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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섬 되었소

[평창강 따라 걷기 13-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다리를 하나 건너자 드디어 청령포가 보인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배가 멀리 보인다. 청령포에 가까이 가자 강변에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소나무 숲 사이에 비석이 서 있다. 가까이 가보니 왕방연 시조비다. 단종 유배길의 호송 책임을 맡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임무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가다가,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 이곳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조가 <단장가>로서 영조 때에 펴낸 《청구영언》에 전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시조비가 서 있는 울창한 소나무숲을 솔모정이라고 한다. 소나무 숲이 마치 멋들어진 정자를 떠올리게 한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왕방연 시조비는 1984년에 세워졌다.

 

 

솔모정을 지나자 왼쪽에 커다랗게 움푹 꺼진 분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영월 강변 저류지’다. 영월 저류지는 홍수가 나면 침수되어 물난리가 나는 방절리 일대를 홍수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영월 저류지 조성 공사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부로 추진되었다. 2010년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246억 원의 공사비를 들이고 2011년 말에 완공되었다. 영월 강변 저류지의 저류 용량은 290만 톤이다.

 

저류지에는 월류보를 만든다. 홍수시 강물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이 월류보를 넘어 저류지를 채운다. 강물 수위가 낮아지면 배수문을 열어 저장했던 물을 빼낸다. 영월 저류지는 홍수시에 최대 290만 톤의 물을 강물에서 덜어내어 저장하므로 홍수를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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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월 저류지에 대한 소감은 남다르다. 나는 대학원에서 수질관리를 전공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4대강 사업은 나의 전공 영역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2008년 12월에 4대강 정비 사업을 처음 발표할 때는 강변 저류지를 21개 만든다는 계획이 들어있었다. 강변에 저류지를 많이 만들면 당연히 홍수를 경감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다. 나는 4대강 정비사업을 찬성하는 견해였다.

 

그런데 6달 뒤인 2009년 6월에 ‘4대강 정비사업’이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과 함께 내용도 대폭 바뀌었다. 저류지의 수가 21개에서 3개로 줄어들고, 원래 4개만 만들기로 했던 보의 갯수는 16개로 늘어났다. 강의 본류에 보를 막으면 홍수에는 매우 불리하다. 4대강 사업에서 홍수 방지 목적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2009년 7월 17일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MBC 100토론’에 나가 2:2로 토론을 벌였다. 우리 편은 당시 민주당의 이용섭 의원(현재 광주시장)이었다. 상대편은 인하대의 심명필 교수와 미국 위스콘신대의 박재광 교수가 나왔다. 방송 토론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누가 사실을 왜곡하는지, 시청자로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토론을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전문가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고 생각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22조 원을 투입하여 4대강 사업을 성공적으로(?) 2011년에 완공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하고 나도 퇴직한 이후인 2016년 나는 4대강 사업을 뒤돌아보는 장문의 글을 미디어오늘에 투고한 적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는 아래 주소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명박의 4대강 '삽질'을 기억하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mod=news&act=articleView&idxno=133578

 

저류지는 아주 큰 홍수가 닥쳤을 때를 대비한 시설물로써 평소에는 비어있다. 영월군에서는 저류지 내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산책로와 자전거길을 만들었다. 이날 우리는 길다란 저류지 산책로를 약 4km 걸었다. 저류지 중앙에는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많이 심어놓았다. 평소에 많이 보던 연꽃과 조금 다르다. 무슨 연꽃일까? 옆에 있던 석영이 가시연꽃이라고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저류지 산책을 마치고 낮 3시 5분에 우리는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 청령포로 들어갔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속한다. 광천리라는 지명은 비가 많이 오면 아홉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이 갑자기 불어나서 마을 가운데로 넓은 내를 형성하므로 순수한 토박이말 땅이름인 ‘너부내’라고 불렀다. 그 후 한자식 지명으로 바뀌면서 넓을 광(廣)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광천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령포(淸泠浦)라는 지명은 사시사철 푸르고 맑은 물이 흐르는 포구이므로 청령포라고 하였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다.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청령포는 1971년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산림청에서는 2004년에 청령포 일대의 울창한 송림을 ‘천년의 숲’으로 지정하였다.

 

 

청령포는 1456년 세조(世祖)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의 유배지였다. 단종은 6월 21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읍내로 옮기기 전까지 두 달 동안 단종은 청령포에 머물렀다. 청령포에는 영조 2년(1726)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 39년에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地碑)가 세워져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다.

 

단종이 청령포에 있을 때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차라리 창공을 나는 새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청령포에 위리안치가 된

나는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섬이 되었소

때론 망향대에 올라 돌맹이 하나씩을 포개며

소원을 빌어보기도 하고

때론 관음송에 기대어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오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은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관풍헌은 영월 동헌에 딸린 객사인데 관풍헌 동남쪽에 매죽루라는 누각이 있었다. 단종은 매죽루에 자주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었다. 매죽루에서 단종이 지은 <자규시>와 <자규사>가 전한다. 자규는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로써 단종은 자신의 처지를 자규에 비유하였다.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서 후일에 누각 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자규시(子規詩)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도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부리에 달빛은 희고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하소연 어이 못 듣고

何乃愁人耳獨聽(하내수인이독청)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에만 홀로 들리는가.

 

 

자규사(子規辭)

 

月白夜蜀魂秋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제

含愁情依樓頭 시름에 잠겨 누각에 머리를 기대노라.

爾啼悲我聞苦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을 것을

寄語世苦榮人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愼莫登子規樓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