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사실 아버지는 잔인한 분은 못되었다.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는 걸 본적이 없다. 예전 분 같으면 산에서 토끼도 잡고, 꿩도 잡고, 하다못해 강에서 물고기도 잡아 잡수셨을 텐데,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일은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셨다. 그렇다고 동물, 곧 고기를 안 드시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죽이는 작업은 예전부터 늘 할머니와 어린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한번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한가위 하루 전날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할머니께서 우물가에 닭이 있으니 좀 잡으라는 것이었다. 늘 해 오던 일이라 나는 무심하게 우물가로 갔더니, 큰 수탉 한 마리가 다리와 날개가 묶여 넓적한 돌 아래에 눌려있는 것이었다. 이 풍경이 의아해서 닭을 왜 이렇게 해놓으셨냐 물었더니,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다 못한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닭을 잡으라고 성화를 내셨고, 아버지는 그 닭을 묶어 목을 비틀어 놨는데도 죽지를 않아서 큰 돌로 눌러 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숨 막혀 죽을 것으로 생각하셨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정말이냐 물었더니, 아버지께서는 겸연쩍게 웃으시며 “닭이 실하다. 잘 안 죽네.” 하셨다. 그런 아버지는 활어회를 드시는 것도 별로 좋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에게 강원도는 애증이 새겨져 있는 지역이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그 시절,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배속된 곳은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아버지는 강원도지역에 군부대에 보급품을 실어다 주는 일을 하셨다는데, 지금이야 강원도 가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1951년 당시 강원도 가는 길이 정비가 된 것도 아니고, 포장된 것도 아닐 테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곳을 보급품 가득 실은 고물 미제트럭을 몰고 다니셨다니,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셨다고 하셨다. 한번은 비가 많이 온 뒤라 길이 무너져 내려서 늘 가던 길을 포기하고 산길을 돌고 돌아 보급품을 전하러 갔더니 이미 부대가 퇴각하고 난 뒤에 도착한 때도 있었다. 시체만 널브러져 있는 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당신의 사촌매형이 일하고 계시던 강원도 산판에 가서 몇 년 일도 하셨고, 칠순이 넘으셔서부터는 강원도 오대산 근처에 살만한 움막을 하나 찾았다 하시면서, 그곳에 가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근처에 병원도 없고 교통도 불편한 그곳에 왜 가려고 하시냐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내가 잠시 몇 년 동안 다니던 초등학교는 면소재지를 근처에 두고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그 마을이 광역시에 포함되어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지만, 내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옆으로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봄이 되면 파란 보리밭 사이를 지나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곤 했었는데, 얼마 전 40여 년 만에 찾아가 보니 아파트들에 둘러싸여 학교 건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니 학교 또래들의 집안은 다섯 중에 네 명 정도는 농사를 지었다. 소도 키우고 염소나 오리도 키우는 그런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마을에서 공장을 하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마을 어른들까지도 나를 가리켜 ‘공장집 아들’이라 불렀다. 나름 그 당시에 ‘사장 아들’이라는 호칭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실 농사 깐깐하게 잘 짓는 집에 견주어 잘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농사꾼들이 즐비하던 마을에서 공장 하는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내 담임은 물론이고, 학교에 주임 정도 되는 선생님들은 우리집을 자주 찾아와서 아버지랑 막걸리를 마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당신의 아버지 손에 끌려 나와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군대생활을 꽤 영리하게 하셨던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단순하게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군 생활이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 상황에서도 무엇이 돈이 되는 일인지가 보이셨다고 한다. 