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구름이 끼어 완전하고 깨끗하게 보름달을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고향에 부모님이 있는 분들은 한가위 백 년 만에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다 같이 보고는 다들 각자 직장이 있고 집이 있는 도시로 돌아갔을 것이다. 코로나로 가족들이 얼굴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다가 3년 만에 비로소 만나서 많은 정을 나누었을 것인데, 내려가는 차량이 그리 많았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꼭 서울에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것만이 아니고 지방 어디건 대도시에서 고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분들도 많아서 차량이 막히는 관계로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올해 추석은 이른바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그리 요란하게 들리지 않고도 지나는 것 같다.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차례음식이나 명절 음식 차리는 문제요, 또 하나는 자녀들의 혼인 혹은 출산 종용 문제가 조금 완화된 데 따른 것 같다.
“차례상에 전 안 올려도 돼요”
“추석 차례상은 송편과 나물, 구이, 김치, 과일, 술이 기본이고 육류와 생선, 떡 정도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한가위 일주일 전에 성균관이 발표한 간소한 차례상 새 표준안은 명절을 맞는 분들의 부담감을 많이 덜어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명절 음식 가운데 만들 때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전을 부치는 것이고, 그것은 어느 집이나 부엌이나 마루에 쭈그리고 앉아서 재료를 만들고 굽고 하는 깃이 너무 힘이 드는 때문이니 이것만 생략해도 한 반은 일이 덜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들들은 벽에 등을 붙이고 편하게 앉아 술안주나 가져오라고 하는 동안 며느리들이 이 음식 장만을 위해 허리도 못 펴고 고생을 한 위대한 역사가 우리의 명절사의 주요한 대목이었다면 아마도 성균관의 발표를 기억하고 시골에 가서 이 과정을 생략한 분들이 있었을 것이기에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리고 또 하나 자녀의 혼인이나 출산 문제는 지금은 우리의 부모들이 무슨 말을 해도 자녀들이 듣지를 않고, 아이를 낳으면 키우는 문제를 부모가 어느 정도 감당해줄 수 없는 세상이니 예전처럼 부모들이 모질게 자식들 가슴에 못 박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성싶다. 그러니 명절증후군 소리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명절 분위기를 돋우는 가장 직접적인 유혹은 사실 전 부치는 것 아닐까? 철판 위에 두른 기름이 지글지글하면서 냄새를 사방으로 퍼트릴 때 우리들의 시각 청각만이 아니라 취각, 후각도 만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고 여기에 반주가 곁들이면 금상첨화인데 문제는 그것을 그동안 우리의 고생하는 며느리들의 담당이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어서 아들들이 도와주거나 서로 같이해 나가면, 명절이 끝나도 모두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것 같은데, 전을 차례상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만들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좀 섭섭할 것이다.
전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새 표준안의 본질은 차례상에 너무 많이 올리지 말자는 것이라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집안에서는 이미 벌써 시행하고 있으니 결국엔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지난해 국학진흥원이 표준사례로 발표를 했지만 퇴계 이황 종가는 설 차례상에 술, 떡국, 포, 전 한 접시, 과일 한 쟁반만 올린다. 과일도 수북이 쌓지 않는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생전에 제자 김성일이 제례에 관하여 물었을 때 “가례규정을 모두 따를 필요가 없다. 집안 형편에 따라 지내면 된다. 분수에 맞지 않게 지나쳐서는 안 되며 제수 그릇 수도 번거로이 할 일이 아니다. 번거로우면 모독이 되고 또 청결히 할 수 없다”라고 했다. 특히나 퇴계는 조카에게 받아쓰게 한 유언에서 “내 제사상에는 유밀과를 올리지 말라”고 했다. 퇴계는 한양의 벼슬아치들이 신참이 오면 며칠 동안 지나치게 잔치를 벌이고 거기에 기름으로 만드는 유밀과를 꼭 올려야 한다는 불문율로 신참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는 일찍이 그 폐단을 심각하게 느낀 바 있었기에 이런 유훈이 내려졌을 것이다.
이러한 간소한 차례상은 퇴계종가의 오랜 전통이고 퇴계의 형님인 우리 온계 이해(1495~1550) 종가에서도 그렇게 간소하게 해 왔기에 새삼 무엇을 올려라, 말아라 할 일이 아닌데도, 어찌 보면 성균관의 대응이 조금 늦은 감이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퇴계의 차례상에는 전 한 접시가 들어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예전에는 그래도 전이란 음식이 어렵게 살던 조선시대에 영양보충을 하는 많지 않은 기회이니 이것까지 못 하게 하는 것은 그렇고 다만 요란하고 번거롭게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니 나름 현명한 대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자녀 혼인이나 출산 문제를 생각해보면 최근에 시대가 바뀌니 자녀를 낳지 않으면 인구가 줄어 우리나라가 망할 것이란 엄포를 아무리 해도 자녀들은 듣지 않으니 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라가 망하니까 당장 어떻게든 아이를 낳으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떼를 쓰는 듯한 태도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저출산이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발전 궤도에서 파생된 사태라면 ‘해결하지 못하면 망한다’라고 호들갑만 떨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미칠 충격파를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중기적으로 인구 감소 추이를 감당하면서 한국 사회가 미래 세대를 위하는 사회, 개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노동권을 중시하는 사회, 아이를 낳으려는 청년세대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지지난해 펴내 인기를 끈 《추월의 시대(김시우, 백승호, 양승훈, 임경빈, 하헌기, 한윤형(지은이) | 메디치미디어)》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대가 그렇게 변하고 있으니 아마도 집집이 예전처럼 질리게 물어보지 않았을 것 같다.
흩어져 있던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고 나의 뿌리를 되돌아보는 것이 명절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정신적으로 살리고 이어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고루한 형식에 사로잡혀 가족끼리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나서는 안 될 일이다. 요즘 남녀 구분이 어디 있던가?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불합리한 예법은 손질해 집안별로 가례(家禮)를 세워 따르면 될 일이 아닌가?
아들ㆍ며느리 역할에서 오는 차이, 혹은 생각의 차이에서 일어난 문제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고민을 하고 고통을 받았지만, 그것이 점점 해결되어가는 추세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전환점에 있는 우리가 명절증후군이란 사회적 현상을 슬기롭게 다 같이 치유하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시대에 맞는 삶의 지혜일 것이다.
21세기라는 말을 쓰는 것은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20세기와는 달라진 세상이고, 모든 정보와 지식의 균등배분, 공통접근으로 모든 이들의 지혜가 급상승하는 시대인 만큼 우리의 명절도 그러한 허례허식이나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모두를 위한 잔치 마당이 되어가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또한 소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