절개산 정상까지 등산한 적이 있다. 절개산을 오르는데, 한 번도 내리막이 없이 줄곧 오르막이 계속되어 등산하기가 엄청나게 힘들었다. 한 시간 남짓 땀을 뻘뻘 흘리며 드디어 정상에 올랐는데, 맙소사, 울창한 숲에 가로막혀서 사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혹시 절개산 등산을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필자의 경험담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되어 매화마을 녹색길 안내판이 둑길 왼쪽에 나타났다. 매화마을 녹색길은 절개 둘레길이라고도 불리는데, 한적한 소나무 숲길을 걷고 절개산을 바라보며 평창강 둑길을 걷는 멋진 둘레길이다. 이 길의 길이는 4.5km에 달하는데 2010년 9월에 조성되었다. 잘 알려졌지 않지만 평창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둘레길이다.
100m 정도 더 가자 둑길 왼쪽 강가에 서 있는 김삿갓 시비를 만났다.
김삿갓은 평창에서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이곳에 있던 섶다리로 평창강을 건너려다 아름다운 경치에 홀렸다. 그는 강가에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났단다. 그때 쓴 ‘강가(江家)’라는 시가 여기 서있는 시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강가(江家)
김삿갓
船頭魚躍 銀三尺 선두어약 은삼척
門前峰高 玉萬層 문전봉고 옥만층
流水當窓 稚子潔 유수당창 치자결
落花入室 老妻香 낙화입실 노처향
뱃머리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은이 석자요
문 앞에 산봉우리 높으니 옥이 만 층이라
창 바로 앞에 물 흐르니 어린아이 늘 깨끗하고
떨어지는 꽃잎이 방으로 날아드니 늙은 아내까지 향기로워진다.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울린다. 낙화입실 노처향 (落花入室 老妻香)이라. 꽃잎이 떨어져 방으로 날아드니 늙은 아내까지 향기로워진다고... 참으로 멋진 구절이다. 김삿갓은 풍자시를 잘 썼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서정시도 남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