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2012년 10월 6일 자 빌보드 차트 순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2위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8년 정도가 지난 2020년 9월 5일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빌보드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우리랑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빌보드는 이제 한국 음악 시장의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김치와 태권도만이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과거와 달리 K-POP이라는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외국에 우리를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임세혁의 K-POP 서곡’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 치열하게 음악의 탑을 쌓아서 오늘에 이르게 만든 음악 선학들의 이야기다. |
그의 노래는 강물처럼 깊이를 알 수 없지
흘러 흘러가는 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의 노래는 바람처럼 시작을 알 수 없지
불어 불어 가는 끝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의 노랜 자유의 소리 깊은 잠을 깨우는
가슴속에 가둘 수 없는 열정을 그는 노래하네
아! 나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사랑하게 한
그는 내 맘속 깊은 곳에 언제나 함께 하겠지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같은 곡들로 유명한 그룹 다섯손가락의 기타리스트 이두헌은 나의 스승님이다. 칼럼의 특성상 호칭을 이름으로만 표기해서 그렇지 평소에 내가 그분을 부르는 호칭은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용어인 ‘사부님’이다.
2000년 겨울, 사부님의 작업실에 날마다 기타를 메고 들락거리던 시절에 한번은 책 한 권을 가지고 간 적이 있었다.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설명하면서 간간이 인터뷰도 실려 있는 그런 책이었다. 당시에 내가 읽던 부분이 포크 음악과 한대수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사부님이 그 책의 목차를 훑어보시면서 한대수 부분에 멈춰 있는 나의 책갈피 부분을 펴시더니 “이분이 진짜지.”라고 굉장히 단순하지만 강렬한 극찬을 하셨던 기억이 있다.
사부님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존경심을 담아서 2001년에 발매한 ‘이두헌 1집’에 은유가 아니라 대놓고 <한대수>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고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던지 올해 발표한 새 음반에도 새롭게 편곡하여 수록하셨다.
한대수는 그런 존재다. ‘진짜’라는 두 글자로 설명이 가능한 그런 존재.
한대수의 음악을 보면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음악가 ‘밥 딜런’이 떠오른다. 그 둘은 많은 부분이 닮았다. 아니 사실 한대수가 딜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포크 음악가 가운데 딜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가 있겠느냐만 유독 한대수의 음악은 딜런의 음악을 많이 떠올리게 한다. <물 좀 주소>, <바람과 나> 그리고 <행복의 나라로> 같은 시적인 가사들이 그러하며 다른 가수가 부르면 그 맛이 안 나는 독특한 창법도 그러하다.
한대수의 음악이 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건 그가 걸어온 길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디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했던 이방인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산에서 무녀독남의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핵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그의 나이 7살에 머나먼 타국에서 실종이 되면서 그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를 그는 한 대담에서 ‘외로움’이라고 칭했다.
시간이 흘러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미국에서 아버지를 찾았다는 얘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가 마주친 건 그리움의 기억에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낯선 존재의 모습이었다. 미국의 코넬 대학교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했던 아버지는 기억이 사라진 채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원어민처럼 완벽한 영어를 쓰며 살고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찾아서 같이 살기 위해서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외로움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소수민족으로서의 차별,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와의 관계는 쉽지 않았으며 그런 시간을 그는 견뎌야만 했다.
여러 대담에서 한대수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못 받은 것 같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주인공 유진 초이처럼 그는 한국과 미국 어디에서도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으며 그렇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에게 어느 노래 가사처럼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의 노래 가사는 유독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한다. <물 좀 주소>를 통해 사랑을 갈구하며, <바람과 나>에서는 바람과 같은 무명, 무실, 무감한 자유를 부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의 으뜸 명곡이라고 생각하는 <행복의 나라로>에서는 봄과 새들의 소리, 울음과 웃음, 그리고 태양이 있는 행복의 나라를 염원한다.
생각해 보면 노래 속에 표현된 그는 고독했으며 이방인으로 사는 삶을 부정하기보다는 자유로운 나그네의 정서로 승화시켰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히피’였으며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보헤미안’이길 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명 그러한 생활 방식은 고통스러울 정도의 어려움을 불러오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마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작년에 낸 그의 사진집 제목은 《삶이라는 고통》이다.
한 대담에서 그는 미국에서 살며 아버지 일을 돕던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창밖으로 본 하늘과 광야가 너무나 슬퍼서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라는 가사를 썼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행복은 고통과 슬픔이 있어야 더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에 ‘행복만’ 존재하는 나라는 불가능한, 그저 희망사항의 표현이라고 이해되지만 그럼에도 팬의 마음으로 이제는 느지막이 얻으신 외동딸 양호 양에게 자신은 받지 못해서 외로움으로 채워야만 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시며 그런 시간 속의 행복과 함께 오래도록 좋은 음악을 들려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임세혁
송곡대학교 K-POP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