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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문학100리길' 답사기

이효석, 모두 272편의 문학 작품 남겨

효석문학 100리길 제4구간 답사기 (13)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4년 6월 10일(월)

답사 참가자: 김혜정 송향섭 윤석윤 윤희태 이상훈 전선숙 최동철 황병무 (8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6월 16일

 

효석문학100리길의 제4구간은 방림농공단지~평창 용항리 경로당까지다. 평창군에서 만든 소책자에서는 이 길의 이름을 ‘옛길 따라 평창 가는 길’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뱃재 옛길을 따라 산을 넘고 숲길을 지나 만나는 빼어난 평창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기암절벽을 조망할 수 있는 구간으로 흙길을 걸으면서 청정한 자연을 즐기며 맑은 산소를 마실 수 있는 길이다. 주진리와 용항리 강변길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으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과 맑고 깨끗한 평창강의 물소리까지 그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효석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효석은 경성에서 3년을 살다가 1934년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영어 교수로 부임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교수가 된 뒤 효석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었다. 평양에서 이효석은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1936년)을 비롯한 장ㆍ단편 소설은 물론 <낙엽을 태우면서>와 같은 산문들을 발표하면서 문학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1938년에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었으나,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현재의 김책공업종합대학)가 신설되고 이효석은 교수직을 유지하며 문학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 상류층 지식인이었고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그는 문학 말고도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이효석은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만도린과 키타를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효석은 고전음악을 사랑한 애호가였다. 이효석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베토벤의 <대공>을 즐겨 들었다.

 

이효석은 소설에 음악을 자주 등장시켰다. 1939년 발표한 장편 <화분(花粉)>에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비롯하여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작이 잇달아 나온다. 단편 <가을과 山羊>에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 등장한다. 이효석은 음악을 요술쟁이에 비유했다. “음악은 정신의 문을 열어 주는 신기한 요술쟁이다.”

 

이효석은 한 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김유영, 서광제, 안석영 등과 함께 '조선 씨나리오ㆍ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창작한 희곡과 시나리오 7편 가운데 생전에 영화화한 작품은 <화륜>(1931년 개봉, 김유영 감독), <애련송(愛戀頌)>(1939년 개봉, 김유영 감독)이 있다.

 

그는 조선 으뜸 인기 작가로 유명해지면서 건강을 잃을 정도로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이는 효석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서라기보다는 문학에 대한 신념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시절에도 원고료는 많은 액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40년에 발표한 수필 <괴로운 길>에 그의 힘들었던 문학의 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두 번에 아마 한 되의 피는 쏟았을 성싶다. … 중략 … 별다른 원인이 아니라 몸의 쇠약에 기인한 것이었고 쇠약은 과로에서 오고 과로는 봄 이후 원고의 집필에서 온 것인 듯하다. 이월 이래 두 가지의 장편 소설에 붙들려 사백 자 구백 매의 원고를 써오는 중이다. 유월 한 달 소설이 끝날 때까지는 천 매를 훨씬 넘으리라고 생각한다. … 중략 … 넓게 묻노니 예술의 길 같이 어려운 것이 어디 있으며 보다 더 어려운 길이 무엇이뇨. 독창(獨創)의 길인 까닭이다. 소설가라고 다른 재조(才操)나 능(能)이 없어서 소설만을 쓰는 것이 아니다. 소설을 쓸 정도의 사람이라면 다른 무엇을 시키든 많이 열 사람 틈에 끼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가장 곤란한 길을 자청해서 고른 것은 한갓 보람과 자랑을 느낀 까닭 이외에 무엇이 있으랴. … 중략 … 반년 동안에 천 매 원고를 쓴댔자 장단 원고료로는 한여름의 휴양비도 못 된다. 작가의 노작(勞作)을 위무(慰撫)함이 문화 사회의 공덕(公德)일 때가 언제나 올 것인가.

 

그렇지만 효석의 생활 수준은 당시 일반인의 삶보다는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효석은 1939년과 1940년 두 차례 만주의 하얼빈을 여행하였는데, 이 유럽풍 도시에서 <벽공무한(碧空無限)>, <하얼빈(哈爾濱)> 등의 작품을 썼다.

 

이효석은 문학에 대한 자기의 꿈을 실현하고, 영문학 교수로서 또 인기 작가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940년 2월에 사랑하던 부인이 복막염으로 갑자기 죽자, 이효석은 실의에 빠지고 건강을 해치면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못한다. 그는 결핵성 뇌수막염에 걸려 1942년 5월 25일 요절한다. 이효석의 생애 마지막 2년은 고통 중에 방황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효석은 책임감 있는 작가였다. 그는 방황하면서도 청탁받은 원고는 물론 계획했던 작품을 끝까지 집필하였다. 이효석은 35년 3개월 2일의 짧은 생애 동안 소설 98편, 수필 110편, 평론, 시나리오. 희곡 등을 포함하여 모두 272편의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지인들이 붙여준 가산(可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히 산이라 할 만큼 한국 근대문학에 큰 업적을 남기고 간 인물이다.


 

 

이효석의 장녀 나미(奈美, 1932~2015)는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평양의 외삼촌 집에서 살았다. 1949년 월남한 뒤 친척 집 등을 떠돌다가 1950년에 혼인했다. 1982년에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이효석기념사업회'와 '이효석문학연구회'를 세워 부친의 문학세계와 존재를 재조명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83년에는 출판사 '창미사'를 세워 1970년대 이래 나라 안팎에 흩어진 부친의 작품들을 모아 《이효석전집》을 펴냈다. 1992년부터 부친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인세조차 받지 못해 2006년에는 운영난 때문에 기념사업회를 닫았다. 그 뒤 그녀는 중병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2015년 9월에 숙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효석의 장남 우현(禹鉉)은 193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 조부모가 계시는 봉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부친의 작품을 전집으로 내서 번 인세 400달러를 가지고 미국에 유학한다. 위스콘신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혼인하고 활동하다가 2011년 귀국하였다. 그는 2012년에 이효석문학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이효석문학상을 후원하고 있다. 그는 2004년에 <메밀꽃 필 무렵>을 영어로 번역한 바 있다. 현재 진부면에서 살고 있는 그는 2023년 6월 23일 부친의 친필 원고와 가족 사진 등 유품을 봉평면에 있는 (사)이효석문학선양회에 기증했다.

 

 

이제 답사기로 돌아가자. 제3구간의 도착지가 제4구간의 출발지가 된다. 아침 9시 30분에 모두 8명이 방림2리 마을회관을 출발하였다. 날씨는 6월 초인데도 덥지 않았다. 아주 쾌청한 하늘은 아니고 약간 구름이 끼었지만 사진을 찍으면 파랗게 나왔다. 가끔 바람이 불고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평창읍에 살며 열심히 환경운동을 하는 송향섭 선생이 이날 답사에 참여하였다. 송 선생은 평창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들꽃을 많이 길러 본 경험이 있어서 이날 우리가 모르는 꽃 이름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표지판은 뱃재 옛길을 가리킨다.

 

 

우리는 뱃재를 넘는 옛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이 끝나면서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앵두나무를 발견하였다. 마침 앵두가 빨갛게 익어서 우리는 몇 개씩 따서 맛을 보았다. 오랜만에 앵두를 직접 따 먹으니, 맛이 좋았다. 이제는 산과 들에 보이는 모든 나무의 잎이 돋아났다. 산은 완전히 녹색으로 칠해졌다. 길가에는 여러 가지 풀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계속)