미군이 주는 보급품이 그 시절 중요한 공산품이었고, 또 그것을 잘만 활용하면 군생 활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이라 부대가 이동할 때, 혹은 퇴각할 때 수 많은 물품이 버려지거나, 혹은 적군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소각하고 떠나게 되는데,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당시 꽤 쏠쏠한 돈벌이도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적당히 협조만 해 주면 장교들이 미국이 주는 보급품으로 장사도 많이 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흘러나간 물건들이 부산 국제시장 같은 일명 양키시장으로 가서 일반시민들도 사서 쓰는 미제물건이 되는 것이라 하셨다. 어떨 때는 새로 전입해온 보급담당 장교 하나가 너무 무리하게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을 보시고,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셨다고 생각되셨는지 그 장교를 불러서 엄청나게 두들겨 패 줬다고 하셨다. 사실 한참 전쟁 중만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영창을 가거나 엄청난 징계를 당하셨을 텐데, 평소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와 음식을 먹는 일은 내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맛있다고 해서 많이 드시지도 않고, 그리고 그것만 자주 드시지도 않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고 당신께서 드시고 싶어 사 온 것이라 해도 딱 한 끼니만 드시면 거의 젓가락을 대는 일이 없으셨다. 그런데도 시장에 가거나 상점에 가면, 뭔가 자잘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시는 성격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포항 죽도시장에서 아마도 가장 큰 문어를 통째로 사 오신 적이 있으셨다. 이 문어의 크기는 지금도 가끔 텔레비전에나 나올만한 크기의 문어였는데, 내 기억으로는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가 족히 2m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문어였다. 시장에서 이 문어를 보는 순간 뭐에 홀린 것처럼 사게 되셨단다. 그 문어를 집에 가져와서 다리 하나씩 잘라 작은아버지 집에 보내고, 동네잔치를 한 다음에도 몇 주간 그 문어를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뒤론 문어를 잘 먹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살 때도, 당시 전자대리점에서 다리 달리고 문도 달린 가장 큰 20인치 텔레비전을 구입하셨다. 사실 지금으로 보자면 화면의 크기가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젊었을 때 워낙 술을 좋아하시고 또 많이도 드시던 아버지는 노년에 통풍으로 무척 고생하셨다. 하지만 등산도 좋아하셔서 많이 다니셨고, 하시던 일도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이어서, 당신이 말년에 통풍을 앓으시는 것이 이해는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무척 통증을 호소하셨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약 드시는 것을 싫어하셔서,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은 통증이 극심할 때만 드셨지 거의 버리기 일쑤였다. 우리 집안 남자들의 술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아버지 삼형제의 술 사랑이 남달랐는데,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이신 작은아버지는 등산을 가거나 성묘를 하러 갈 때면 늘 2리터 페트병에 담긴 소주 한 병과 빈 페트병을 들고 올라가셨다. 그러고는 산에 있는 솔잎이나 머루, 다래, 보리수, 심지어는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나무껍질까지 가지고 오셔서 두 병 나누어 담고는 소주를 부어 놓으셨다. 그 병들은 무덤가 이곳저곳 또는 산속 당신만 아는 비밀장소 이곳저곳에 묻어 두셨는데, 몇 년 후 그 묻어 둔 것을 캐내어 드시는 것을 큰 재미로 아시는 분이셨다. 아버지 형제 가운데 아마도 가장 술을 사랑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칠십이 넘으신 나이에 운전면허를 따셨다. 사람들이 그 나이가 되면 하던 운전도 내려놓으셔야 할 나이셨지만, 당신은 그 나이에 운전학원을 다니시면서 2종 보통 면허증을 따신 것이다. 한국전쟁당시 보급계 부사관을 하셨던 아버지는 GMC 트럭을 몰고 다니셨단다. 우리 아버지는 이를 ‘제무시 도라꾸’ 라 부르셨다. 