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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집 아들이 가지는 특권(?)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 16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내가 잠시 몇 년 동안 다니던 초등학교는 면소재지를 근처에 두고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그 마을이 광역시에 포함되어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지만, 내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옆으로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봄이 되면 파란 보리밭 사이를 지나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곤 했었는데, 얼마 전 40여 년 만에 찾아가 보니 아파트들에 둘러싸여 학교 건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니 학교 또래들의 집안은 다섯 중에 네 명 정도는 농사를 지었다. 소도 키우고 염소나 오리도 키우는 그런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마을에서 공장을 하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마을 어른들까지도 나를 가리켜 ‘공장집 아들’이라 불렀다. 나름 그 당시에 ‘사장 아들’이라는 호칭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실 농사 깐깐하게 잘 짓는 집에 견주어 잘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농사꾼들이 즐비하던 마을에서 공장 하는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내 담임은 물론이고, 학교에 주임 정도 되는 선생님들은 우리집을 자주 찾아와서 아버지랑 막걸리를 마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당신의 아버지 손에 끌려 나와 지게 지고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살아보려 애쓰신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공장집 아들인 것이 자랑스러운 적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형들과 누나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형제가 없었던 나는 가끔 친구랑 싸우다가 나한테 맞고 돌아간 녀석이 그의 형을 데리고 와서 내게 복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6학년 형과 그의 친구들일 때도 있었고, 가끔 중학교에 다니는 형을 데리고 와서 나를 협박하는 예도 있었다.

 

그렇게 응징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더 나를 꾸짖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당하고만 왔나? 힘이 모자라면 돌멩이 같은 걸로 머리라도 깨 주고 와야지...”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주문이었지만, 당시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그리 엄하셨다. 때리고는 와도 맞고 오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시던 그런 아버지였다.

 

그럴 때, 나는 공장에서 일하던 형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떻게든 우리 공장 근처까지 그 들을 유인한 뒤, 큰 소리로 우리 공장에서 일하던 형들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러면 팔뚝에 근육이 꿈틀거리고 작업복에 작업모를 쓴 형들이

“와? 무슨 일이고? 누가 우리동생 괴롭히노?”

하면서 내 든든한 백이 되어줬다.

 

 

시골 마을에서 공장집 아들이 가지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저거 저리 겁 많아서 우야노?”라고 하셨지만

한 번도 그 형들의 비호를 말리지는 않으셨다.

 

제주도 여행하시면서 아버지는,

그때, 6.25 당시...

전쟁이 끝나면 제주도에서 철공소나 차려볼까 생각했다고 하셨다.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좋아 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