전쟁 전 따로 운전을 배우신 적은 없었지만 전쟁 당시 전방 부대에 보급품을 운반하시다가 아마 다른 운전병에게 배우셨나 보다. “면허 따위 없어도 내가 강원도 그 험한 산길로 얼마나 다녔는지 모른다.”라고 늘 주장 하셨는데, 결국에는 칠순이 넘어서야 운전면허증을 따셨다. 운전면허도 없던 젊은 시절에도 아버지는 운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가끔 아버지와 택시를 타고 갈 때나, 버스를 타고 갈 때, 간간이 운전사가 왜 운전을 저따위로 하느냐며 자주 불평을 해 대셨다. 나는 그렇게 투덜대는 아버지가 민망하게도 해서, “운전면허증도 없는 분이 왜 그리 다른 사람을 타박하십니까?”라며 핀잔을 드려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운전면허를 따신 아버지는 작은 자동차 하나를 사서 당신이 다니시던 곳, 전쟁 당시 전투하시던 곳에 가보고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소나무를 참 좋아하셨다. 사계절 푸르른 솔이 산에 빼곡하게 있어야 정말 산(山이)라 할 수 있다고 늘 주장 하셨다. 소나무가 많지 않은 바위산이나 삭막한 가지만 있는 겨울산은 산도 아니라고 늘 얘기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는 그저 돌덩어리일 뿐일 것 같다고 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제주의 유명한 <비자림 숲>을 산책하고 오시면서도 비자나무만 가득한 숲을 가리켜, “솔이 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셨다. 그래서 내가 딸아이의 이름을 ‘솔’이라 지었을 때, 여자 아이 이름에는 ‘희’ 자나 ‘숙’자가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며 하시다가도 곧, “그래도 ‘솔’이 항상 푸르니 좋다.”라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에게 가장 잘한 일 하나가 있다면 바로 딸아이 ‘솔’을 아버지의 손녀로 안겨드린 일, 그것뿐일 것이다.
[우리문화신문= 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물에 상당한 애정을 가지신 분이다. 마시는 물이건, 목욕물이건, 좋은 물과 그렇지 못한 물을 구별해 내는 수준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아토피 증상이 있으셔서 그런지 피부가 무척 건조하셨는데, 나이가 드셔서는 피부에 단백질이 부족하셨던지 자주 갈라지고 예민해지셨다. 그래서 물이 좋다는 목욕탕을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셨는데, 덕분에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좋다는 목욕탕이나 사우나, 온천 등은 수없이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리에 눕게 되신 뒤, 나는 대중목욕탕이나 찜질방 같은 곳에는 잘 가지 않게 되었다. 물에 관한 관심 때문에 아버지는 이런저런 사고도 많이 당하셨다. 팔순이 넘어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실 만큼 당신의 열정적인 성격 탓도 있겠지만, 항상 5리터, 10리터짜리 물통을 몇 개씩 오토바이 뒤편에 싣고 물이 좋다는 산에서 약수를 떠 오시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많이 내셨다. 물이란 것이 사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출렁거리기 시작하면 실제 무게의 몇 배나 되는 힘으로 좌, 우를 흔들어 댄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실어 나르시던 물통과 함께 넘어져서 병원에 실려 가시는 고초를 여러 번 겪으셨다. 약수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산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한라산을 한번 올라가 보려 했으나, 그건 아무래도 무모한 일이다 싶어, <비자림 숲>으로 모시고 갔다. 그러나 이번 제주도 여행은 첫날부터 가을비가 마치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 <비자림 숲>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얼른 비옷을 샀다. 아버지에게 비옷을 씌워 드리고, 행여나 추우실까 싶어 큰 우산을 아버지 머리에 씌우며 천천히 걸었다. 나는 제주에 올 때면 자주 비자림 숲길을 찾곤 하지만 그렇게 비를 맞으며 걷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꽤나 많은 사람이 숲길 어귀부터 붐비고 있었다. 아버지는 칠순이 넘으시면서 통풍을 앓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너무 다니지 않으셔서 그런지 다리근육이 너무 약해져 있으셨다. 숲 길가에 바위라도 보일라치면 자꾸만 앉아 쉬기를 반복하셨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후~ 하며 긴 한숨을 쉬셨고, 그런 당신의 노쇠함을 보며 옆에 있던 나는 그 숲길이 어느 때보다도 더 길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 나이 다섯 살쯤 됐을 때부터 나를 데리고 등산을 자주 다니셨다. 아버지 친구들 몇 분과 함께하는 등산모임이 있었는데, 대구, 경북권 산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에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